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최의종 기자] 이재명 정부가 윤석열 정부 시절 좌초됐던 상법 개정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경제계는 '지배구조 개편'이라는 숙제를 떠안은 모양새다. 개정 상법이 경영권 분쟁의 무기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지주사 지배력 강화 수순을 밟을 전망이다.
9일 업계에 따르면 오기형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5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상법 개정안을 다시 당론으로 추진한다고 밝혔다. 지난 4월 이사 충실 의무를 회사에서 회사·주주로 확대하는 등 개정안을 통과시켰으나,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의 거부권 행사로 폐기된 바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후보 시절인 지난 2일 유튜브 채널 한겨레 TV에서 출연해 상법 개정안과 관련해 "(취임 후) 2~3주 안에 처리할 것"이라며 "국회에서 이미 한번 (통과)했으니까 좀 더 보완해서 세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대야소' 국면 속 상법 개정안이 본격 시행되면 이사 충실 의무 대상이 회사에서 회사·주주로 확대된다. 민주당은 주주 이익을 보호하지 않는다는 부정적인 인식을 확산시켜 외국자본 국내 시장 유입을 막고 있다는 입장이다. 주식 시장 활성화에도 걸림돌이 된다고 본다.
경제계에서는 이사회가 의사결정을 할 때 고려 대상이 기존 회사에서 전체 주주 이익으로 확대되는 점에서 '디테일'이 필요하다고 주목한다. 하위 법령에서 적절한 기준이 필요하다는 관점이다. 회사 이익과 주주 이익이 상충할 경우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지적이다.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9월 말 기준 국내 88개 대기업집단 중 43개가 지주사 체제다. 지주사 총수·총수 일가 평균 지분율은 각각 24.7%와 47.7%다. 외부에서는 계열사를 거느린 지주사만 확보하면 경영권을 얻을 수 있다는 계산을 할 수 있다.
디테일이 부족할 경우 경영권 분쟁에서 수단으로 사용돼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최근 한진·LS그룹 연합과 호반그룹 물밑 신경전에서도 이용될 수 있다는 관측이 있다. 호반은 한진 지주사 한진칼 2대 주주이며, LS 지주사 ㈜LS 지분 5% 미만도 확보한 상태다.
상법 개정의 또 다른 축인 집중투표제 의무화는 이사회 구성 과정에 '불확실성'으로 작용할 수 있다. 집중투표제는 이사를 선임할 때 주식 1주당 선임하는 이사 수만큼 의결권을 각 주주에게 부여하는 제도다. 일부 기업 정관에 존재하나 배제가 가능한 상황이다.
집중투표제는 지난해 9월부터 진행되는 고려아연 분쟁에서 주목받았다. 고려아연은 지난 1월 임시 주주총회에서 집중투표제를 활성화해, 3월 정기 주주총회에서 본격 시행했다.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은 최대 주주인 영풍·MBK 파트너스 연합으로부터 경영권을 방어하고자 추진했다.
집중투표제가 최 회장 측 무기로 작용할 것이라는 관측이 있었다. 그러나 3월 정기주총 뚜껑을 열어보니, 영풍·MBK 연합 측 강성두 영풍 사장과 김광일 MBK 파트너스 부회장 등도 이사회에 진입하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상법 개정은 ESG(환경·사회·지배구조)경영을 추진하는 기업들이 환경이나 사회 부분에만 집중해 지배구조 혁신에 소홀했기에 돌아오는 '부메랑'이라는 지적이 있다. 경제계가 정부 여당이 자본시장 활성화를 목적으로 상법 개정을 추진하는 상황까지 오도록 자초했다는 지적이다.
황용식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기업들이 ESG를 너무 만만하게 봤다. 환경이나 사회 문제만 건드리면 됐다고 본듯하다. 지배구조는 여성 사외이사 선임 등 다양성 존중에만 신경 쓴 채 실질적인 경영 체제 투명성 제고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 초래한 결과"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디테일 없는 상법 개정이 기업 경쟁력을 약화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가뜩이나 인공지능(AI) 시대 도래 등 산업 개편이 이뤄지는 상황에서 실질적으로 의사결정을 하는 이사회 기능을 마비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의견이다.
조용현 법무법인 클라스 변호사는 "주주·회사 이해관계가 상충하면 어느 쪽으로도 결정할 수 없는 상황이 생긴다. 주주대표소송이 남발될 수밖에 없다"라며 "경우에 따라 이사 개인이 막대한 금전적 손해를 배상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분명 부담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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