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팩트ㅣ봉화=김성권 기자] 최근 개봉한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불러온 조선 전기 격변기의 재조명은 스크린을 넘어 실제 역사 현장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만든다. 그 여정의 끝에서 마주한 곳은 경북 봉화. 이곳에는 단종을 향한 충절과 절의를 삶으로 실천한 선비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초봄의 찬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날 봉화군 도촌리의 고즈넉한 산자락 아래 자리한 도계서원을 찾았다. 인기척 드문 서원 마당은 고요했지만 그 적막 속에는 오히려 더 또렷한 이야기가 흐르고 있었다.
도계서원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신념을 지킨 도촌 이수형의 삶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곳이다. 계유정난 이후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그는 단종이 유배된 영월 방향인 북쪽을 향해 '공북헌'을 짓고 평생을 보냈다.
직접 마주한 공북헌은 생각보다 훨씬 작고 단출했다. 한 칸 남짓한 방, 그리고 북쪽으로 난 창 하나. 그 창을 통해 바라보았을 북쪽 하늘을 떠올리자, 공간 전체가 하나의 상징처럼 느껴졌다.
서원 관계자는 "이곳은 단순한 거처가 아니라, 한 인간이 끝까지 지키고자 했던 가치가 응축된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견일사, 공극루 등 건물 이름 하나하나에도 '오직 한 임금을 향한 마음'이 담겨 있다는 말이 인상 깊게 남았다.

도계서원을 뒤로하고 향한 곳은 상운면 구천리의 야옹정. 길을 따라 들어서자 고택과 정자가 어우러진 풍경이 펼쳐졌다.
야옹정은 전응방이 조부 전희철의 유훈을 받들어 세운 정자다. 벼슬을 마다하고 학문과 후학 양성에 힘쓴 그는 매년 영월 장릉을 찾아 단종을 기리는 일을 평생 이어갔다고 전해진다.
정자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탁 트인 풍경 속에서도 묘한 절제와 단정함이 느껴졌다. 화려하지 않지만 흐트러짐 없는 구조는 마치 이곳에 깃든 삶의 태도를 닮아 있었다.
특히 현판이 퇴계 이황의 글씨로 전해진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이 공간이 단순한 개인의 은거지가 아니라 당대 사림 사회가 공유한 가치의 상징임을 실감하게 된다.

이날 여정의 마지막은 청량산박물관이었다. 조용한 전시실 안에는 봉화 지역 누정과 관련된 기록과 연구 성과들이 차분히 정리돼 있었다.
'봉화의 누정기'와 '전통건축'같은 연구총서를 넘겨보며, 조금 전 다녀온 공북헌과 야옹정이 단순한 '옛 건물'이 아니라 오랜 시간 축적된 기억의 결과물임을 새삼 느끼게 된다.

박물관 관계자는 "현장을 보고 기록을 함께 이해할 때 비로소 문화유산의 의미가 온전히 보인다"고 말했다. 실제로 건물에서 느꼈던 인상들이 기록과 맞물리며 더 또렷하게 다가왔다.
영화가 던진 질문은 단순히 과거의 이야기에 머물지 않는다. 무엇을 지키며 살아갈 것인가. 봉화의 도계서원과 야옹정은 그 질문에 대한 한 가지 답을 보여준다.
벼슬을 버리고도 지킨 신념 그리고 그것을 다음 세대까지 이어낸 삶. 이곳의 선비들은 거창한 말 대신, 조용한 실천으로 자신들의 선택을 증명해 왔다.
봉화군 관계자는 "지역에 전해 내려오는 충절의 문화유산을 통해 많은 이들이 선비정신의 가치를 되새기길 바란다"고 전했다.
스크린 속 이야기에서 출발한 여정은 결국 현실의 공간에서 더 깊은 울림으로 이어졌다. 봄빛이 내려앉은 봉화의 서원과 정자에는 여전히 북쪽을 향한 마음과 꺾이지 않는 절의가 고요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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