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팩트 | 시즈오카=손원태 기자] 편의점 매대에는 신라면이, 백화점 식품관에는 김치가 자리를 잡았다. 쇼핑몰 푸드코트에서 비빔밥을 즐기는 풍경도 낯설지 않다. 지하상가에는 한글로 적힌 마스크팩이 눈길을 끌고, 번화가에는 고소한 삼겹살 냄새가 퍼진다. 서울 영등포의 풍경을 옮겨놓은 듯한 이곳은 일본 시즈오카현의 평범한 일상이다.
지난달 말 방문한 후지산 남단의 시즈오카현. 일본의 심장부인 도쿄와 나고야를 잇는 교통 요충지이자 오토바이 산업의 발상지, 그리고 일본 최대의 녹차 산지로 이름난 곳이다. 인구 350만명 중 절반 이상이 생산가능인구(15~64세)인 덕분에, 거리에는 젊은 층의 활기와 도시 특유의 정적인 분위기가 묘하게 교차한다.
도시 곳곳은 이미 'K-브랜드'가 점령 중이다. 편의점과 마트 매대마다 라면, 만두, 소주, 마스크팩 등 우리 제품이 익숙하게 자리를 잡았다. 번화가에는 삼겹살과 비빔밥을 내건 한식당이 늘어섰고, 현지 베이커리 한쪽에는 한국에서 건너온 '버터떡'까지 등장했다.
도쿄나 오사카 같은 대도시라면 모를까 시즈오카 같은 일본 중견 도시의 안마당까지 한류가 스며든 셈이다. 현지인들의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한국 문화의 위상은 남다른 감회를 준다.
시즈오카에서 만난 일본인들은 한류를 낯선 유행이나 신기한 경험으로 여기지 않았다. 마치 늘 써오던 물건을 대하듯 그들의 표정에는 익숙함과 편안함이 묻어났다. 우리에게 초밥과 튀김이 일상적인 먹거리가 되었듯, 한국의 음식과 화장품도 그들의 삶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실제 시즈오카역과 연결된 '파르쉐' 백화점 지하 1층 식품관에는 김치 전문 코너가 마련됐다. 새빨간 배추김치부터 정갈한 백김치까지 다양한 제품이 진열돼 한국 대형마트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이곳을 운영하는 업체 '카이오(海王)'는 한국 정통 김장 문화에 일본 특유의 감칠맛과 달콤함을 더해 김치를 현지화했다.
시즈오카역 지하상가 매대에는 '넘버즈인'과 '메디힐' 마스크팩 제품들이 가지런히 올랐다. 일본어로 된 소개 문구에는 '남녀 구분 없이 누구나 매끈한 피부를 가질 수 있다'는 메시지가 담겼다. 지하상가 밖으로는 걸그룹 블랙핑크의 경쾌한 음악이 흐르고, 한글 입간판을 내건 한국식 포장마차가 손님을 맞는다. 삼겹살과 불고기를 주메뉴로 내세워 소주를 곁들이는 이 가게는 해가 저물수록 일본 젊은이들로 가득 찼다.
후지산으로 이동하는 시즈오카현 외곽에서도 한류 열기는 뜨거웠다. 쇼핑몰 '마크이즈시즈오카' 마트에는 한국 식자재와 화장품 전용 코너가 별도로 들어섰다. 냉동 매대에는 비비고 만두와 치킨이, 냉장 코너에는 참이슬과 한라산 소주, 중소 K-뷰티 브랜드 제품들이 빼곡히 진열됐다. 쇼핑몰 '이온몰' 시즈오카 푸드코트엔 돌솥비빔밥 식당이 입점했으며, 일본인들이 한국식 은수저를 쥐고 밥과 나물을 비비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편의점마다 신라면이 매대를 열을 맞춰 채웠으며, 할인점 돈키호테는 농심·오뚜기·삼양식품 등 한국 라면들로 줄지어 늘어섰다. 그중 삼양식품 불닭볶음면은 대세임을 보여주듯 일부 제품이 품절됐다.

시즈오카에서 목격한 한류는 K-푸드와 K-뷰티를 아우르는 'K-라이프스타일'로 진화하고 있었다. 현장을 둘러볼수록 우리 기업들이 일본 시장에 공들이게 된 배경도 납득이 갔다. 우리 기업들이 일본 시장에 공을 들이는 과정 역시 명확하다. CJ제일제당은 지난해 말 일본 신규 만두 공장을 가동하며 연간 1조1000억원 규모의 현지 시장 점유율을 끌어올리고 있다. 교자만두를 주력으로 비비고 치킨과 냉동김밥 등을 함께 선보이는 전략이다.
하이트진로와 농심 등 K-푸드 대표 주자들의 공세도 한층 거세졌다. 하이트진로는 수출 전용 제품 '멜론에이슬'을 필두로 입지를 넓히고 있으며, 최근에는 벚꽃 시즌에 맞춰 우에노와 나고야 등지에서 참이슬 팝업스토어를 개최했다. 농심은 신라면 40주년을 맞아 걸그룹 에스파를 글로벌 앰버서더로 발탁하고, 도쿄에 체험형 조리 공간 '신라면 분식'을 마련하는 등 '톱10' 브랜드 도약을 위해 마케팅을 다각화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일본 내 한류가 단순한 유행을 넘어 하나의 문화로 안착했다고 분석한다. 영화나 드라마, 예능에 등장한 한국의 라이프스타일이 하나의 '장면'으로 각인돼 일본 현지인들의 일상으로 녹아들었다는 것이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한국과 일본은 생활방식이 유사해 새로운 문화를 수용하는 데 거부감이 적다"며 "비슷하면서도 다른 매력을 가진 한국의 일상이 SNS와 유튜브 등 뉴미디어를 타고 일본인들에 '장면 문화'로 인식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한류가 성공할수록 해외 소비자들은 한국의 라이프스타일을 직접 경험하고 싶은 욕구를 발현한다"며 "정부 역시 코트라(KOTRA)를 통해 세계 각국의 기업 및 소비자와 긴밀히 소통하며, 우리의 일상이 담긴 K-푸드와 K-뷰티가 현지에서 빠르게 전파되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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