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팩트ㅣ박지웅 기자] 국내 가상자산 거래소들이 해외 범죄자금의 세탁 통로로 악용되는 사례가 급증하면서 금융당국의 관리·감독 체계가 도마 위에 올랐다. 자금세탁 거래 규모가 폭발적으로 커진 반면, 국경 간 자금 흐름을 추적·차단할 제도적 장치는 여전히 미비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4일 관세청에 따르면 2020년부터 지난해까지 최근 5년간 적발된 불법 외환거래는 총 830건, 규모로는 12조4349억원에 달했다. 이 가운데 가상자산을 이용한 불법 외환거래액은 11조3724억원으로 전체의 91.5%를 차지했다. 사실상 대부분의 불법 외환거래가 가상자산을 매개로 이뤄지고 있는 셈이다.
특히 국내 거래소와 해외 범죄성 자금의 연결 고리도 확인됐다. 이양수 국민의힘 의원이 금융감독원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5대 거래소(업비트·빗썸·코인원·코빗·고팍스)와 캄보디아 거래소 '후이원 개런티(Hui One Guarantee)' 간 가상자산 유출입 규모는 128억645만원으로 집계됐다. 지난 2023년(922만원) 대비 1400배 가까이 증가한 수치다. 올해에도 지난달 20일까지 총 31억4925만원의 거래가 발생했다.
후이원 그룹은 미국과 영국 정부로부터 제재를 받고 있는 국제 범죄조직으로, 사기와 탈취를 통해 확보한 가상자산을 세탁한 혐의를 받고 있다. 특히 후이원 개런티는 해당 그룹 산하의 가상자산 플랫폼으로, 달러 스테이블코인인 테더(USDT) 중심의 고위험 자금 이동이 주로 이뤄졌던 것으로 파악된다.
국내 가상자산 거래소들의 이 같은 해외 거래는 현행 규제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금융당국은 자금세탁방지(AML) 강화를 위해 국내 미신고 사업자와의 가상자산 거래를 금지하고 있지만, 후이원 등 해외 거래소에는 동일한 규제를 적용할 법적 근거가 없다. 거래 가능 여부는 각 거래소가 고객확인제도(KYC) 적용 수준과 위험도를 자체적으로 평가해 판단해 왔던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 업비트는 지난 3월, 빗썸·코인원·코빗은 5월 초부터 후이원과의 거래를 중단한 상태다.
국회 국정감사에서도 이 같은 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다. 지난달 27일 열린 정무위원회 국감에서 의원들은 해외 거래소를 통한 자금세탁 실태를 지적했지만, 금융당국의 답변은 원론적인 수준에 그쳤다. 이찬진 금융감독원장은 "가상자산 2단계 입법 과정에서 AML 규제 체계를 한층 강화할 방안을 마련 중"이라며 "그 이전이라도 보완장치를 신속히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국내 거래소가 해외 불법 자금의 '우회 통로'로 악용되는 상황을 방치할 경우, 한국이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FATF)의 감시 대상국으로 지정될 위험이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전문가들은 거래소 자체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운 문제인 만큼, 정부 차원의 선제적 조치가 시급하다고 조언한다.
황석진 동국대 정보보호대학원 교수는 "거래소 입장에서는 모든 해외 지갑의 실체를 실시간으로 파악하기 어려운 만큼, 정부 차원에서 FATF나 에그몬트 그룹 등 국제기구와의 정보 공유를 강화하고, 고위험 거래소 정보를 국내 거래소에 신속히 통보하는 체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국내 거래소가 트래블룰 등 자금세탁방지 규정을 이행하더라도, 소액 거래나 미신고 거래를 통한 우회 송금은 통제 범위를 벗어나는 경우가 많다"며 "감독 당국이 사전에 고위험 지역이나 거래소를 지정하고, 선제적으로 주의 조치를 내리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