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팩트ㅣ세종=정다운 기자] 보호주의를 앞세운 미국과 다자주의를 표방하는 중국 간 패권갈등이 심화하면서 우리나라의 통상정책이 시험대에 올랐다. 전문가들은 균형을 유지하는 절묘한 줄타기 전략을 취하되, 공급망 다변화 및 한미일 공조를 통한 공급망 강화가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 투키디데스 함정…미·중, 남미 영향력 두고 충돌 양상
지난 3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확고한 결의(Absolute Resolve)’ 작전을 통해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체포했다. 체포 직후 지난 6일 트럼프 대통령은 서반구(미주 대륙)에서 미국의 패권 강화를 뜻하는 ‘돈로주의’(19세기 먼로주의에 도널드 트럼프를 더한 합성어)를 언급하기도 했다. 이는 상호관세 부과 등 보호주의를 넘어선 광폭 행보로, 2차 세계대전 이후 ‘이성이 지배하는 사회’의 종말을 암시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반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 5일 이재명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양국이 함께 보호주의에 반대하고 다자주의를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대일로를 통해 영향력을 확장해온 중국이 최근 미국의 움직임을 의식해 정반대 메시지를 낸 것으로 풀이된다. 미국의 행보에 불만을 가진 국가들을 향한 우호적 제스처라는 분석도 있다.
최근 국제 정세는 ‘투키디데스 함정’을 연상케 했다. 이 사례는 기존 패권 국가(미국)와 빠르게 부상하는 신흥 강대국(중국)이 결국 부딪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의미한다. 당분간 미·중 패권갈등의 불씨가 쉽게 사그라지지 않을 것으로 전망되는 이유다.
이런 맥락에서 미국의 베네수엘라 공습은 표면적으로는 원유 확보와 인플레이션 압박 완화 목적으로 보이지만, 중국이 일대일로를 통해 남미 지역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 제동을 건 조치로 해석할 여지도 있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중국은 베네수엘라에 상당한 외교·경제적 자원을 투입하며 남미 영향력 확대를 시도해왔다"며 "미국으로서는 이를 용인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미·중 갈등은 구조적이고 숙명적인 갈등"이라며 "우리나라는 이 상황을 슬기롭게 피해 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 미·중 갈등 장기화…"中 투자 경계·공급망 재편 시간 벌어야"
패권 경쟁이 군사·외교 영역을 넘어 통상과 산업 정책으로 확산할 수 있다는 점도 주목할 대목이다.
미·중 갈등이 장기화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양국이 모두 우리나라의 핵심 수출 시장이라는 점은 부담 요인으로 꼽힌다. 산업통상부의 ‘2025년 연간 및 12월 수출입 동향’에 따르면 지난해 대미 수출은 1229억 달러, 대중 수출은 1308억 달러를 기록했다.
과거처럼 ‘안미경중’(안보는 미국·경제는 중국) 노선을 택할 수 있다면 수월하겠지만 녹록지 않은 상황이다.
우리나라는 지난해 10월 미국과 관세 협상을 타결하고, 한미 조선산업 협력(MASGGA·1500억 달러)을 포함해 향후 10년간 매년 2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를 약속했다. 중국과의 협력이 확대될 경우 상호관세 인상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중국은 희토류를 전략 자원으로 활용해 압박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중국은 2024년 기준 전 세계 희토류 생산량의 약 70%를 차지하고 있다. 정제·제련 시장 점유율은 90%, 희토류 영구자석 생산 비중은 93%에 달한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환경 속에서 우리나라에 보다 절묘한 ‘줄타기 전략’이 요구된다고 입을 모은다.
김수동 산업연구원 글로벌경쟁전략연구단장은 "과거에는 줄타기를 하더라도 미국의 줄이 좀 더 두껍고 덜 위험했다면 최근에 많이 얇아진 게 사실"이라며 "줄타기 자체가 큰 도전"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중국과 경쟁 관계에 있는 산업이 많은 만큼,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며 시간을 벌고 있는 동안 고부가가치 품목 개발과 산업 구조조정을 병행해야 한다"고 부연했다.
엄기홍 경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도 "당분간 미·중의 강 대 강 대치가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며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면서 공급망의 유연성과 다변화를 확보하는 것이 현실적인 선택"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이재명 대통령이 최근 가입 추진을 공식화한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역시 공급망 다변화 전략의 한 축으로 거론된다. CPTPP는 관세 철폐를 넘어 디지털·지식재산·환경·노동 등 무역 전반을 포괄하는 고수준 협정으로, 현재 일본·영국·캐나다·호주 등 12개국이 참여하고 있다.
중국을 견제하는 차원에서 해양세력의 일원으로 한미일 공조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조 교수는 "중국의 반도체 굴기는 한계에 직면했고, 세계 증시에서 미국의 비중은 오히려 확대되고 있다"며 "한미일 공조를 통해 해양 세력의 일원으로서 입지를 공고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미국의 매그니피센트 7(Magnificent 7·M7)을 보더라도 중국 기업은 포함돼 있지 않다"며 "미국과 중국의 격차는 좁혀지기보다는 오히려 벌어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조 교수가 제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8월 기준 세계 증시 시가 총액 비중은 미국이 49.1%인 반면 중국은 9.3%에 그쳤다. 2019년과 비교하면 당시 미국은 48.6%, 중국은 12.6%로 약 5년 사이 격차가 더 벌어졌다.
danjung638@tf.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