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이성락 기자] 올해도 어김없이 재계 CEO 조기 교체 바람이 불고 있다. 연말 인사 전에 CEO를 교체하는 일은 이례적이지만, 최근 몇 년간 본격적인 하반기 경영에 돌입하기에 앞서 과감한 인적 쇄신을 통해 분위기 전환을 시도하는 기업이 늘어나고 있다.
29일 재계에 따르면 SK이노베이션은 전날 이사회를 거쳐 추형욱 SK이노베이션 E&S 사장을 신임 대표이사로, 장용호 SK㈜ 대표이사를 총괄사장으로 선임하는 안건을 승인했다. 기존 대표이사이자 총괄사장으로서 리밸런싱 전략을 수립·실행한 박상규 사장은 건강상의 이유 등으로 사의를 표명했다. 앞으로 추 대표이사와 장 총괄사장은 힘을 모아 지난해 11월 합병한 SK이노베이션과 E&S 사업 시너지를 가속화해 나간다는 방침이다.
연말 인사가 아닌 5월에 그간 핵심적인 역할을 해온 CEO를 교체하는 것은 다소 이례적인 결정이다. 재계에서는 건강상의 이유와 함께 실적 악화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현 상황과 이번 CEO 교체가 무관치 않다는 평가가 나온다. SK이노베이션은 글로벌 수요 부진과 공급 과잉으로 정유·화학 사업의 부진을 겪고 있고, 신규 사업으로 추진한 2차전지 사업은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둔화) 장기화로 타격을 받고 있다. 올해 1분기만 놓고 보면 영업손실 446억원을 기록했으며, 해당 실적 발표 직후부터 CEO 교체 가능성이 거론돼 왔다.
회사 차원에서는 인적 쇄신을 통해 반등을 노리는 것이다. SK뿐만 아니라 이처럼 과감히 승부수를 던지는 기업은 늘어나는 추세다. 굳이 문책성 교체가 아니더라도, 빠르게 변화하는 사업 환경에 맞춰 전략적으로 인적 변화를 감행하고 있다. 한 기업 관계자는 "기업 안에 위기감이 자리 잡고 있다면 굳이 이러한 분위기를 연말까지 가지고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며 "빠른 대응이 필요하다는 판단"이라고 설명했다.
대표적으로 지난해 5월 삼성전자가 조직의 분위기를 쇄신해 미래 경쟁력에 더욱 힘을 싣겠다며 경계현 사장에서 전영현 부회장으로 반도체 수장을 교체해 놀라움을 자아냈다. 당시 삼성전자는 2023년 내내 적자를 기록하는 등 혹독한 시간을 보낸 뒤였고, 업황 회복의 기회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인식이 강할 때였다. 삼성전자는 "불확실한 글로벌 경영 환경하에서 대내외 분위기를 일신해 반도체의 미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선제적 조치"라고 밝혔다.
신세계그룹과 CJ그룹도 지난해 실적 부진을 겪고 있거나, 새로운 활력이 필요한 계열사 CEO를 대상으로 변화를 줬다. 성과 중심 인사를 실시하며 조직 내 긴장감을 유지하는 한화그룹처럼 수시 또는 조기 인사가 일상화된 기업도 있다.
SK그룹 또한 수시 인사에 열려 있는 모습이었다. 그룹 차원에서 대규모 리밸런싱 작업을 수년째 추진하고 있기도 하다. 회사는 지난해 연말 인사 전에 미리 SK스퀘어(7월), SK에코플랜트(5월) CEO 인사를 단행해 조직의 조기 안정화를 꾀한 바 있다. SK그룹은 수시 인사 기조를 유지하며 빠른 조직 안정과 실행 중심의 기업 문화 정착을 가속화한다는 전략이다.
올해의 경우 SK이노베이션 외에도 쿠팡이 CEO 체제에 변화를 줬다. 지난 26일 강한승·박대준 각자 대표 체제에서 박대준 단독 대표 체제로 전환한다고 발표했다. 5년간 유지한 체제를 갑자기 바꾼 건 인공지능(AI) 물류 사업에 더욱 힘을 주기 위함으로 해석된다. 그간 강 대표는 경영 관리 부문을, 박 대표는 쿠팡이츠·쿠팡플레이 등 신사업 부문을 맡아 왔다. 쿠팡은 "박 대표는 AI 물류 혁신을 바탕으로 전국 로켓배송 확대와 대규모 일자리 창출 등 혁신 신사업과 지역 인프라 개발을 이끌어 왔다"며 "이번 인사를 통해 AI 물류 혁신 기반의 전국 쿠세권(로켓배송 가능 지역) 확장과 소상공인 판로를 더 강화할 방침"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앞서 유통·식품 기업들이 잇달아 수시 인사를 단행했다. SK스퀘어 자회사 11번가가 지난달 말 새로운 대표이사에 박현수 11번가 최고사업책임(CBO)을 선임했다. 이달 초 CJ제일제당의 식품 사업 대표로는 그레고리 옙 식품연구소장이 선임됐다. 빙그레도 이달 초 "기존 대표이사가 개인적인 이유로 사임 의사를 표명했다"며 ㈜제때의 김광수 대표이사를 내정했다.
최근 인적 변화를 시도했으나, 직원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하는 기업도 있다. 이해진 네이버 이사회 의장의 경영 복귀 이후 최측근인 최인혁 전 최고운영책임자(COO) 복귀도 이뤄졌는데, 노조를 중심으로 반대 목소리가 거세지고 있다. 최 전 COO는 과거 직장 내 괴롭힘 사건과 관련해 책임을 지고 물러났던 인물이다. 노조는 "부당한 결정"이라며 이러한 인사를 단행한 이유에 대한 경영진의 해명을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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