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팩트ㅣ조성은 기자] 국내 제약바이오 업계가 보툴리눔 톡신을 국가핵심기술로 묶어 관리하는 현행 제도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섰다. 보톨리눔 톡신은 클로스트리디움 보톨리눔 균이 만드는 신경독소로, 보톡스의 원료다. 전문가들은 14년째 이어져 온 지정이 과학적·법적 근거를 상실했을 뿐 아니라, 중복규제에 따른 수출 지연과 기회손실로 산업 경쟁력을 갉아먹고 있다는 지적이다.
30일 업계에 따르면 지난 29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K-바이오 글로벌 경쟁력 강화를 위한 국가핵심기술 보호제도 개선방안 토론회'에서 학계, 업계, 시민사회가 한목소리로 제도 개편을 요구했다. 현재 전 세계 보툴리눔 톡신 시장은 25조원 규모로, 연평균 8~10% 성장세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한국 기업 점유율은 4%대에 머물고 있다.
국가핵심기술이란 국내외 시장에서 기술적·경제적 가치가 높거나 관련 산업의 성장 잠재력이 높아 해외로 유출될 경우 국가 안전 보장 및 국민경제 발전에 악영향을 줄 우려가 있는 산업기술을 말한다. 국가핵심기술을 수출할 때는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의 승인을 받아야 하며 위반 시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다. 반도체, 디스플레이, 전기전자 등 13개 분야 76개 기술이 국가핵심기술로 지정돼 있다.
보툴리눔 톡신과 관련해선 지난 2010년 '보툴리눔 독소제제 생산기술'이 국가핵심기술로 지정됐으며 이후 2016년 '보툴리눔 균주'가 추가 포함됐다. 제약업계는 세계 유일하게 한국만 보툴리눔 균주를 국가핵심기술로 지정했다고 지적해왔다.
이승현 건국대 의대 미생물학교실 교수는 "보툴리눔 균주와 제조 공정은 이미 수십 년 전 논문으로 공개됐고, 세계 15개국 50여 개 기업이 활용할 만큼 보편화된 기술"이라며 "이를 '국가핵심기술'로 지정한 것은 과학적 근거가 전혀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균주는 자연에 존재하는 미생물로 기술·노하우가 아니며,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도 영업비밀성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행정 절차상 하자가 있는 지정"이라고 강조했다.
업계는 수출 지연으로 인해 손해를 보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국제약바이오협회에 따르면 보툴리눔 톡신 수출 승인에만 평균 4~6개월, 길게는 1년 가까이 소요돼 연간 900억~1000억원의 기회손실이 발생하고 있다. 한 기업은 승인 지연으로 시장 선점 기회를 놓쳐 경쟁사보다 최대 45% 낮은 가격에 제품을 공급해야 했다.
특히 이번 토론회에서 공개된 설문조사에서는 국내 18개 톡신 기업 중 17곳이 응답했는데 이 가운데 82.4%가 "지정 해제에 찬성한다"고 밝혔다. 반대 입장을 낸 기업은 이미 글로벌 공급망을 확보한 일부 선발주자들이었다. 후발 벤처의 성장과 해외 진출을 가로막는 '진입장벽'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배경이다.
규제의 중복성도 문제로 꼽힌다. 현재 보툴리눔 톡신은 산자부의 국가핵심기술 지정 외에도 대외무역법, 생화학무기법, 감염병예방법, 약사법 등 6개 부처 7개 법령에 걸쳐 다층적 규제를 받고 있다. 이상수 한국시민교육연합 상임대표는 "이미 강력한 규제망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국가핵심기술 지정은 옥상옥"이라며 "기업 부담만 키우는 실익 없는 제도"라고 꼬집었다.
전문가들은 한국만 유독 균주까지 국가핵심기술로 묶어둔 것도 시대착오적이라고 지적한다. 미국·EU 등 주요국은 제조기술과 품질관리에 초점을 맞추며 연구와 산업화를 장려하는 반면, 한국은 과도한 규제가 연구자 이탈과 산업 생태계 위축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산업계와 학계는 규제 개선이 시급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정세영 전북대병원 석좌교수는 "과잉 규제는 오히려 산업 생태계를 위축시킨다"며 "글로벌 시장에서 4%에 불과한 한국의 점유율을 끌어올리려면 하루빨리 규제부터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신중한 태도를 유지했다. 최광준 산업통상자원부 바이오융합산업과장은 "지정 해제 요청이 접수된 만큼 법령상 절차에 따라 국가안보·경제적 파급효과·해외 기술 환경 등을 종합 검토하겠다"며 "산업계뿐 아니라 중립 전문가 의견도 수렴해 합리적 결론을 내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