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화 실질 가치 금융위기 이후 '최저'…산업계, 고환율 고착화 주시
  • 최의종 기자
  • 입력: 2025.11.24 11:08 / 수정: 2025.11.24 11:08
"정부, 기초 펀더멘탈 고려한 대응 필요"
한국은행·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한국 실질실효환율 지수는 지난달 말 기준 89.09(2020년=100)로 전월 대비 1.44포인트(p) 내려갔다. /더팩트 DB
한국은행·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한국 실질실효환율 지수는 지난달 말 기준 89.09(2020년=100)로 전월 대비 1.44포인트(p) 내려갔다. /더팩트 DB

[더팩트ㅣ최의종 기자] 지난달 원화 실질 가치가 2009년 금융위기 이후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고환율 기조가 고착화되는 상황에서 산업계는 발생할 문제를 주시하는 모양새다. 정부가 펀더멘탈을 고려한 적극적인 대응책을 내놔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24일 한국은행·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한국 실질실효환율 지수는 지난달 말 기준 89.09(2020년=100)로 전월 대비 1.44포인트(p) 내려갔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있었던 2009년 8월 말(88.88) 이후 16년 2개월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원·달러 환율은 명목 가치를 나타내는 것이지만, 실질실효환율은 원화 실제 구매력을 나타낸다. 지난해 12월 비상계엄 이후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선고 직전 달인 지난 3월 말 89.29보다 더 낮은 수치를 기록했다. 이날 원·달러 환율은 1472.0원에서 거래를 시작했다.

일각에선 경제 위기 수준이라는 우려까지 나온다. 다만 최근 환율 급등이 과거 글로벌 금융 위기와 외환 위기 때와 비교하기는 어렵다는 평가도 있다.

1997~1998년 외환 위기 당시 최고 환율은 무려 '1951원/달러'까지 올랐었고, 외환 보유액도 당시(약 330억달러)와 현재(4288억달러)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차이가 크다. 2008~2009년 글로벌 금융 위기 당시 최고 환율은 '1597원/달러'였지만, 현재 한국의 대외건전성 지표는 그때 비해 견조한 수준이다.

이에 고착화 수준까지 온 고환율은 결국 대내외 요인이 겹치면서 발생했다는 분석이 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금리를 동결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커지면서, 달러 강세가 이어질 것이라는 관측이 반영됐다는 해석이 나온다. 당초 다음 달 금리를 인하할 것이라는 전망이 있었으나, 금리 동결 전망이 확산하는 상황이다.

해외 주식 투자에 뛰어드는 개인 투자자인 이른바 '서학개미'가 환율을 올리는 요인이라는 의견도 있다. 또한 외국인 원화 매도 수요 역시 원화 가치를 하락시키는 요인이기도 하다. 일각에서는 원·달러 환율이 1500원까지 터치할 수도 있다는 의견도 있다.

산업계는 단기적 현상으로 보면 수출에 주력하는 업종은 혜택을 볼 수 있으나, 중간재 수입 등이 필수적인 업종은 손실을 볼 수 있다고 우려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재선 전후 대미 투자 규모를 늘린 수출 업종은 고환율로 지출되는 비용이 커질 전망이다.

앞서 현대자동차그룹 등 완성차업계는 미국 관세 영향으로 실적 측면에서 상당한 손실을 봤다. 이에 고환율 상황이 손실을 상쇄할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하지만 계열사별 재무 구조에 따라 고환율 상황이 호실적에 도움이 될지, 손실이 될지는 지켜봐야 한다는 진단도 있다.

고환율 상황이 장기화하면 현대자동차그룹 등 수출 주력 업체들의 대미 투자 비용이 증가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뉴시스
고환율 상황이 장기화하면 현대자동차그룹 등 수출 주력 업체들의 대미 투자 비용이 증가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뉴시스

현대차그룹은 올해부터 4년간 미국에 260억달러를 투입할 예정이다. 고환율 상황이 장기화하면 대미 투자 비용은 증가할 수밖에 없다. 현대제철 역시 미국 루이지애나에 전기로 일관제철소를 지을 예정이라 고환율이 달갑지 않다.

포스코그룹은 원재료 부담이 커질 수 있다. 철강업뿐만 아니라 이차전지소재 사업을 벌이는 포스코그룹은 인도 JSW그룹과 손잡고 현지에 제철소를 지을 예정이다. 미국에서는 클리블랜드-클리프스와는 협력을 강화하기로 한 상황이다. 철강업계는 관세 부담까지 앉고 있다.

배터리업계 역시 고환율로 대미 투자 부담이 커질 전망이다. LG에너지솔루션은 2023년 미국 애리조나에 원통형 배터리 공장을 짓는다고 밝혔다. 당시 환율 1305원을 고려해 밝힌 투자액이 환율 급등으로 계획보다 10% 이상 늘었을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정유업계는 대량 원유를 미리 확보하고 수개월 뒤에 달러로 결제한다. 고환율로 인한 환차손 직격탄을 맞을 수 있다. 석유화학업계는 환율이 오르면 원가 부담이 커진다. 해운업계는 고환율로 환차익을 거둘 수 있으나, 유가 상승 시 수혜가 반감되는 구조다.

유류·정비비 등 비용을 달러로 계산하는 항공업계는 여행 수요 위축이 겹치면서 표정 관리가 어려운 상황이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등 대형 항공사(FSC)뿐 아니라 제주항공과 티웨이항공 등 저비용 항공사(LCC)는 3분기 아쉬운 실적을 거뒀다.

산업계가 저마다 환 헤지를 하고 있고 달러 수입도 이어지고 있어 당장 고환율 흐름으로 받을 영향이 크지 않다는 반론도 있다. 하지만 당장 기업들이 벌어들인 달러를 환전하지 않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에 고환율 흐름이 당장 바뀌기는 어렵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허준영 서강대 경제학부 교수는 "고환율 흐름은 당분간 지속돼 내년 상반기까지는 갈 것으로 본다. 기업들이 이미 벌어들인 달러를 환전하고 있지 않다"며 "(투자 등) 큰 그림인 듯하다. 이런 흐름에 변화를 줄 수 있는 것은 국제 변화와 정부 정책"이라고 진단했다.

이어 "단기적으로 해결할 묘수보다는 기초 펀더멘탈을 개선하는 방안을 고려해야 할 것 같다"며 "구두 개입 몇 번으로 해결하기는 어려운 상황인데 여기에 금리, 부동산 문제까지 겹친 상태다. 정부와 정치권이 근본적인 고민을 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bell@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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