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플 땐 약을 먹고, 건강을 챙기기 위해서는 영양제를 먹습니다. 이제는 약국뿐만 아니라 편의점이나 온라인 등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에겐 익숙한 약과 영양제들은 각자의 역사와 속사정을 갖고 있습니다. 이 코너는 유명한 약·영양제의 개발과정이나 히스토리를 조명합니다. <편집자주>
[더팩트ㅣ조성은 기자] 네덜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는 그의 역작 '에티카'에서 "좋고 나쁨은 사물 자체에 내재한 성질이 아니라 관계 속에 있다"고 규정했다. 대상 그 자체의 가치가 아니라 누구와 어떤 상황 속에서 만나느냐에 따라 본질이 달라진다는 의미다. 이 문장을 가장 극적으로 증명하는 존재가 바로 미생물 세계의 보툴리눔 톡신이다. 주름을 펴고, 턱선을 갸름하게 정리해주는 바로 그 '보톡스' 말이다.
보톡스의 기원은 18세기 독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남부 독일을 중심으로 소시지를 먹고 집단 식중독에 걸리는 사례가 급증해 환자의 절반 이상이 사망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환자들은 동공이 풀리고 근육이 마비되는 특이한 증세를 보였다. 의사 유스티누스 케르너는 실험 끝에, 특정 독소가 신경계를 마비시켜 호흡 정지를 유발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후 1895년 벨기에의 한 장례식장에서 절인 훈제 햄을 먹은 이들이 집단 마비 증세를 보이자, 미생물학자 에밀 피에르 반 에르멘겜 교수가 조사에 착수해 원인균을 발견했다. 그는 이 세균이 산소가 없는 환경에서만 증식하고 열과 건조에 강한 생존 캡슐(내생포자)을 만드는 '클로스트리디움' 속의 특징을 가졌다는 점을 확인하고, 소시지를 뜻하는 라틴어 '보툴루스'를 결합해 '클로스트리듐 보툴리눔'이라는 학명을 부여했다.
이 세균이 만들어내는 보툴리눔 톡신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물학적 독소 중 가장 치명적인 맹독으로 꼽힌다. 단 1g만으로도 100만명을 사망에 이르게 할 수 있을 정도의 위력이다. 신경에서 근육으로 전달되는 화학 신호인 아세틸콜린의 분비를 차단해 근육을 마비시키는 특성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이를 활용한 생물테러 무기 개발이 활발히 시도됐다.
미국은 이 독을 이용해 일본군 고위 장교를 암살하려는 작전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작전 실행 전 실시한 테스트에서 독을 먹은 당나귀가 멀쩡하게 살아남으면서 암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보툴리눔 독소는 유일하게 당나귀에게만 내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독소는 열에 약해 보관과 취급이 까다로워 화학무기 소재로는 부적합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일본의 731부대 역시 중국인과 조선인을 대상으로 보툴리눔 독소 생체실험을 실시했으나 결국 무기화에는 실패했다.
보툴리눔 톡신이 치료제로 거듭나기 시작한 건 196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미국 안과의사이자 사시교정 전문가였던 앨런 스콧 박사는 눈 주변 근육의 이상으로 발생하는 사시를 수술 없이 치료하기 위해 이 독소에 주목했다. 스콧 박사는 정제한 독소를 극히 미량으로 희석해 필요한 부위에 국소 투여하면 특정 근육의 과도한 움직임을 조절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1970년대 말 임상시험을 통해 그 효과를 증명해 내며 상용화의 첫발을 뗐고, 이를 눈여겨본 미국 제약사 앨러간은 1991년 관련 지적재산권을 사들여 '보톡스'라는 상표명으로 제품을 개발했다. 앞서 1989년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이를 눈꺼풀 경련 등 안구의 비정상적인 근육운동을 치료하는 의약품으로 최초 승인했다.
치료제로 쓰이던 보톡스가 미용 목적으로 전환된 계기는 1980년대 후반이다. 1987년 캐나다의 의사 부부인 진 카루터스와 앨런 카루터스는 안과 치료를 받던 환자로부터 눈 떨림 주사를 맞은 쪽의 미간 주름이 깨끗하게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안과 의사였던 아내와 피부과 의사였던 남편은 이 현상을 공유하고 본격적인 연구에 착수했다. 이들은 이마와 미간, 눈가 주름 개선에 탁월한 효과가 있음을 입증해 냈고, 1990년대 후반부터 피부과 중심의 미용 시술로서 새로운 가능성이 열렸다. 이후 2002년 FDA가 미간 주름 치료 목적으로 보톡스를 공식 승인하면서 본격적인 대중화가 시작됐다.
시장이 확대되면서 내성에 대한 우려도 존재하지만, 실제로 내성이 발생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내성은 주로 한 번에 너무 많은 양을 주사하거나 한 달 이내에 지나치게 자주 연속 투약할 때 발생 확률이 높아지며, 체질적인 유전적 감수성도 영향을 미친다. 보톡스에 내성이 생기면 대체 약물이 거의 없고, 향후 안검경련이나 중풍 후유증으로 인한 근육 강직 등 질환 치료 시에도 약효를 볼 수 없게 되므로 주의해야 한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복합 단백질을 제거해 내성 발생 가능성을 낮춘 순수 톡신 제품을 선택하고, 적정 용량과 최소 3개월 이상의 시술 간격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
오늘날 보툴리눔 톡신 시장은 치료와 미용을 합산해 2026년 현재 약 131억달러(한화 약 18조원) 규모에 달할 정도로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미용 시장에서는 전통적인 여성 고객을 넘어 외모를 가꾸고 부드러운 인상을 관리하려는 남성 고객과 비즈니스 환경에서 활기찬 이미지를 원하는 남성 CEO층의 수요가 급증하는 추세다. 미용 목적 외에도 편두통, 다한증, 과민성 방광, 근육 강직 치료 등 치료용 영역으로 확장도 지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