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조소현 기자] 구글이 1대5000 축척의 국내 고정밀 지도 데이터를 해외로 반출할 수 있게 해달라고 다시 한번 한국 정부에 요청했다. 이번 주 한·미 관세 협상을 앞두고 정부가 이를 통상 협상 카드로 검토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자, 업계는 핵심 데이터가 무역 압박 수단으로 소모될 수 있다는 우려를 내놓고 있다.
22일 업계에 따르면 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이번 주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리는 한·미 '2+2 고위급 협의'에 참석한다. 이 자리는 미국 측 제안으로 추진됐으며, 세부 일정과 의제는 조율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 측에서는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과 제임슨 그리어 무역대표부(USTR) 대표가 참석할 예정이다.
문제는 이 협의에서 구글이 요청한 고정밀 지도 데이터의 해외 반출 사안이 논의 테이블에 오를 수 있다는 점이다. 구글은 지난 2월 국토지리정보원에 1대5000 축적의 국내 고정밀 지도 데이터를 해외에 있는 구글 데이터센터로 이전할 수 있게 해달라고 신청했다.
구글은 국내 지도 서비스의 정확도가 낮아 외국인 관광객들이 불편을 겪고 있다며, 고정밀 지도 데이터의 반출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현재 구글은 1대2만5000 축척의 지도를 활용해 국내 '구글 지도(Google Maps)'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지만, 차량·도보·자전거 경로 안내 기능은 제공되지 않는다. 1대5000 축척의 지도는 50m 거리를 1㎝로 표현할 수 있어 골목길과 건물 간 거리까지 정밀하게 식별할 수 있다.
하지만 업계는 이를 단순한 서비스 개선 문제가 아니라 국가 안보, 정보주권, 미래 산업 주도권이 모두 걸린 중대한 사안으로 보고 있다. 고정밀 지도 데이터가 단순한 위치 정보가 아닌, 자율주행차, 도심항공교통(UAM), AI 등 미래 산업의 핵심 인프라라는 점에서, 이를 해외 기업에 넘기는 것은 곧 차세대 산업 경쟁력까지 이전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다.
안정상 한국OTT포럼 회장(중앙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겸임교수)은 "지도 데이터는 자율주행 등 미래 산업의 핵심 인프라이자 경쟁력의 근간인 만큼, 정부가 국내 기업 보호와 활용 방안을 우선적으로 마련해야 한다"며 "지도 데이터를 해외 기업에 넘길 경우 국내 기업이 기술 주도권을 잃고 산업 생태계가 잠식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한 업계 관계자도 "지도 플랫폼은 재난 대응부터 국민 생활, 산업 전반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활용되는 기반 인프라"라며 "정밀한 공간 정보를 해외 기업에 넘길 경우, 자율주행이나 모빌리티 등 미래 핵심 산업에서 국내 기업이 기술적으로 종속될 우려가 크다"고 했다.
실제로 구글은 지난 2007년과 2016년에도 동일한 요청을 했지만, 정부는 모두 불허했다. 당시에는 안보상 이유가 핵심이었다. 정부는 1대5000 축척의 지도가 위성영상과 결합될 경우 군사 기밀이 노출될 수 있다고 판단, 국내 데이터센터 설치, 보안시설 블러(흐림) 처리 등 조건을 제시했지만 구글은 이를 거부했다.
이번에는 구글이 블러 처리를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블러 처리를 하려면 정부가 군사·보안시설 좌표를 구글에 넘겨야 하며, 이는 정보 유출 가능성 자체를 수반한다는 점에서 리스크가 사라지지 않는다. 게다가 구글은 국내 데이터센터 설립 계획이 없고, 핫라인 구축과 책임자 지정만을 대안으로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안보 우려는 실증적으로 뒷받침된 바 있다. 지난 2020년 발행된 한국지도학회지 '구글의 전자지도 국외반출요구에 대한 입법론적 연구' 논문에 따르면, 수도방위사령부 일대를 대상으로 구글 위성영상과 고정밀 전자지도 데이터를 중첩한 구글 지도를 분석한 결과, 지휘 본부의 위치는 물론 도로 구조와 보급 경로까지 식별 가능한 것으로 분석됐다. 보고서는 이러한 정보가 정밀 좌표 확보, 작전 계획 수립, 주요 도로 차단 지점 판단 등에 활용될 수 있어 군사적 위협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외교적 문제도 제기된다. 동해가 '일본해', 독도가 '다케시마'로 표기될 경우 이를 시정할 법적 강제력이 한국에는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구글은 지난 2월 멕시코만을 미국만(Gulf of America)으로 변경 표기한 전례도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국가별 표기 분쟁 시 기업 입장에서 중립 혹은 글로벌 스탠다드를 우선시할 위험이 잔재한다"고 우려했다.
이와 맞물려 미국 정부의 통상 압박 기조도 업계의 우려를 키우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자국 기업에 불리한 무역 장벽에 대해 상호관세를 부과하겠다고 했으며, 현재 유예 조치를 시행 중이지만 USTR은 한국의 위치 데이터 반출 제한을 디지털 무역 장벽 중 하나로 거론했다.
이에 업계는 정부가 상호관세 협상에서 고정밀 지도 데이터 반출 문제를 협상 카드로 사용할 가능성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이번 한·미 관세 협상에서 정밀 지도 반출 이슈 등이 함께 다뤄질 것으로 전망되는 상황"이라며 "대내외적으로 혼란한 틈을 타 중요한 이슈도 함께 다룰 것으로 예상돼 우려가 크다. 미래 과학기술 분야와 밀접한 정밀 지도가 이번 관세 협상의 대상이 돼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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