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팩트ㅣ강일홍 기자] K-POP의 세계적 열풍 속에서 다문화는 더 이상 낯선 단어가 아니다. 그러나 70년대만 해도 '혼혈'이라는 이유만으로 편견과 시선을 견뎌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꿋꿋이 무대에 서서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지켜온 인물이 있다.
박일준(본명 박양엽)은 샌디김 윤수일 인순이 등과 함께 혼혈 1세대 가수로 아버지가 미군, 어머니가 한국인이다. 1977년 번안곡 '오진아'(원곡 'Unchanged Melody')로 데뷔해 '잘가요', '꽃네야' '왜 왜 왜' 등을 부르며 꾸준히 사랑받은 베테랑 가수다.
MBC '폭소대작전' 등에 예능인들과 고정패널로 단골 출연할 만큼 주목을 받았으나 이런 인기를 바탕으로 주류사업에 뛰어들었다가, 사업 실패로 수십억 원의 손실을 입고 힘든 시기를 보냈다.
한때 간경화 진단으로 생사의 갈림길에 섰지만,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그를 다시 일으켜세운 건 결국 노래였다.
최근 발표한 신곡 '우리가 남인가'는 박일준의 마지막 불꽃과도 같은 노래다. 그룹사운드 출신인 그가 디스코풍의 히트곡 '왜 왜 왜' 이후 19년만에 선보인 이곡은 생애 첫선을 보이는 트로트 장르이기도 하다.
'내 나이가 어때서'를 작사한 박웅 작사가가 6개월간 공을 들인 곡으로, 다문화 사회와 세대 간의 벽을 허무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긴 공백을 깨고 재기에 나선 박일준을 직접 만나 그간 근황과 음악, 그리고 인생 이야기를 들어봤다.



-정말 오랜만에 무대에서 뵙습니다. 요즘 방송에서 자주 뵙게 됐는데 근황부터 들려주시죠.
"건강이 한동안 좋지 않았어요. 간경화로 병원에 오래 있었고, 그때 '이제는 노래 못 부르겠구나'생각도 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회복이 됐고, 다시 무대에 설 수 있다는 게 기적 같아요. 요즘은 신곡 '우리가 남인가'로 전국 행사와 방송을 다니며 제2의 전성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박일준은 2002년 간경변과 식도정맥류 투병을 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4년 뒤 극적으로 건강을 회복해 디스코풍의 '왜 왜 왜'로 재기에 성공하지만, 건강문제로 가수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19년만인 올 4월 그는 자신의 첫 트로트 장르 '우리가 남인가'로 복귀했다. 소울 발라드를 주로 부른 그룹사운드 출신으로서는 파격적인 변신이다.
-신곡 '우리가 남인가'는 어떤 곡인가요?
"제목 그대로예요. '우리가 남인가?'라는 말 안에는 이 사회의 단절, 편 가르기를 넘어서자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작사가 박웅 씨가 다문화, 정치 갈등, 지방자치 로고송 트렌드까지 고려해서 6개월 동안 쓴 가사인데 지금의 세태와 기가 막히게 잘 들어맞습니다. 저는 이 노래로 사람들 마음이 조금이라도 따뜻해지면 좋겠어요."
박웅은 오승근이 불러 히트한 '내 나이가 어때서'의 작사가 겸 제작자다. 박일준으로부터 맞춤형 가사를 부탁 받고 무려 1년 가까이 고심끝에 만들었다. '내 나이가 어때서'가 100세 시대를 겨냥한 가사로 대중 공감대를 일궈냈다면, 이번 '우리가 남인가'는 글로벌 시대의 다문화 가정과, 정치 편가르기로 인한 사회적 갈등을 절묘하게 매칭했다는 평가를 듣는다.
-올 4월에 음반을 냈는데 벌써 곡의 반응이 꽤 뜨겁다고 들었습니다.
"네, KBS '가요무대'에서 벌써 다섯 번이나 방송됐습니다. 전국을 다니며 수많은 행사무대에서 불렀는데 현장에서도 반응이 좋은 편이에요. 중장년층은 물론 젊은 분들도 가사에 공감해주시더라고요. 이 노래를 부르기 위해 트로트 꺾기 연습을 많이 했고, 관객들로부터 이번 노래에 "진심이 느껴진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아직도 노래할 이유가 있다는 걸 느낍니다."

-잘나가던 시기에 뛰어든 사업이 실패하면서 큰 어려움을 겪으셨는데요.
"맞습니다. 인기 있을 때는 더 겸손하고 조심해야한다는 걸 직접 경험을 통해 뒤늦게 터득했죠. 갑자기 인기가 생기면 귀가 얇아지고 뭐든 하면 다 되는 줄 착각을 합니다. 당시 주류사업에 손을 댔는데, 결과는 참혹했어요. 빚이 수십억 원까지 불어나더군요. 사람도 떠나고, 자존심도 무너지고, 매일 술로 버텼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제 인생의 가장 큰 교훈이었죠."
-바로 그 무렵에 간경화 진단을 받으셨다지요?
"원인은 술이었습니다. 원래 그룹사운드 출신들이 술을 많이 먹기로 유명한데, 저는 사업까지 말아먹으면서 술을 달고 살았죠. 병원에서 '이대로 가면 얼마 못 간다'는 말까지 들었습니다. 그땐 정말 죽음이 코앞에 와있다는 걸 실감했어요. 인생의 소중한 진리를 깨달았죠. '돈도 명예도 다 소용없다, 결국 남는 건 노래와 사람뿐이다.' 그 이후로는 술도 끊고, 노래에 다시 인생을 걸었습니다."
박일준은 간경변과 함께 식도정맥류로 6번이나 수술을 받았다. 의료진들로부터 "살 가망이 높지 않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그는 꿋꿋하게 버텼다. 박일준은 "병원에서 '수술을 해도 50%가 채 안된다'는 심각한 말을 하는데도 무슨 배짱인지 저는 절대 죽을 것같지 않을 거란 확신이 섰다"고 말했다.
-지금은 다문화 가정으로 사회적 편견은 거의 없지만, 당시만 해도 혼혈로서의 성장 과정이 녹녹치 않았을 것같은데요.
"그렇죠. 어릴 때는 놀림도 많이 받았고, 무대에서도 편견을 느낀 적이 많았어요. 그래도 음악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죠. 말씀하신대로 다문화 가정이 자연스러운 지금 돌이켜보면 참 감개가 무량합니다. 그나마 가수로 데뷔한 뒤 대중의 인기를 얻으면서 형편이 나아졌지만, 그 이전까진 정말 모든게 힘들었죠."
박일준은 혼혈이란 사회적 편견 때문에 고통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이를 극복하지 못해 중학생 시절인 15살부터 술을 배웠다. 그는 "어린 나이였지만, 불편한 시선들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술을 마셨다"면서 "지금 생각하면 매우 불량한 청소년이었을텐데 어느순간 알콜에 취하면 잠시나마 편견의 고통을 잊을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박웅 씨와는 가수와 작사가로 만났지만 특별한 인연이 있다고 들어는데요.
"작사를 해주신 박 선생님과의 만남은 우연히 연결됐지만 운도 따랐어요. 신인가수 때 저는 고 김상범 사장님이 운영했던 세방기획 전속가수로 출발했죠. 박 선생님을 그때는 제가 잘 몰랐지만 그 당시 두분은 이미 호형호제할만큼 음악적으로 깊은 교분이 있었다고 해요. 그분은 오래전에 세상을 떠나셨지만, 저에게 '마지막 불꽃을 태우라'는 의미로 수십년 세월을 넘어 저와 박 사장님을 연결해주신게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박일준이 언급한 가수 고 김상범은 70년대 후반 오아시스 레코드사에서 발매된 '오뚜기 인생'이란 노래로 잘 알려진 가수 겸 음반제작자다. 경쾌한 멜로디와 넘어져도 일어선다는 희망적 노랫말에 그의 구수한 목소리로 크게 히트했다. 훗날 세방기획이라는 가요기획사를 차려 가수 현숙과 박일준을 전속가수로 홍보했다.
-요즘 K-POP이 세계를 누비고 있습니다. 선배 가수로서 어떻게 보십니까?
"당연히 대견하고 자랑스러운 일이죠. BTS나 블랙핑크 같은 친구들이 우리 문화를 세계에 알리고 있잖아요. 예전엔 외국 피가 섞였다고 주목받았는데, 이제는 '한국'이라는 브랜드 자체가 세계의 중심이 됐어요. 세상이 참 많이 변했죠."
-후배 가수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제가 데뷔하던 때에도 오디션은 있었어요. 방송사마다 라이브 오디션을 거쳐 실력을 검증한 뒤에야 데뷔를 할 수 있었으니까요. 오디션 프로그램이 넘치는 요즘은 실력보다 이슈나 이미지로 승부하는 경우가 많지만, 결국 오래 가는 건 진심이에요. 무대 위에서 관객 눈을 보고 노래할 때, 그 진심이 전해져야 합니다. 이는 결국 자기 히트곡이 있어야 가능해지죠. 순서가 바뀌어 노래보다 인지도를 먼저 얻었더라도 어느정도 팬덤이 구성된 뒤엔 히트곡 만들기에 전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유행은 변하지만 진심은 안 변하니까요."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계획도 궁금합니다.
"우선은 '우리가 남인가' 활동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 노래로 다문화 가정, 세대 갈등, 지역 간의 벽을 허물고 싶어요. 단순한 트로트가 아니라, 인간과 사회를 잇는 다리가 될 것이란 확신이 섰습니다. 애착이 큰 만큼 짧게는 1~2년, 길게는 4~5년까지도 이 노래로 승부를 걸고 싶습니다. 공백 기간이 길었기 때문에 기회가 된다면 단독 콘서트도 해볼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