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권 분쟁 속 연구개발 중심 경영...잇단 기술수출

[더팩트ㅣ조성은 기자] 한미약품이 임상 1상 단계의 비만 신약 후보물질 하나로 최대 23억달러(약 3조2000억원) 규모의 기술수출을 성사시키면서 'R&D 명가'의 저력을 입증했다. 창업주 고(故) 임성기 선대회장의 타계 이후 수년간 이어진 경영권 분쟁 속에서 거둔 성과다. 업계에서는 비만·대사질환을 새로운 성장축으로 낙점한 임주현 한미그룹 부회장의 리더십을 주목한다.
26일 업계에 따르면 한미약품은 지난 24일 로슈그룹 자회사 제넨텍과 비만 및 제2형 당뇨병, 심혈관질환 등 대사질환 치료제 후보물질 'HM17321(UCN2 유사체)'에 대한 독점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했다. 계약 규모는 최대 23억달러(약 3조2000억원)로, 반환 의무가 없는 선급금만 1억9000만달러(약 2850억원)에 달한다. 제넨텍은 한국을 제외한 전 세계에서 HM17321의 개발·제조·상업화 권리를 갖는다. 한미약품은 향후 개발·허가·상업화 단계에 따른 마일스톤과 판매에 따른 로열티를 받는다.
이번 계약은 단일 후보물질 기준으로 국내 제약·바이오업계 최대 규모의 기술수출이다. 특히 HM17321은 아직 임상 1상 단계로써, 본격적인 사람 대상 효능 데이터가 나오기 전에 글로벌 빅파마로부터 대규모 계약을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이번 성과의 배경으로는 임 부회장이 주도해온 R&D 중심 경영이 꼽힌다. 업계 관계자는 "임 선대회장 타계 이후 흔들리던 한미의 R&D 정체성을 임 부회장이 지켜낸 결실"이라고 평가했다. 임 선대회장은 생전에 "R&D를 하지 않는 제약기업은 죽은 기업"이라는 경영 철학을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이번 성과는 임 부회장이 직접 설계·추진한 비만·대사질환 연구 프로젝트 'H.O.P(Hanmi Obesity Pipeline)'의 핵심 후보물질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한미약품이 선대회장의 R&D 중심 경영을 단순히 계승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성장 분야를 발굴해 독자적인 연구개발 전략으로 확장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미그룹은 2020년 임 선대회장 별세 이후 상속세 문제와 가족 간 경영권 분쟁 등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일부 대주주를 중심으로 비용 절감과 효율성을 이유로 신약개발 투자를 줄여야 한다는 압력도 거셌다. 그러나 한미약품은 R&D 투자를 지속했다. 지난해 한미약품 R&D 투자액은 2290억원으로 매출의 14.8%를 차지했다. 올해 상반기에도 매출의 14.6%인 1255억원을 투입했으며 이는 전년 동기 대비 18.2% 증가한 금액이다.
한미약품 관계자는 "선대회장 타계 이후 혼란 속에서도 신약 개발에 집중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임 부회장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다"며 "구성원들이 연구에 집중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여러 외풍을 막아주는 역할이 없었다면 이번 성과를 이루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미약품 안팎에서는 임 부회장의 R&D 리더십이 비만·대사질환 분야에서 드러났다는 평가가 나온다. 앞서 희귀질환 치료제 '소네페글루타이드' 역시 대내외의 개발 중단 압박이 있었으나 임 부회장이 끝까지 밀어붙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소네페글루타이드는 지난 6월 일라이릴리에 12얼6000만달러 규모로 기술수출이 이뤄졌다.
임 부회장은 2023년 비만 관리를 한미약품의 미래 성장동력으로 낙점하고 관련 후보물질을 하나의 프로젝트로 묶은 'H.O.P'를 출범시켰다. 기존 글루카곤유사펩타이드(GLP)-1 계열 비만치료제를 단순히 따라가는 대신 체중 감량뿐 아니라 체성분 개선, 근육 보존·증진, 복약 편의성, 체중 감량 이후 유지·관리까지 아우르는 비만 전주기 치료 솔루션을 구축한다는 전략이다.
H.O.P에는 이번 글로벌 빅딜의 발판이 된 HM17321외에도 하반기 국내 출시를 앞둔 GLP-1 비만 치료제 '에페글레나타이드', 25% 이상의 체중 감량을 목표로 한 삼중작용제 'HM15275', 근육 증진형 비만 신약 'HM500197' 등을 포함해 총 6개 후보물질이 포진해 있다. 상용화에 가까운 후보부터 임상 2상과 임상 1상, 전임상 단계 후보까지 개발 단계별 포트폴리오를 구축했다.
연구개발 조직도 바꿨다. 한미약품은 2023년 기존 바이오·합성 등 기술 중심으로 나뉘어 있던 R&D 조직을 비만대사, 면역항암, 표적항암 등 질환 중심으로 재편했다. H.O.P를 담당하는 비만대사 조직도 별도로 꾸렸다. 비만·대사를 여러 연구과제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한미약품의 핵심 R&D 축으로 키우겠다는 임 부회장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다.
업계 관계자는 "신약 R&D는 투자부터 임상과 허가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경영진이 단기적인 성과에 흔들리지 않고 개발을 지속할 수 있도록 방향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며 "임 부회장이 경영권 분쟁이라는 불확실성 속에서도 R&D 투자를 유지하고 비만·대사질환이라는 새로운 성장축에 꾸준히 힘을 실은 것이 이번 성과의 밑바탕이 됐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이번 기술수출은 단순히 후보물질 하나가 높은 가격을 인정받은 것을 넘어 한미약품이 임 부회장 체제에서도 자체적인 R&D 전략을 세우고 성과를 낼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 사례"라며 "앞으로 H.O.P의 후속 파이프라인에서 추가 성과가 나온다면 임 부회장의 리더십에 대한 평가도 더욱 분명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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