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팩트ㅣ울릉=김성권 기자] 변화는 거창한 계획서보다 작은 메모에서 시작될 때가 많다. 낡은 회의실의 두꺼운 보고서가 아니라, 젊은 공직자의 손끝에 붙은 포스트잇 한 장이 조직의 방향을 바꾸기도 한다. 지난 11일 울릉군청 제1회의실에서 열린 '에메랄드 캔버스'는 바로 그런 장면을 보여준 자리였다.
첫 회의의 주인공은 간부가 아닌 7급 이하 실무 공무원들이었다. 군정을 실제로 움직이는 현장의 실무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울릉의 미래를 이야기했다.
군수를 포함한 15명의 참석자는 계급보다 아이디어를 중심에 놓고 토론을 이어갔다. '에메랄드 캔버스'라는 이름처럼, 울릉도라는 천혜의 섬을 하나의 도화지로 삼아 각자의 정책 밑그림을 자유롭게 그려보는 자리였다.
이날 제시된 아이디어는 현장의 고민에서 출발했다. 종이 없는 행정 시스템 구축과 실무 중심 교육 강화는 업무 효율성을 높이려는 내부의 절실한 요구였다.
관광 분야에서는 자동차극장 조성, 오토바이 전용 주차장, 야간 관광 활성화 등 울릉 관광의 구조적 한계를 보완하려는 현실적인 제안이 이어졌다. 특히 '1000원 주택'이나 빈집을 활용한 임대주택 같은 정주 여건 개선 방안은 청년 공무원 스스로가 울릉에 정착하고 싶다는 바람이 담긴 정책 제안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무엇보다 눈에 띈 것은 토론 방식이었다. 참석자들은 사전에 포스트잇에 의견을 적어 제출했고, 이 아이디어들은 직급을 떼고 오직 내용으로만 평가받았다.
상명하복의 회의가 아니라 서로의 생각을 연결하는 대화의 장이 만들어진 것이다. 군수가 직접 경청하고 실무자가 답하는 과정은 행정의 문턱을 낮추는 상징적인 장면이기도 했다.
남한권 울릉군수는 "현장의 경험이 군정에 녹아들 때 실효성 있는 정책이 나온다"고 말했다. 이 한마디는 이번 행사의 의미를 압축한다. 정책은 결국 현장에서 작동해야 하고, 그 현장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은 바로 실무자들이기 때문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실행력이다. 아이디어는 언제나 풍부하지만, 정책으로 완성되는 과정은 쉽지 않다. 예산과 제도, 행정 절차라는 현실의 벽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울릉군이 이번에 제시된 제안 가운데 실현 가능성이 높은 사안을 부서 검토에 즉시 넘기겠다고 밝힌 것은 그래서 의미 있는 출발점이다.
'에메랄드 캔버스'라는 이름의 첫 장은 채워졌다. 이제 남은 일은 그 밑그림을 실제 정책이라는 색으로 채워 넣는 것이다. 젊은 공직자들의 아이디어가 단순한 회의 기록으로 끝나지 않고 울릉의 변화로 이어질 때, 그 포스트잇 한 장은 행정 혁신의 상징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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