추모·학술·문화사업으로 반세기 인연 이어가

[더팩트ㅣ전남광주=김승일 기자] 정진백 김대중추모사업회 전국회장은 1970년 9월 29일 당시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김대중이 선출됐다'는 소식을 전한 신문 한 장을 아직 간직하고 있다.
반세기가 넘도록 간직해 온 '동아일보 스크랩북'이다.
정 회장은 그때부터 김 전 대통령을 자신의 삶에서 방향을 잃지 않게 해준 '북두칠성 같은 이정표'로 기억한다.
그렇게 시작된 한 사람의 기억은 김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뒤 추모사업으로 이어졌고, 이제는 전시와 책, 공연과 영화로 다음 세대에게 전해지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17주기를 맞은 18일 <더팩트>는 전남광주시 화순군 도곡면에 있는 '김대중기념공간'을 찾아갔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삶과 정신을 기억하는 공간인 이곳에는 정 회장이 오랜 시간 모은 자료와 책, 기록물이 빼곡히 자리하고 있었다. 평화갤러리에는 김 전 대통령의 삶과 민주주의 역사를 담은 기록이 놓여 있고, 도서관은 2만여 권의 장서를 갖췄다. 영상 상영과 공연이 가능한 공간도 마련돼 있다.
지난 14일에는 정 회장과 극단 푸른연극마을, 가객 정용주(광주 산울림)이 함께 조성한 문화예술공간 '함께 가는 길'도 문을 열었다. 전시와 도서, 공연을 한 공간에서 만날 수 있도록 꾸린 곳이다.
김대중을 기억하는 방식이 추도식과 기념식에서 문화와 예술로 한 걸음 더 넓어지고 있는 셈이다.

◇신문 속 정치인에서 직접 마주한 김대중으로
정 회장이 김 전 대통령을 처음 주목한 것은 1970년이었다.
당시 제7대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김 전 대통령의 소식을 접한 뒤 관련 기록을 모으기 시작했고, 그 관심은 훗날 직접적인 교류로 이어졌다.
1987년 대통령 선거 당시 김대중 후보를 비판적으로 지지하는 단체에서 활동했던 정 회장은 선거 과정에서 김 전 대통령과 여러 차례 만나며 당시 민주주의에 대한 김 전 대통령의 강한 열망과 신념을 가까이에서 접하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에도 정 회장은 1991년에는 월간 '사회평론'에서 김 전 대통령을 직접 인터뷰하며 당시 정치 현안뿐 아니라 사회 전반을 바라보는 김 전 대통령의 식견과 문제의식을 접하면서 다시 한번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회상한다.
그에게 김대중은 단순한 정치인이 아니었다.
독재와 정치적 탄압 속에서 여러 차례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도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를 포기하지 않은 삶 자체가 하나의 기준이었다.
김 전 대통령이 2009년 8월 18일 서거하자 정 회장은 곧바로 '기억하는 일'을 시작했다.
김 전 대통령이 생전에 남긴 어록과 역사적 장면을 미술과 서예로 기록하는 작업에 나선 것이다.
조방원·여원구·이돈흥·전명옥·여태명 등 서화가와 서기문 전남대 미술학과 교수 등이 참여해 김대중 역사기록화와 어록 200여 점을 준비했다.
2010년 8월 18일 서거 1주기에는 서울 인사동 한국미술관에서 이희호 여사가 참석한 가운데 대규모 전시도 열었다.
이후 김대중평화센터의 권유를 받아 본격적으로 추모사업의 한 축을 맡게 됐다.
정 회장은 "김대중 대통령은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와 세계의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에 큰 공적을 남긴 지도자"라며 "다섯 번의 죽을 고비와 망명, 연금과 감시를 겪으면서도 용서와 화해를 말했던 삶 자체가 '행동하는 양심'이었다"고 회고했다.

◇추도식에서 학술회의까지…17년간 이어진 '김대중 기억하기'
김대중 서거 이후 정 회장의 일상 한편에는 늘 추모사업이 자리했다.
매년 8월 서거일에는 추도식을, 1월에는 탄신 기념행사를 열었다. 학술회의와 강연, 전시회, 영상 제작도 꾸준히 이어졌다.
국내 학자와 정치·사회 인사를 비롯해 해외 석학까지 100여 명이 그동안 강연과 학술행사에 참여했다.
정 회장은 단순히 한 정치인의 업적을 기리는 공간을 만드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김대중이 평생 고민했던 민주주의와 평화, 인권의 문제를 지금을 사는 사람들이 다시 토론하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봤다.
그 결과물이 현재 전남광주시 화순군 도곡면에서 운영 중인 약 300평 규모의 김대중기념공간이다.
정 회장은 이곳을 "김대중 대통령의 정신을 아름답게 구현하면서 지역민들과 소통하고 문화적 역량을 함께 키워가는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그동안 쌓인 기록과 책을 한곳에 모으는 데 그치지 않고, 전시와 공연, 강연을 통해 사람들이 직접 김대중이라는 인물을 만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구상이다.

◇정치적 영웅 아닌 '인간 김대중'을 무대에 올리다
이 공간에서 김대중을 기억하는 또 한 명의 사람은 오성완 푸른연극마을 대표다.
두 사람의 인연은 2024년 초 오 대표의 연극을 인상 깊게 관람한 정 회장이 먼저 오 대표에게 제안을 건네며 시작됐다.
정치적 영웅 김대중이 아니라 인간 김대중을 연극으로 만들어보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오 대표는 "김대중이라는 인물이 가지는 의미가 너무 커 이전까지 연극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다"며 "당시엔 부담감 때문에 많은 고민을 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약 2개월간 고민하며 자료와 회고록을 찾아보기 시작한 오 대표에게 정치적 업적 너머의 한 인간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러 차례 죽음의 위협을 받고 사형선고까지 받았으면서도 왜 민주주의를 포기하지 않았는지, 자신을 박해했던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게 해달라고 왜 기도했는지가 궁금해졌다.
그 질문이 연극 '사형수 김대중'의 출발점이 됐다.
◇사형선고 앞에서도 민주주의를 놓지 않은 한 인간
오 대표가 세운 원칙은 분명했다. 김대중의 전 생애를 영웅적으로 나열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작품은 1980년 5월 17일 체포 이후 중앙정보부 조사와 사형선고, 수감생활, 미국으로 떠나기까지의 시기에 초점을 맞췄다.
대본 작업에만 약 4개월이 걸렸다. 외모와 목소리를 그대로 흉내 내는 방식도 피했다.
직접 김대중 역을 맡은 오 대표는 공연 직전까지도 표현 방법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김대중 대통령과 똑같아질 수는 없다"며 "배우 오성완이 진심을 다해 한 인간의 내면으로 한 걸음씩 들어가자는 생각으로 접근했다"고 말했다.
'사형수 김대중'은 2024년 10월 처음 무대에 오른 뒤 경기 수원시와 안양시 등 여러 지역으로 공연 무대를 넓혀갔다.
무거운 주제에도 공연장에서는 눈물을 흘리는 관객이 적지 않았고 공연을 마친 배우들에게 기립박수가 이어지기도 했다.
오 대표는 "이 작품이 광주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대한민국 민주주의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 공연을 다니며 확인했다"고 말했다.

◇계엄을 겪은 아이들에게 민주주의를 말하다
작품이 처음 만들어졌을 당시만 해도 '사형수 김대중'은 과거의 민주주의 역사를 돌아보는 연극에 가까웠다.
그러나 2024년 12월 비상계엄 사태를 거치며 작품을 바라보는 관객들의 시선에도 변화가 생겼다.
오 대표는 특히 부모와 함께 공연장을 찾는 어린이와 청소년이 늘어난 점을 눈여겨봤다.
그는 "지금 학생들도 계엄이라는 말을 교과서가 아니라 현실에서 경험한 세대"라며 "민주주의는 한 번 얻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지키고 가꿔야 하는 생명체와 같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고 말했다.
푸른연극마을은 앞으로 기존 공연을 이어가는 동시에 작품 일부를 재구성한 소극장판과 청소년 대상 학교 방문 공연도 구상하고 있다.
'사형수 김대중'은 김 전 대통령 서거 17주기인 8월 18일 빛고을시민문화관에서 다시 한 번 무대에 오른다.
서거 17주기에 맞춰 김대중을 기념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다.
◇스크린에서도 이어지는 김대중의 시간
김대중을 기억하는 작업은 무대에서 스크린으로도 이어진다.
정 회장은 오는 12월 18일 서울 용산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길위에 김대중'의 후속작인 '대통령 김대중'이 공개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앞선 작품이 정치에 뛰어든 청년 김대중부터 민주화운동의 중심에 서기까지 그의 여정을 다뤘다면, 후속작은 대통령으로서 김대중이 맞닥뜨린 시대와 선택을 보다 집중적으로 조명하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정 회장은 전시와 강연, 연극과 영화처럼 서로 다른 문화적 방식으로 김대중의 삶을 기록하고 전달하는 작업이 중요하다고 본다.
특히 김대중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세대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단순한 추모를 넘어 '왜 그 사람이 그런 선택을 했는가'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17년 뒤에도 남은 질문…'왜 지금 김대중인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지 올해로 17년이 됐다.
그를 직접 기억하는 세대는 점점 나이가 들고, 지금의 청소년에게 김대중은 역사책에서 먼저 만나는 이름이 됐다.
정 회장과 오 대표가 추모와 문화사업을 이어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기억하지 않으면 역사는 사라지고, 기록만 남겨둔다고 해서 그 정신까지 자연스럽게 계승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오 대표는 "김대중 대통령을 무조건 영웅으로 떠받드는 작품을 만들고 싶은 것이 아니다"며 "두려움과 고통을 느끼는 한 인간이 극한의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했는지를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정 회장이 56년 전 오려 붙인 신문 한 장은 이제 누렇게 바랬다.
그러나 그 신문 속 청년 정치인을 바라보던 한 사람의 기억은 전시실의 기록으로, 서가의 책으로, 무대 위 배우의 대사로 다시 살아나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지 17년이 된 이날 화순군 도곡면의 작은 공간에서는 여전히 그의 이름을 적은 책장이 넘겨지고 오후에는 빛고을시민문화관 무대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한 인간이 다시 민주주의를 이야기한다.
김대중이 생전에 남긴 '행동하는 양심'이라는 말은 그렇게 추모를 넘어 다음 세대에게 다시 질문을 던지고 있다.
민주주의와 평화, 용서와 화해를 말했던 한 정치인의 삶을 우리는 오늘 어떤 방식으로 기억하고 이어갈 것인가.
- 발로 뛰는 <더팩트>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 · 카카오톡: '더팩트제보' 검색
- · 이메일: jebo@tf.co.kr
- · 뉴스 홈페이지: https://talk.tf.co.kr/bbs/report/write
- · 네이버 메인 더팩트 구독하고 [특종보자→]
- · 그곳이 알고싶냐? [영상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