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팩트ㅣ황지향 기자] 미국 조지아주 현대차그룹-LG에너지솔루션 합작 배터리공장에서 대규모 불법 체류자 단속이 이뤄져 300명이 넘는 한국인 근로자가 구금됐다. 이번 사태로 공사 일정과 인력 운용에 차질이 예상되면서 양사의 북미 투자 전략에도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8일 업계에 따르면 미국 이민당국에 체포돼 구금된 한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석방 교섭이 일단락되면서 다수가 '자진 출국' 형식으로 귀국할 전망이다. 한·미 실무당국은 이르면 오는 10일 전세기를 통해 한국행 귀국을 추진하는 방안에 의견을 모은 것으로 전해졌다.
문제가 된 현장은 현대차그룹과 LG에너지솔루션이 2023년 합작해 설립한 HL-GA 배터리컴퍼니 건설 부지다. 두 회사는 각각 50%씩 지분을 투자해 총 43억달러(약 6조원)를 투입했으며 오는 10월 완공을 목표로 공사를 진행해왔다. 그러나 지난 4일 미국 이민세관단속국(ICE)과 국토안보수사국(HSI)이 현장을 급습해 450명 이상을 체포하면서 공사가 일시 중단됐다. 이 가운데 한국인 근로자는 300명가량으로 현대엔지니어링과 LG에너지솔루션 협력업체 소속 직원들이 상당수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올해 말 본격 양산에 돌입할 예정이던 HL-GA 공사는 중단됐고 정상화 시점도 불투명하다. 비자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필요해 추가 지연은 불가피하다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이 공장은 조 바이든 전 대통령이 일자리 창출 성과의 상징으로 내세웠던 만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정치적 의도를 갖고 단속을 지시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현대차그룹은 루이지애나주 현대제철 신규 설비 구축과 2029년까지 연 3만대 규모 로봇 공장 건설을 계획했지만, 이번 사태로 일정 차질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미국 정부가 노동·이민 규제를 강화할 경우 숙련 인력 확보는 더 어려워지고 공사 지연은 장기화할 수밖에 없다.
관세 문제도 불확실성을 키운다.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일본산 자동차·부품에 15% 관세를 부과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한국과도 자동차 관세를 25%에서 15%로 낮추는 협상을 타결했지만 서명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이번 사태가 외교 마찰로 비화할 경우 관세 인하 발효 시점이 늦춰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 경우 현대차·기아가 떠안아야 할 부담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이에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의 방미 일정에도 관심이 쏠린다. 정 회장은 오는 11일(현지시간) 디트로이트에서 열리는 '오토모티브뉴스 월드 콩그레스'에 참석해 기조연설을 통해 그룹의 미래 모빌리티 전략과 전동화 비전을 제시할 예정이다. 일각에서는 HL-GA 공장 사태와 맞물려 정 회장의 행보가 주목된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미 긴급 상황이 일단락돼 출장 자체는 예정대로 진행될 가능성이 크지만 미국 내에서 이번 사안과 관련한 메시지를 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증권가에서는 이번 사태가 내년 초 배터리 양산 일정에 차질을 빚을 것으로 보고 실적 전망을 낮추고 있다. LS증권은 LG에너지솔루션 목표주가를 30만2000원에서 30만원으로 조정하며 "LG에너지솔루션과 현대차그룹의 생산 시설 공사에 차질이 생겼다"며 "내년 예정된 현대그룹향 미국 판매량이 줄어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숙련 인력 부족 우려도 커지고 있다. 유진투자증권 리서치센터는 "미국은 외국인 취업 비자 발급에 연간 쿼터제를 두고 있어 대규모 인력이 필요한 프로젝트에 인력 수급 한계가 생길 수 있다"며 "공정 차질과 원가 상승 요인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현대자동차 미국법인은 "구금된 인원 중 당사에 직접 고용된 직원은 없다"며 "협력사 고용 관행 전반을 조사하겠다"고 성명을 냈다. 이어 "이번 사건은 공급망 전반의 철저한 감독 필요성을 일깨운다"며 "불법에 대해서는 무관용 원칙을 적용하겠다"고 강조했다.
LG에너지솔루션은 김기수 최고인사책임자(CHO)를 현지에 급파해 긴급 수습에 나섰다. ESTA와 B1 비자 소지 인력에 대해서는 현장 출근을 중단시키고 즉각 귀국하도록 조치했다. LG에너지솔루션 관계자는 "김기수 CHO가 현지에서 귀국 전까지 필요한 지원을 맡고 있다"며 "현재 공사는 전면 중단된 상태지만, 가동 일정은 아직 말씀드리기 어렵다. 무엇보다 근로자들의 안전한 귀환이 우선이고 이후에 정상화 계획을 말씀드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긴급 대응에 나섰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이날 서울 여의도 FKI타워에서 한국경제인협회와 공동으로 대미 투자기업 간담회를 열고 현대차, LG에너지솔루션, 삼성전자, SK온, 삼성SDI, HD현대, 한화솔루션 등 주요 기업들과 비자 체계와 인력 운용 현황을 점검했다. 박종원 산업부 통상차관보 주재로 열린 회의에서는 비자 문제와 인력 수급 불안정이 집중 논의됐다. 정부는 단기 파견 인력을 위한 비자 신설이나 제도 개선 등 다양한 방안을 검토하며 미국과 협의를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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