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팩트ㅣ이한림 기자] 국내 주요 증권사들이 이번 3월 정기 주주총회(주총)를 앞두고 10년 넘게 유지해 온 집중투표 금지 빗장을 일제히 푼다. 오는 9월 상법 개정 시행으로 집중투표제 배제를 할 수 없게 된 가운데, 법적 충돌을 막기 위한 선제적 대응과 주주 친화 이미지를 선점하려는 포석으로 풀이된다.
18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국내 다수 증권사는 이번 주총에서 '정관 일부 변경의 건'을 통해 '집중투표제 관련 정관 정비'를 부의안건에 올렸다. 20일 주총을 예고한 삼성증권부터 미래에셋증권(24일), NH투자증권·키움증권(26일), 27일 한국금융지주(한국투자증권)까지 자산 2조원 이상 증권사들이 대거 같은 안건을 상정했다.
안건에 '집중투표제 배제 관련 조항 삭제'라고 명시한 키움증권을 제외하면 집중투표제 관련 정관 정비에서 어떤 내용을 정비할지 알려지지 않았으나, 업계에서는 타 증권사들도 모두 키움증권과 동일한 내용으로 안건을 올릴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증권사들이 이처럼 한꺼번에 정관 손질에 나선 이유는 오는 9월 10일부터 시행되는 상법 개정 때문이다. 개정안에 따라 자산 2조원 이상 상장사는 집중투표제 배제가 불가능해진다. 법 시행 이후 처음으로 시행되는 주총부터 적용되는 만큼, 내년 정기 주총이나 향후 발생할 수 있는 임시 주총에서 법적 혼선을 미리 차단하겠다는 실무적 판단이 작용한 결과로 풀이된다.
집중투표제는 이사 선임 시 주당 1표가 아닌, 선임하려는 이사 수만큼 의결권을 한 후보에게 몰아주는 제도다. 집중투표제를 통해 이사를 선임하면 소수 주주나 행동주의 펀드가 지지하는 후보의 이사회 진입 문턱이 획기적으로 낮아지는 만큼, 대주주로서는 이사회의 성벽이 허물어지는 격이다.
다만 업계에서는 이번 조치를 두고 묘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상법 개정으로 오는 9월부터 어차피 의무화될 집중투표제를 굳이 3월 주총에서 서둘러 고치고 나선 탓이다.
표면적으로는 9월 법 시행 이후 정관 수정을 위해 다시 임시 주총을 여는 번거로움을 피하고, 기존 정관과 개정된 상법 간 법적 충돌을 방지하려는 실무적 선제 대응 성격이 짙다.
그러나 이면에는 이사들의 임기 만료 시점을 분산시키는 등 정관 변경을 통해 경영권 방어 체계를 미리 공고히 하려는 고도의 전략적 속내도 깔려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집중투표제가 시행되면 소수 주주가 지지하는 이사가 이사회에 진입하기 쉬워지는데, 이를 견제하기 위해 이번 주총부터 이사 수 상한을 줄이거나 이사들의 임기 만료 시점을 분산시키는 '시차임기제' 등을 설계할 수 있다는 해석이다.
주주 친화 이미지를 선점해 주가를 부양하려는 시도도 엿보인다. 정부의 기업가치 제고 정책에 발맞춰 지배구조 개선 의지를 선제적으로 피력하는 목적에서다. 어차피 법 시행으로 도입해야 할 제도라면 법에 떠밀려 억지로 하는 모습보다는 자발적으로 정관을 고쳐 주주 권익을 존중하는 이미지를 시장에 각인시키겠다는 전략이다. 최근 주주들의 압박이 거세지는 상황에서 주총 표 대결을 앞두고 우호 지분 확보를 위한 명분 쌓기용 조치라는 분석도 나온다.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상법 개정에 따른 집중투표제 의무 도입을 앞두고 증권사들이 미리 정관 정비에 나선 것은 법적 불확실성을 해소하고 실무적 혼선을 줄이려는 합리적인 선택"이라면서도 "이사 임기 관련 경영의 연속성을 확보하면서도 주주 친화적인 기조에 발맞추려는 유연한 대응이 반영된 조치로도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