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팩트ㅣ최현정 기자]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시상식'이라는 그래미 어워드(Grammy Awards)에는 또 하나의 수식어가 늘 따라붙는다. 바로 '세상에서 가장 보수적인 시상식'이 그것이다.
그룹 방탄소년단(BTS)이 그래미 어워드의 보이콧을 선언했다. 방탄소년단(RM 슈가 진 제이홉 뷔 지민 정국)은 29일 각 멤버의 공식 소셜 미디어에 "우리는 올해 그래미에 작품을 출품하지 않기로 했다"고 적었다.
방탄소년단이 그래미 어워드를 거부한 이유를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그 배경에는 그래미 어워드의 '베스트 아시안 팝 뮤직 퍼포먼스(Best Asian Pop Music Performance)' 부문 신설이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래미 어워드를 운영하는 미국 레코딩 아카데미는 6월, K팝 J팝 C팝 등 아시아 언어를 사용하는 대중음악을 조명하기 위한 '베스트 아시안 팝 뮤직 퍼포먼스'를 포함해 '베스트 라틴 송(Best Latin Song)', '베스트 트래디셔널 팝 보컬 퍼포먼스(Best Traditional Pop Vocal Performance)', '베스트 R&B 콜라보레이션 또는 듀오/그룹 퍼포먼스(Best R&B Collaboration or Duo/Group Performance)', '베스트 트래디셔널 포크 앨범(Best Traditional Folk Album)'의 5개 부문을 신설한다고 발표한 바 있다.
미국 레코딩 아카데미의 이같은 발표가 있자 일각에서는 최근 글로벌 시장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K팝과 라틴팝 같은 특정 지역이나 국가의 음악을 일종의 유리천장에 가두고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시키기 위한 숨은 의도가 담긴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공교롭게도 올해 2월 열린 제68회 그래미 어워드에서는 푸에르토리코 출신 아티스트 배드 버니(Bad Bunny)가 역사상 처음으로 영어가 아닌 전곡 스페인어 앨범 'DeBÍ TiRAR MáS FOToS(데비 티라르 마스 포토스)'로 '올해의 앨범(Album of the Year)'을 수상했고, 3월에는 'K팝의 아이콘' 방탄소년단이 3년 9개월 만에 신작 'ARIRANG(아리랑)'을 발매했던 터라 사람들의 의혹은 더욱 커졌다.
여기에 방탄소년단도 "음악이 지역이나 언어로 구분되기보다 음악 그 자체로 들리고 사랑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적으며 출품 거부의 이유가 '베스트 아시안 팝 뮤직 퍼포먼스' 신설에 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며 그래미 어워드에 항의의 뜻을 밝혔다.
사실 그래미 어워드는 그 권위나 위상과 달리 1980년대부터 '영어권 백인 남성의 음악을 선호하고 특정 인종이나 음악 장르를 차별한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은 굉장히 보수적인 시상식이다. 특히 힙합 장르 뮤지션이나 흑인 뮤지션들이 이런 불만을 공개적으로 드러낸 적이 많으며 방탄소년단 이전에도 보이콧을 선언한 사례가 많다.

그중 가장 유명한 사건은 2021년 제63회 그래미 어워드에서 벌어진 '위켄드(The Weeknd) 스넙(Snub, 무시하다의 뜻) 논란'이다. 당시 위켄드가 발표한 네 번째 스튜디오 앨범 'After Hours(애프터 아워스)'는 평단의 호평은 물론 수록곡 'Blinding Lights(블라인딩 라이트)'가 '빌보드 선정 올타임 N0.1 히트곡'에 오르며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큰 성공을 거뒀지만 그래미 어워드는 수상은커녕 단 한 부문에도 후보에 올리지 않아 엄청난 논란에 휩싸였다.
해당 사건으로 위켄드는 "앞으로 발매하는 앨범이나 음원을 일절 그래미에 출품하지 않을 것"이라며 보이콧을 선언했고, 비욘세, 저스틴 비버, 칸예 웨스트, 드레이크, 원디렉션의 제인 말리크, 니키 미나즈, 위즈 칼리파, 테야나 테일러, 피오나 애플 등의 스타들도 이 해 그래미 어워드에 불참을 선언했다.
또 그래미 어워드는 역대 가장 낮은 시청률과 전 세계에서 쏟아지는 비난에 직면하는 등의 역풍에 시달려야 했고, 결국 후보 선정에 강력한 권한을 지닌 비밀 위원회 삭제, 회원 유권자들이 투표할 수 있는 카테고리 축소, 신입 회원으로 대거 위촉 등의 후속 대책을 내놓았다.
위켄드 외에도 래퍼 에미넴(EMINEM)은 "그래미 어워드는 힙합 아티스트를 시청률 확보의 수단으로만 사용하고 상은 주지 않는다. 앞으로 1억 년은 나가지 않을 것"이라고 비판하며 2011년 이후 불참을 이어가고 있으며, 제이지(Jay-Z), 카니예 웨스트(Kanye West), 아리아나 그란데(Ariana Grande), 드레이크(Drake), 프랭크 오션(Frank Ocean), 모건 월렌(Morgan Wallen) 등 굵직한 아티스트들 보이콧을 선언한 적이 있거나 여전히 보이콧을 이어가고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들의 보이콧이 화제를 모은 이유는 그만큼 음악 신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거물 아티스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방탄소년단 역시 이 '보이콧 아티스트 목록'에 합류하게 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방탄소년단이 전 세계 음악 시장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위상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새삼 확인하는 사례가 됐다는 의견도 나온다.
실제로 방탄소년단의 그래미 어워드 불참 선언은 국내뿐만 아니라 미국 및 해외 주요 매체도 일제히 이를 중요한 기사로 다루고 있으며, 미국 레코딩 아카데미 하비 메이슨 주니어 CEO는 30일 직접 입장문을 내고 "'베스트 아시안 팝 뮤직 퍼포먼스' 부문의 신설은 더 많은 아티스트가 주목받을 기회를 제공하기 위함이지 누군가를 구분하거나 나누려는 게 아니다. 또 장르 부문에 출품한다고 해서 제너럴 필드 등 종합 부문 심사를 받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라고 급히 논란의 진화에 나서기도 했다.

문체부 산하 문화예술정책자문위원회 윤동환 위원은 "지금까지 그래미 어워드 보이콧을 한 사람을 돌이켜 보면 다들 이름만 들으면 알 수 있는 대단한 사람들이다. 방탄소년단도 이들과 동일한 위치에 올라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며 "방탄소년단이니까 이 정도 파급력이 발생했다고 생각한다. 이 일을 계기로 그래미 어워드의 기조도 좀 더 개방적으로 바뀌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임희윤 대중문화 평론가도 "방탄소년단의 보이콧 선언은 그 자체로 대단한 일이다. 그동안 그래미 어워드가 수많은 비판에 직면하고 이슈가 됐던 사례는 모두 북미 본토 아티스트에 한정됐다"며 "그런데 아시아, 한국의 아티스트가 문제를 제기하고 이것이 전 세계적인 이슈가 됐다는 것은 그 자체로 방탄소년단의 체급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주는 엄청난 사례"라고 평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궁금한 점은 '과연 방탄소년단의 그래미 어워드 보이콧이 얼마나 이어질 것인가'다.
앞서 언급한 그래미 어워드 보이콧을 선언한 아티스트는 크게 세 가지 부류로 나뉜다. 첫째는 보이콧을 철회하고 작품 출품과 시상식 참석을 재개한 경우, 둘째는 (대개 소속 레이블의 이해관계로 인해) 작품은 출품하지만 시상식에는 참석하지 않는 경우, 셋째는 작품도 출품하지 않고 시상식도 참석하지 않는 경우다.
또 절대로 화해할 수 없을 만큼 틀어진 것처럼 보이는 관계가 회복되는 경우도 제법 있다. 일례로 '영원히' 그래미에 작품을 출품하지 않겠다던 위켄드는 2025년 보이콧을 철회하고 제67회 그래미 어워드에서 축하무대를 펼치기도 했다.
이처럼 방탄소년단 역시 올해는 경고와 항의의 뜻으로 출품과 참석을 거부했지만, 이후 새로운 앨범이 나오면 그래미 어워드와 관계를 회복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그래미 어워드는 보수성과 별개로 해마다 세부 규정이 조금씩 달라지는 시상식으로도 유명해, 방탄소년단의 다음 앨범이 나올 때에는 상황이 지금과 또 달라져 있을 확률도 있다.
임희윤 평론가는 "사실 정의감이나 책임감 등은 논외로 하고, 비즈니스만 놓고 보면 결국 그래미 어워드도 방탄소년단도 더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한 일종의 게임을 벌인 것으로 생각한다"며 "설령 그래미 어워드가 진짜로 시커먼 속내를 지니고 '베스트 아시안 팝 뮤직 퍼포먼스'를 신설했다고 해도 어차피 시상식이다. 올림픽이나 월드컵에 나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더 유리한 점을 활용하면 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예를 들어 배드 버니도 2021년 '최우수 라틴 팝'을 수상한 이후 2026년 '올해의 앨범'을 수상했다. 그래미 어워드의 의도가 어떻든 '베스트 아시안 팝 뮤직 퍼포먼스'를 잘 이용하면 방탄소년단뿐만 아니라 다른 K팝 아티스트들이 한국어 앨범으로 북미나 글로벌 시장에 진출하는 기회의 장이 될 수도 있다"며 "이번에는 경고를 날리고 체급을 키웠다고 하면, 다음 앨범에서는 이런 지점을 잘 활용할 방안 역시 고민해 봐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laugardagr@tf.co.kr
[연예부 | ssent@tf.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