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최수빈 기자] 차분한 말투, 깊어진 눈빛, 그리고 백발. 이제훈은 '협상의 기술'에서 단 한 장면도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3시간에 걸친 분장은 물론 디테일한 표현까지 스스로 고민하며 캐릭터를 구축했다. 12부작의 짧은 여정을 마친 그는 더 잘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다시 한번 자신을 채워나가는 중이었다. 가치 있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이제훈의 바람은 어쩌면 이미 이뤄진 걸지도 모르겠다.
배우 이제훈이 최근 서울 강남구 한 카페에서 <더팩트>와 만나 JTBC 토일드라마 '협상의 기술'(극본 이승영, 연출 안판석) 종영 기념 인터뷰를 진행했다. 극 중 M&A(기업 인수 합병) 전문가 윤주노 역을 맡은 그는 이날 작품과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협상의 기술'은 전설의 협상가로 불리는 대기업의 M&A 전문가와 그 팀의 활약상을 담은 드라마다. 총 12부작으로 지난 13일 막을 내렸다.
작품은 첫 회 시청률 3.3%(닐슨코리아, 전국 유료 가구 기준)로 출발해 최종회에서는 10.3%로 종영했다. 매회 시청률이 증가하며 무려 7%P 오른 기록을 세웠다.
이에 이제훈은 "첫 방영 이후 고정 시청자층도 있고 새로운 시청자층도 유입됐다. 시청률 지표가 우상향하면서 마무리된 점이 너무 감사하다"며 "저희가 12부작이었는데 좀 짧게 느껴진다. 시청자로서 다음 주에도 방송이 돼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소감을 전했다.
특히 마지막 회 쿠키영상에서 시즌2를 암시하는 분위기가 풍겨 시청자들의 기대감을 자아냈다. 이에 대해 이제훈은 "개인적으로도 이후에 대한 이야기가 쓰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제작진분들도 원하시는 것 같다"며 "결국에는 시청자분들이 원하셔야 시즌2가 나오는 만큼 뒷이야기를 더 궁금해해 주시면 좋겠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이제훈은 M&A팀 팀장 윤주노 역으로 극을 이끌었다. 냉정하고 날카로운 눈빛의 그는 한국 최고의 M&A 전문가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표정 변화도 없다. 그러면서도 결론은 언제나 성공적인 협상 결과를 끌어낸다. 그러니 그에 대한 소문이 늘 파다하다.
이제훈은 이런 윤주노의 미스터리함을 더욱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외적인 스타일링에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방영 전부터 이제훈의 백발 스타일링은 많은 팬들의 관심을 모았다. 이제훈은 "3시간 동안 분장을 받았다. 정말 녹록지 않았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윤주노의 외적인 모습이 가장 시그니처가 되는 부분인 만큼 준비하는 게 힘들었죠. 하지만 백발 캐릭터가 주는 강렬함이 있다 보니 이걸 소화했다는 점에 있어서 너무 만족해요. 제가 백발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드리려면 나이가 7-80대는 돼야 하잖아요.(웃음) 윤주노를 만나면서 그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실제로 시청자들 사이에서는 이제훈의 백발 스타일링이 극의 몰입감을 더했다는 호평이 자자했다. 이제훈은 "만들어주신 분장팀이 정말 각고의 노력을 해주신 덕분이다. 또한 후반작업 팀이 디테일하게 보정해주신 덕분"이라며 "그분들이 있었기에 윤주노라는 인물이 시청자분들께 자연스럽게 다가간 것 같다"고 공을 돌렸다.
백발은 제작진의 의견으로 만들어진 스타일링이지만 이 외의 것들은 이제훈이 직접 의견을 제시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그는 "윤주노가 안경을 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또 안경은 굉장히 얇은 테일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저는 안경을 안 쓰는 사람이다 보니까 피팅이 완벽하지 않아서 안경이 계속 내려가고 움직여서 고쳐 쓸 수밖에 없었다"며 "이게 캐릭터 적으로 대사를 하거나 표현했을 때 연기적인 방향성이 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안판석 감독님은 항상 배우들을 지켜봐 주세요. 보통은 디렉팅을 통해 다양한 테이크를 만들어 가는데 안판석 감독님은 '배우가 이미 정답을 알고 있다'고 믿어주시는 거죠. 지켜봐 주시면서 이런 것들이 현실적으로 보이는지를 중요한 포인트로 생각하시고 카메라에 담아주세요. 그러다 보니 윤주노의 삶을 더 깊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죠. 대사를 외우고 현장에서 디렉팅을 받는 게 아니라 그 인물로 사고하고 느끼고 표현을 해야지만 캐릭터가 생동감 있게 살아갈 수 있겠다는 걸 다시 한번 배웠던 것 같아요."
이같은 안판석 감독의 디렉팅을 믿고 따르는 배우들은 안판석 감독의 작품에 유독 자주 출연한다. 이를 두고 '안판석 사단'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다. 특히 '협상의 기술'에서는 이제훈, 김대명을 제외하고 많은 배우들이 안판석 감독의 작품에 출연한 바 있다. 그러다 보니 이제훈은 긴장이 더 많이 됐다고 털어놨다.
"저는 안판석 감독님과 처음 하다 보니 너무 긴장이 많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대본을 정말 많이 봤고 윤주노를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나름 철저하게 준비해 갔죠. 그 덕분에 현장에서는 조금 더 여유롭고 편한 모습으로 연기할 수 있었어요. 윤주노를 통해서 정말 많은 걸 배운 것 같아요."
이제훈은 인터뷰 내내 안판석 감독을 향한 존경심을 연신 드러냈다. 그는 "감독님의 필모를 보면 결이 분명하게 살아 있다. 지금 이뤄지는 상황을 굉장히 현실적으로 그려내지만 그 프레임 속에서 환상도 느낄 수 있다"며 "그간 감독님이 해오셨던 스타일의 중심이 사랑 이야기였는데 저 또한 멜로로 감독님과 다시 한번 만나고 싶다"고 전했다.
이제훈은 그간 드라마 '모범택시' 시리즈, 영화 '탈주' '도굴' '사냥의 시간' 등 액션물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그러나 '협상의 기술'은 화려한 액션은 없고 오로지 긴 멘트와 표정 연기로만 모든 서사를 전달해야 했기에 어려움도 있었을 터. 이제훈 또한 이에 공감했다.
"사람이 간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웃음) '탈주' 찍었을 때는 이런 액션 도저히 못 하겠다고, 차라리 좀 점잖게 말을 많이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는데 '협상의 기술' 하면서 또 몸 쓰는 게 낫지 않나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대사가 정말 많고 정적인 연기를 눈빛을 통해 다양하게 보여드리는 게 너무 어려웠죠. 근데 지금 제가 '모범택시'와 '시그널' 촬영을 병행하고 있는데, 다시 또 구강 액션이 낫나 싶은 생각을 하게 되고 적응이 참 안 돼요."
말은 이렇게 하지만 이제훈은 작품마다 캐릭터와 완벽하게 동화된 연기로 시청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시즌제 전문 배우'라는 타이틀이 붙을 정도로 그가 한 작품은 많은 마니아층을 형성하며 후속 이야기 역시 늘 기대를 모은다. 이제훈 또한 현재 '모범택시'와 '시그널'을 촬영하면서 정말 행복하다고 말했다.
"최근에 맡았던 작품들이 모두 타이틀롤이다 보니까 두려움과 걱정이 많은 건 사실이에요. 그럼에도 창작자이자 배우로서 뭔가 펼치고 싶은 모습들이 제 안에 강한 욕망으로 나오다 보니까 한편으로는 제가 너무 운이 좋다는 생각도 하게 돼요. 그래서 더 잘 해내고 싶기도 하죠. 작품이 다치지 않게 잘 만들어서 배우로서 역할뿐만 아니라 홍보와 마무리까지 잘하고 싶어요. 그래서 기회가 닿는 한은 끝까지 최선을 다하면서 시청자분들께 행복한 추억을 만들어드리고 싶어요."
그러면서 이제훈은 스스로를 '가성비가 좋은 배우'라고 칭해 현장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그는 "가격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저는 그런 거보다 가치 있는 배우가 되고 싶다"며 "제작자가 됐든 플랫폼이 됐든 누군가가 저를 그렇게 봐주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바랐다.
"저에게 배우는 정말 중요한 거예요. 시청자분들이 저를 통해서 작품을 봤을 때 뭔가 의미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내가 왜 돈을 들여서 이 시간을 썼지?'라는 생각은 최소한 없길 바라요. 작품을 보고 '너무 즐거웠다' '재밌더라' '이런 의미가 있었구나'처럼 시간이 지나서 꺼내봤을 때 의미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게 지속되기를 바라고 그렇게만 된다면 인간 이제훈으로서의 행복도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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