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팩트 | 김태환 기자] 정부와 여당이 기업 경영 위축을 완화하겠다는 취지로 배임죄 폐지를 추진하고 있는 가운데 금융노조와 더불어 일부 법조계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현재 법적 체계상 민사 책임의 범위가 현저히 낮기 때문에 배임죄가 사실상 유일한 최고경영자(CEO)의 견제 장치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민사 책임의 범위를 강화하는 보완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1일 법조계와 정치권 등에 따르면 정부와 여당은 당정협의회를 열고 '경제형벌 합리화 1차 방안'을 통해 형법상 배임죄 폐지를 기본방향으로 정했다. 정부·여당은 배임죄의 형벌 요건을 폐지하고, 배임죄의 요건을 명확히 하고 처벌 범위를 축소해 1년 내 대체입법을 추진하겠단 입장이다.
배임죄는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가 그 임무에 위배되는 행위로 피해자에게 손해를 가하는 범죄로, 형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대표적인 경제범죄 중 하나다. 배임죄는 단순배임죄, 업무상배임죄, 배임수재죄, 배임증재죄 등이 있다. 이 중 업무상 배임죄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배임죄는 지금까지 '임무위배' 요건이 모호하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임무위배란 회사의 이익을 위해 충실히 직무를 수행해야 할 의무(선관주의의무·충실의무)를 저버리는 것을 말한다. 배임죄는 타인의 사무(회사 업무)를 처리하는 자가 그 임무에 위배되는 행위로 재산상 이익을 취득하거나 제3자에게 취득하게 하고 본인(회사)에 손해를 가할 때 성립한다. 하지만 임무위배는 고의성과 부당성을 기준으로 판단되더라도 어디까지를 임무해태로 볼 것인지 여전히 불명확하다.
이렇다보니 배임죄를 남용하는 사례도 나타났다. 예를들어, 기업 경영진이 신사업에 투자했다가 손실이 발생한 경우, 합리적 위험 감수의 영역에 있었음에도 회사에 손해를 끼쳤다는 명분을 들어 배임 혐의로 고소할 수 있다. 또는 구조조정이나 인수합병(M&A) 등의 사례에서도 소액주주나 노조가 경영진을 압박하기 위한 조치로 배임죄 고소를 활용해 사법적 판단 이전에 여론전을 벌이기도 한다.
정부와 여당은 이러한 배임죄 범위를 정리하고, 형법적 책임을 제외하겠다는 설명이다.
문제는 민사적 책임에 대한 보완이 없다는데 있다. 현재 상태로는 배임죄가 아닌 민사책임만 물을 경우, '경영판단의 원칙' 때문에 제한되거나 아예 책임 소재에서 빠져나가는 경우가 대다수라는게 법조계의 시각이다.
경영상 판단 원칙은 경영진의 의사결정이 결과적으로 실패했더라도, 그 과정이 합리적이고 충실했다면 민사상 책임을 면제해 주고, 형사책임 판단에서도 제한적으로 고려되는 원칙이다. 이 원칙이 폭넓게 적용되면, 사실상 경영진의 의사결정을 광범위하게 면책해 주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 이를 보완하려면 민사적 책임을 강화하는 다양한 장치가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민사책임은 경영판단의 원칙 때문에 빠져나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형사책임(배임죄)은 고소·고발을 통해 일정한 견제 장치로 작동해왔다"면서 "정부 기조는 '회사가 잘못했다고 해서 경영진을 곧바로 감옥에 보낼 필요가 없다, 민사적 책임을 지게 하면 충분하다'는 입장이지만 민사책임 인정이 쉽지 않고 보완 장치도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배임죄부터 폐지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라고 본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법조계 관계자는 "기업 내부통제나 준법감시 제도, 이사·임원에 대한 충실의무 규정도 존재하지만, 현실에서는 실효성이 부족한 상태"라며 "결국 현재의 손해배상 규정 상황에서 형사적 견제만 없애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지적했다.
금융노조 역시 반대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전국사무금융서비스노동조합은 성명을 내고, 배임죄 폐지가 기업 경영진에게 무책임의 면죄부를 줄 수 있는 '반노동·친재벌 입법'이라고 지적했다.
이들은 배임죄 폐지가 △노동자의 생존권 위협 △금융산업 공공성 및 건전성 훼손 △법적 형평성 붕괴 △국제적 기준 역행 등의 문제를 야기시킨다고 설명했다.
금융노조는 정부와 여당에게 "형법·특경법상의 배임죄 폐지 추진을 중단하고, 집단소송제·징벌적 손해배상 제도와 결합해 경영진 책임을 강화해야 한다"면서 "노동자·주주·국민의 피해를 막기 위해 경영진 권한 남용을 통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금융산업의 특수성과 공공성을 감안하여 경영진 사적 전횡을 막을 수 있는 별도의 감독·처벌 장치를 강화하라"고 요구했다.
법률자문사 아이앤아이 리서치 이진수 대표는 "민사책임을 강화하는 제도, 예컨대 징벌적 손해배상제나 집단소송제 같은 제도가 정비된 후에야 형사책임 축소(배임죄 폐지) 논의를 할 수 있을 것"이라며 "더불어 행정제재나 금융기관 규제법 개정도 필요하지만, 과태료나 과징금의 수준이 지나치게 낮아 실효성이 떨어지는 현실도 개선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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