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팩트ㅣ최수빈 기자] 배우 유승목에게 요즘은 조금 특별한 시간이다. 데뷔 36년 만에 처음으로 백상예술대상 조연상을 품에 안았고, 또 하나의 대표작이 된 '허수아비'에서는 묵직한 존재감으로 강한 인상까지 남겼다. 오랜 무명 시기를 묵묵히 견뎌낸 유승목의 시간이 새로운 빛을 보기 시작했다.
배우 유승목이 최근 서울 마포구 상암동 SM C&C 사옥에서 <더팩트>와 만나 ENA 월화드라마 '허수아비'(극본 이지현, 연출 박준우) 종영 기념 인터뷰를 진행했다. 극 중 차무진 역을 맡은 그는 이날 작품과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허수아비'는 연쇄살인사건의 진범을 수사하던 형사가 자신이 혐오하던 사람과 뜻밖의 공조 관계를 맺으면서 펼쳐지는 범죄 수사 스릴러다. 총 12부작으로 지난 26일 종영했다.
작품은 1986년부터 1991년까지 국내에서 발생한 실제 연쇄살인사건을 모티브로 전개됐다. 특히 34년 만에 진범이 밝혀진 이후 처음 선보이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관심과 기대를 모았다. 잊을 수도 없고 잊어서도 안 될 과거의 사건과 여전히 그 비극을 살아가는 현재의 사람들을 재조명해 진심 어린 위로를 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에 1화 2.9%(닐슨코리아, 전국 유료 가구 기준)로 출발한 시청률은 최종회에서 8.1%로 막을 내렸다. 이는 ENA 역대 시청률 2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숫자로도 의미 있는 성과를 남겼지만 유승목이 바라본 '허수아비'의 힘은 단순히 흥행에만 있지 않았다. 그가 꼽은 작품의 가장 큰 경쟁력은 바로 공감이었다.
"단지 범인만을 잡기 위한 이야기가 아니었어요. 당시 힘들고 아팠던 사람들에 대한 공감을 감독님이 함께 잘 살려주셨죠. 시청자분들도 그 부분에 공감해 주셨기 때문에 많이 좋아해 주셨던 것 같아요.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하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겠다는 부담도 있었지만 잘 만들어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해요."

특히 유승목에게 '허수아비'는 남다른 의미를 지닌 작품이기도 했다. 영화 '살인의 추억' 이후 다시 한번 같은 사건을 모티브로 한 작품에 참여하게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승목은 "이미 범인이 잡힌 상태에서 시작하는 이야기였기 때문에 당시 힘들었던 사람들에 대한 공감이 더 중요했다"며 "감독님이 그 부분을 잘 살려주신 것 같다. 같은 소재이긴 하지만 또 다른 느낌의 작품이라고 생각했다"고 강조했다.
유승목은 예비역 장군 출신 정치인 차무진 역으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발휘했다. 사건 담당 검사 차시영(이희준 분)의 아버지이기도 한 차무진은 흔들림 없는 태도와 절제된 말투, 그리고 상대를 압도하는 묵직한 아우라로 냉철한 권력자의 면모를 보여줬다. 짧은 등장만으로도 강한 긴장감을 형성하며 극의 중심축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유승목은 "차무진은 자기의 욕망과 권력을 쥐기 위해 주변 사람들을 모두 자기편으로 만들어야 하는 인물"이라며 "주변 사람들의 아픔 정도는 권력을 얻기 위한 과정처럼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보고 접근했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강렬한 악역을 설득력 있게 완성해 낸 데에는 오랜 시간 쌓아온 연기 내공이 뒷받침됐다. 유승목은 처음 강렬한 악역을 맡았던 작품으로 영화 '검은 집'을 떠올렸다. 그는 "보험사기단을 찾아가는 역할이었는데 캐릭터가 굉장히 강했다"며 "그 역할을 고민하면서 정말 많이 힘들었다. 연습도 많이 했는데 그런 역할이 저한테 잘 맞는 것 같다"고 웃었다.
"주변에서 어떤 역할을 해보고 싶냐는 질문을 정말 많이 받는데 저는 대답을 잘 못해요. 그냥 주어진 역할을 잘 표현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에요. 어떤 역할이든 잘 표현해서 시청자분들께 감동을 주고 싶은 마음이죠."

1990년 연극 '푼틸라와 하인 마티'로 데뷔한 유승목은 무대 연기만 해오다가 1999년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박하사탕'으로 매체 연기 데뷔를 한 이후 다양한 작품을 통해 시청자들과 만나왔다. 짧은 분량임에도 강한 임팩트를 남긴 그는 지난 제62회 백상예술대상에서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로 데뷔 36년 만에 조연상을 품에 안으며 오랜 시간 쌓아온 노력을 인정받았다. 이름보다 얼굴이 먼저 알려졌던 배우는 이제 작품을 단단히 지탱하는 믿고 보는 배우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유승목은 들뜨기보다 감사한 마음을 먼저 꺼냈다. 그는 "저한테는 용기를 주는 상이었다. 앞으로도 계속 잘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며 "그동안 꾸준히 연기해 온 시간을 박수쳐주는 느낌이었다"고 소감을 전했다.
"저와 비슷한 나이대 배우들 중에도 정말 연기 잘하는 분들이 많아요. 저는 작품을 쉬지 않고 계속해 왔지만 그러지 못한 배우들도 정말 많아요. 그래서 저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고 그저 감사하게 생각해요. 조금 시간이 지나면 지금의 관심도 수그러들 수 있겠지만 그래도 끝까지 연기를 잘하기 위한 배우로 계속 가야겠다고 다짐했죠."
데뷔 36년 만의 수상. 누군가에게는 늦었다고 느껴질 수도 있지만 유승목에게는 더욱 특별한 시간이었다. 긴 무명의 시간을 묵묵히 견디며 현장을 지켜왔기에 더 값진 결과였다. 유승목은 "예전에는 '내가 없어 보이고 불쌍해 보여서 나를 불러주시나'라는 생각까지 했다"며 "그저 성실하고 모나지 않게 현장에서 열심히 하다 보니 계속 불러주시는 게 아닌가 싶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가 연기를 시작하면서 목표를 정했던 게 '연기 잘한다는 얘기를 듣는 배우가 되자'였어요. 그런데 요즘 시청자분들이 연기 잘하는 배우라고 말씀을 많이 해주세요. 그걸 보면서 '나 정말 꿈을 이룬 건가'라는 생각을 했죠. 정말 감사해요. 앞으로도 크게 욕심 안 부리고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착실하게 해서 계속 연기 잘한다는 이야기를 듣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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