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팩트ㅣ김샛별 기자] "이건 셔터 스피드가 60분의 1초야. 멈춰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60분의 1초만큼 움직이고 있어. 이렇게 사진을 찍는다는 건 시간을 채집하는 거야."
배우 박지현의 연기도 그렇다. 매 작품 조금씩 움직이고 성장하더니 어느새 시간과 경험을 채집한 자신의 새 얼굴을 보여준다.
데뷔 후 최근까지만 해도 차갑고 도도한 인상이 강했던 박지현이다. 그런데 올해 초 19금 코믹 장르로 연기 변신에 성공하더니 또 한 번 새로운 얼굴을 들고 나타났다. 20대부터 40대까지 '나이'를 연기한다는 것도 신기한데 이전과는 결이 다른 메마르고 건조한 모습을 보여준다. 병색이 완연한 캐릭터까지도 온몸으로 표현하며 상연 그 자체가 돼 우리 모두에게 울림을 안긴 박지현이다.
12일 오후 전 세계에 공개된 넷플릭스 새 오리지널 시리즈 '은중과 상연'(극본 송혜진, 연출 조영민)은 매 순간 서로를 가장 좋아하고 동경하며 또 질투하고 미워하는 일생에 걸쳐 얽히고설킨 두 친구 은중(김고은 분)과 상연(박지현 분)의 모든 시간들을 마주하는 이야기다. 10대부터 40대까지 서로의 삶을 끊임없이 스쳐온 두 친구의 서사를 담았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작품은 은중과 상연 두 인물을 전면에 내세운다. 주된 이야기 역시 세 번의 헤어짐 끝에 삶의 마지막 순간에 다시 만나게 된 두 친구의 10대부터 40대까지 질투와 동경을 오갔던 오랜 시간을 따라간다.
은중과 상연은 가족보다 더 소중하다가도 평생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미워하기도 하며 계속해서 변화를 거듭하는 관계성을 보여준다. 10대 시절 은중의 학교로 전학온 상연은 우연한 계기로 둘도 없는 친구가 되며 두 사람의 관계가 시작된다.
대학교 동아리에서 우연히 재회해 수많은 사건들을 겪은 20대와, 불편함 가득한 두 번째 재회를 하게 된 30대까지 두 사람의 관계는 계속해서 변화한다. 여기에 40대에는 상연이 말기 암에 걸린 자신의 조력 사망을 위해 스위스에 함께 가달라는 부탁과 함께 은중을 찾아가며 두 사람의 관계는 또 다른 변곡점을 맞는다.
그저 친구라는 한 단어로만 규정할 수 없는 관계, 사랑하지만 그래서 질투하고 스스로를 무너뜨리는 관계, 누군가는 동의하고 누군가는 한 번쯤 생각해 볼 법한 관계를 화두로 올린다.
어떻게 보면 가장 평범하고 가장 내밀한 우리네 이야기일 수 있다.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 역시 잔잔하고 묵직하다. 그러나 몰입하게 만드는 큰 힘이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은중과 상연 그 자체가 된 배우들의 역할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박지현의 새 얼굴이 유독 눈길과 마음을 사로잡았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재벌집 막내아들' '재벌X형사' 등을 통해 안방극장에 눈도장을 찍은 박지현이다. 차가운 외향적인 모습이 주로 인상에 남았던 그가 이번 '은중과 상연'을 통해 자신이 갖고 있는 또 다른 얼굴을 꺼냈다.
박지현은 극 중 천상연의 20대부터 40대까지를 연기했다. 상연은 부족할 것 없이 자랐지만, 자신은 절대 가질 수 없는 것들을 가진 밝고 따뜻한 은중을 늘 부러워한 인물이다. 삶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해 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 십여 년 전 갈라선 친구 은중의 삶에 다시 나타난다.
박지현은 이런 상연의 제안을 '이기적이고 뻔뻔한 부탁'이라고 표현했다. 이내 "하지만 상연의 입장에서는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용서받고 싶은 사람이 은중이었다"며 은중에 대한 복합적인 감정을 설명했다.
상연에 대한 박지현의 캐릭터 해석은 그가 연기하는 장면에 오롯이 묻어난다. 자신이 처한 극한의 상황은 뒤로하고 뻔뻔하고도 어려운 부탁을 담담히 하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웃어 보이려는 상연의 모습을 박지현은 섬세한 연기로 쌓아 올렸다.
유독 이 장면 속 박지현의 모습이 돋보인 건 암으로 인해 시한부를 선고받은 40대의 모습을 활자와 설정을 넘어 그 이상으로 표현했다는 점이 인상 깊기 때문이다. 자신의 죽음을 덤덤히 받아들이는 것 같으면서도 씁쓸하고, 자신의 마지막을 선망했지만 원망했던 부러웠지만 질투했던 친구에게 부탁하면서도 거절당할지도 모른다는 감정을 숨기는 복잡미묘한 상연을 온몸으로 연기한다.
이러한 박지현의 '감정 연기'는 '은중과 상연'을 마지막까지 보게 만드는 원동력으로도 작용한다. 작품의 15부작 구성이 짧지 않은 데다 무거운 분위기를 내내 유지하다 보니 시청자 입장에서는 힘이 달리고 집중력이 흐트러질 때가 종종 존재한다. 그럴 때마다 박지현의 공감을 이끄는 연기는 다시 한번 리모컨을 쥐게 만든다.
실제로 박지현은 다양한 연령대와 시절을 연기하기 위해 보이는 것부터 차이를 주려고 노력했다. 헤어나 스타일링을 모두 다 다르게 했을 뿐만 아니라 톤 또한 나이마다 다르게 하고자 했다. 이에 20대부터 40대를 완벽하게 소화한 그의 연기는 호평을 이끌 수밖에 없었다.
박지현의 무르익은 연기를 확인할 수 있는 '은중과 상연'은 넷플릭스를 통해 시청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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