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팩트ㅣ박지웅 기자] 글로벌 스테이블코인 시장을 주도하는 달러 기반 코인이 한국 금융권과 가상자산 시장을 빠르게 파고들고 있는 반면, 국내에서는 정책 지연과 금융당국의 소극적 대응으로 스테이블코인 사업 자체가 위축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글로벌 자본은 속도를 내고 있지만 한국은 여전히 '논의 단계'에 머물러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는 평가다.
7일 금융권에 따르면 KB금융그룹은 오는 13일 스테이블코인 USDC 발행사 써클의 창업자 겸 CEO 제레미 알레어가 방한해 경영진과 회동한다고 밝혔다. 양측은 USDC 기반 결제·송금 인프라와 국제결제 협력,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 가능성 등을 논의할 예정이다.
알레어 CEO는 방한 기간 동안 두나무, 빗썸, 코인원 등 주요 거래소와 시중은행을 연이어 방문하며 USDC 유통 확대와 결제 생태계 구축 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다. 특히 오경석 두나무 대표와의 회동에서는 스테이블코인 협력 방안이 구체화될 것으로 예상되며, 시장에서는 업무협약(MOU) 체결 가능성도 거론된다.
이 같은 움직임은 실적과 사업 확장성을 기반으로 한다. 써클의 지난해 4분기 매출은 7억7023만 달러로 전년 대비 77% 증가했고, 주당순이익(EPS)은 시장 기대치를 크게 웃돌았다. 같은 기간 USDC 유통량은 753억 달러로 72% 늘었고 온체인 거래량은 11조9000억 달러로 247% 급증했다.
써클은 단순 발행사를 넘어 결제 인프라 기업으로 빠르게 전환하고 있다. 레이어1 블록체인 '아크(Arc)'와 결제 네트워크(CPN)를 통해 스테이블코인을 글로벌 결제·정산 인프라로 확장하는 전략이다. 시장에선 USDC가 기업 간 크로스보더 결제 영역에서 기존 국제결제망을 대체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춘 것으로 평가한다.
문제는 국내 상황이다. 글로벌 사업자들이 실증과 협력 논의를 병행하며 시장을 선점하는 동안, 국내에서는 스테이블코인 관련 정책이 사실상 '뒷전'으로 밀린 상태다.
디지털자산기본법(2단계 입법)은 당초 1분기 내 마련될 예정이었지만 여전히 정부안조차 구체화되지 못한 채 국회 논의가 공전하고 있다. 국회에서는 여야를 막론하고 입법 지연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이어지고 있지만, 금융당국은 의원 입법 사안이라는 입장을 유지하며 적극적인 드라이브를 걸지 않고 있다.

특히 거래소 대주주 지분 제한, 스테이블코인 발행 주체 등 핵심 쟁점을 둘러싼 이견이 좁혀지지 않으면서 법안 논의 자체가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당정 협의와 법안소위 일정도 잇따라 미뤄지며 입법 일정은 사실상 안갯속에 빠진 상태다.
여기에 중동 전쟁에 따른 환율 불안, 증시 변동성 확대, 6월 지방선거 등 정책 우선순위가 다른 현안으로 이동하면서 디지털자산 정책은 후순위로 밀리고 있다. 금융당국 역시 시장 안정 대응에 집중하면서 스테이블코인 제도 설계는 속도를 내지 못하는 모습이다.
이로 인해 국내 스테이블코인 사업은 초기 단계에서부터 위축되고 있다는 평가다. 금융사들은 규제 방향이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관련 투자나 사업 추진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으며,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발행 구조조차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 머물러 있다.
반면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은 이미 국내 금융권과 거래소를 중심으로 실증과 협력 논의가 동시에 진행되며 영향력을 빠르게 확대하고 있다. 국내 기업들이 글로벌 스테이블코인 네트워크에 편입되는 흐름이 먼저 형성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시장에선 이 같은 격차가 단순한 '시간 차'가 아니라 구조적 경쟁력 차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국내 결제·송금 인프라를 선점할 경우, 향후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등장하더라도 경쟁 기반 자체가 약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써클의 실적이 보여주듯 스테이블코인은 이미 하나의 금융 인프라로 자리 잡았다"며 "글로벌 기업들은 빠르게 시장을 선점하고 있는데 금융당국은 제도 설계조차 속도를 내지 못하면서 국내 사업은 위축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대로라면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시작도 하기 전에 경쟁에서 밀릴 가능성이 크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