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팩트ㅣ박지웅 기자] 중국이 디지털 위안화 제도화에 속도를 내고 북한도 중앙은행디지털화폐(CBDC)를 활용한 국제결제체계에 관심을 보이는 가운데 한국 역시 CBDC 기반 금융 인프라 구축에 속도를 내고 있다. 특히 국가가 금융시스템을 강하게 주도하는 중국을 중심으로 CBDC 확대 움직임이 나타나는 반면 미국은 정부의 금융 감시와 개인 통제 수단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이른바 '빅브라더' 우려를 이유로 CBDC에 제동을 걸면서 대조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국이 CBDC 활용 범위를 빠르게 넓히는 동안 개인정보 침해와 국가 통제 가능성에 대한 논의는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CBDC는 설계에 따라 개인의 거래 내역을 추적하는 것을 넘어 자금의 사용처와 기한까지 제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급결제 혁신이라는 명분 아래 부작용에 대한 충분한 논의 없이 기술 실증과 활용처 확대부터 서두르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되는 이유다.
◆ 한은, CBDC 활용 테스트 속도…커지는 금융 통제 우려
23일 금융권에 따르면 한국은행과 시중은행들은 하반기 중 CBDC 활용성 테스트인 '프로젝트 한강' 2단계 실거래에 나설 예정이다. 이르면 오는 9월 실거래를 시작할 가능성도 거론된다.
프로젝트 한강은 한은이 블록체인 기반 기관용 CBDC를 발행하고 시중은행들이 이를 기반으로 예금토큰을 발행하는 사업이다. 지난해 진행된 1단계 테스트에는 전자지갑 기준 8만1000명이 참여해 총 11만4880건을 거래했다.
2단계에서는 참여 은행을 9곳으로 늘리고 개인 간 송금(P2P)과 생체인증, 예금토큰 자동 입출금 등의 기능을 추가할 예정이다. 활용 범위도 민간 결제를 넘어 공공재정으로 확대된다. 전기차 충전시설 보조금과 공공부문 업무추진비에 예금토큰을 활용하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으며 내년에는 한은의 기관용 CBDC와 연계한 국채 토큰화 실증사업도 예정돼 있다.
CBDC 기반 예금토큰은 프로그래밍 기능을 활용해 자금의 사용처와 사용기한 등을 사전에 설정할 수 있다. 당국은 이를 통해 보조금의 목적 외 사용이나 부정 수급을 차단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같은 기술이 국가의 금융 통제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현재는 목적이 정해진 공공자금에 적용하더라도 향후 일반 국민의 금융거래로 범위가 확대될 경우 개인의 거래 내역을 파악하는 것은 물론 특정 자금의 사용까지 제한할 수 있는 기술적 기반이 될 수 있어서다.
결국 CBDC를 둘러싼 논란의 핵심은 기술 자체보다 통제 권한을 누가 갖고 어디까지 행사할 수 있느냐에 있다는 지적이다. 충분한 제도적 안전장치 없이 인프라부터 구축할 경우 향후 정부의 필요에 따라 감시와 통제 범위가 확대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세계 최대 헤지펀드 브리지워터 어소시에이츠 설립자인 레이 달리오도 이 같은 위험성을 경고한 바 있다. 달리오는 지난 2월 터커 칼슨과의 인터뷰에서 CBDC 도입 가능성을 전망하면서도 정부의 과도한 통제 가능성을 문제로 지목했다. 모든 거래가 기록되는 구조는 불법 자금 추적에는 유용할 수 있지만 동시에 정부가 개인의 경제활동을 광범위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취지다. 정부가 정치적으로 불리한 집단의 자금 접근을 제한하거나 제재를 자동으로 집행하는 수단으로 활용할 가능성도 우려했다.
이 같은 우려 속에서도 중국은 CBDC 도입에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중국은 인민은행법 개정을 통해 디지털 위안화의 법적 지위를 명확히 하는 방안을 추진하는 한편 국경 간 결제 활용도 확대하고 있다. 달러 중심 국제결제체계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중국 중심의 디지털 금융망을 확대하려는 전략과 맞물린다는 분석이다.
◆ 北도 CBDC 국제결제 주목…한은 "北 동향 파악엔 한계"
북한도 CBDC를 활용한 국제결제체계 변화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북한 경제 전문지 '경제연구'는 최근 CBDC를 활용한 국제결제체계 구축 움직임을 다루면서 국제결제 비용 감소와 거래 속도 향상 등의 장점을 주목했다. 특히 기존 국제결제체계에 대한 특정 국가의 영향력을 비판하며 CBDC 기반 결제체계가 국제경제의 '다극화'를 촉진할 수 있다는 기대를 나타냈다.
다만 한은은 북한의 구체적인 CBDC 동향을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상훈 국민의힘 의원실이 한은에 북한의 CBDC 관련 동향을 문의한 결과 한은은 "글로벌 CBDC 분석 및 모니터링을 상시 수행하고 있다"면서도 "북한 정보는 인터넷 등을 통한 공개된 접근이 제한적인 관계로 현황 파악에 어려움이 있다"고 답했다.
중국과 북한 등 국가 통제가 강한 체제에서 CBDC의 활용 가능성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는 것과 달리 미국은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CBDC가 지급결제 혁신의 수단인 동시에 정부가 개인의 경제활동을 들여다보고 통제할 수 있는 인프라가 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 美, 금융 감시·통제 우려에 CBDC 제동…한국은 공공재정까지 확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해 취임 직후 '미국의 디지털 금융기술 리더십 강화(Strengthening American Leadership in Digital Financial Technology)' 행정명령을 통해 연방기관의 CBDC 설립·발행·유통·사용 촉진 등을 금지했다.
미국 상원도 지난달 연방준비제도(Fed·연준)와 지역 연방준비은행의 CBDC 발행을 2030년 말까지 금지하는 내용이 포함된 법안을 통과시켰다. 연준의 직접 발행뿐 아니라 금융기관 등 중개기관을 활용한 간접 발행까지 제한하는 내용이다.
미국 내 CBDC 반대론의 핵심에는 개인의 프라이버시와 정부의 금융 감시에 대한 우려가 자리하고 있다. 현금과 달리 CBDC는 설계에 따라 개인의 거래 내역과 자금 흐름을 추적할 수 있고 프로그래밍 기능이 결합되면 특정 자금의 사용 조건까지 제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금융 안정성 문제도 위험 요인으로 거론된다. 금융위기 상황에서 시중은행 예금이 상대적으로 안전한 중앙은행 발행 CBDC로 빠르게 이동할 경우 은행의 유동성 위기를 키울 수 있다는 우려다. 이른바 '디지털 뱅크런'이 기존 뱅크런보다 빠른 속도로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은 CBDC에 제동을 거는 대신 민간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을 중심으로 디지털 금융산업을 육성하는 데 무게를 두고 있다. 국가가 직접 발행·관리하는 디지털 화폐보다 민간 영역을 활용해 디지털 결제 혁신을 추진하는 방향을 택한 셈이다.
◆ '국민의 돈 어디까지 들여다보나'…CBDC 통제 권한 논란
CBDC를 서둘러 도입한다고 반드시 시장에 안착하는 것도 아니다. 지난 2021년 CBDC인 'e나이라(eNaira)'를 출시한 나이지리아는 이용 활성화에 어려움을 겪으며 CBDC의 대표적인 부진 사례로 꼽힌다. 기존 결제수단과 비교한 뚜렷한 이용자 편익과 사회적 신뢰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국가 주도의 도입만으로 확산에 한계가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는 평가다.
한국은 예금토큰의 활용 범위를 개인 간 송금과 생체인증에서 보조금, 업무추진비, 국채 토큰화까지 빠르게 넓히고 있다. 중국을 비롯해 국가 주도의 CBDC 구축에 적극적인 국가들이 속도를 내는 상황에서 한국도 기술 경쟁에 뒤처지지 않기 위한 행보로 풀이된다. 다만 국가와 금융기관이 개인의 거래 정보를 어디까지 수집·열람할 수 있는지, 자금 사용을 제한할 권한을 누구에게 어느 범위까지 허용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기술 실증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디지털자산 업계 관계자는 "중국과 북한처럼 국가의 통제력이 강한 체제가 CBDC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는 이유와 미국이 반대로 이를 경계하는 이유를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며 "CBDC는 한번 인프라가 구축되면 되돌리기 어려운 만큼 한국도 활용처부터 넓히기보다 국가가 국민의 돈을 어디까지 들여다보고 통제할 수 있는지에 대한 기준과 안전장치를 먼저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