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이성락 기자] 삼성과 SK, LG 등 최근 창립기념일을 맞은 기업들이 별도 행사 없이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창업 정신을 기렸다.
8일 재계에 따르면 이날 창립 72주년을 맞은 SK는 그룹 차원의 별도 행사를 열지 않고 내실을 다지는 모습이다. 이전부터 비교적 '조용한 생일'을 추구한 SK는 코로나19를 거쳐 더욱 차분하게 창립기념일을 보내고 있다. SK그룹 관계자는 "창립일과 관련한 공식적인 행사는 예정돼 있지 않다"고 밝혔다.
다만 창업 정신을 기리기 위한 오너 일가와 일부 경영진의 만남은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최태원 회장과 최재원 수석부회장, 최창원 의장 등은 전날 내부 리모델링을 마친 서울 종로구 삼청동 선혜원에 모여 고(故) 최종건 창업회장과 고 최종현 선대회장을 기린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SK는 창업 정신을 지속해서 강조하고 있다. 그룹 설립 초기부터 내세운 경영 철학을 되새기며 경영 위기를 극복하고, 나아가 기업 문화를 발전시킨다는 방침이다.
이와 관련해 SK는 최근 기업 수장고 등에 장기간 보관한 최 선대회장 경영 철학, 기업 활동 관련 자료를 발굴해 디지털로 변환, 영구 보존·활용하는 디지털 아카이브 프로젝트를 2년 만에 완료했다. 이른바 '선경실록'으로 불리는 해당 자료들은 당시 경제 상황과 한국 기업인들의 사업보국에 대한 의지, 크고 작은 위기를 돌파해 온 선대 경영인의 혜안 등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기록물이다.
SK 성장 과정도 최 선대회장의 목소리를 통해 정확히 확인할 수 있다. 세계 경제 위기를 몰고 온 1970년대 1·2차 석유파동 당시 정부 요청에 따라 최 선대회장이 중동의 고위 관계자를 만나 석유 공급에 대한 담판을 짓는 내용 등이 담겼다. SK그룹은 디지털 아카이브 자료를 그룹 고유의 철학인 SKMS와 수펙스추구 문화 확산 등을 위해 활용할 계획이다.
지난달 27일 창립 78주년을 맞은 LG도 별도 행사를 열지 않았다. LG는 2013년부터 창립기념일 행사 대신 공동 휴무일을 정해 임직원들이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구광모 회장은 창립기념일 행사 대신, 경기 이천 LG인화원에서 사장단 회의를 열었다. 경영 환경을 둘러싼 불확실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 성장 전략 마련이 시급하다는 판단에서다. LG전자, LG디스플레이, LG화학, LG에너지솔루션 등 주요 계열사 최고경영진 30여명은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전략적 과제 등을 심도 있게 논의했다.
구 회장은 "일부 사업의 경우, 양적 성장과 조직 생존 논리에 치중하며 경쟁력이 하락해 기대했던 포트폴리오 고도화의 모습을 만들어 내지 못했으며, 이런 모습이 그동안의 관성이었다. 절박감을 갖고 과거의 관성, 전략과 실행의 불일치를 떨쳐내자"며 "변화는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다. 골든 타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구 회장은 주도적 변화를 당부하는 과정에서 고 구본무 선대회장의 2017년 신년사(창립 70주년)를 공유하기도 했다. 그는 "당시에도 올해와 같이 트럼프 정부 출범으로 경제 질서의 재편이 본격화되는 시기였다"며 "(구 선대회장은) 경쟁 우위 지속성, 성과 창출이 가능한 곳에 선택과 집중을 통해 포트폴리오를 고도화하고, 이를 위해 사업 구조와 사업 방식의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고 전했다.
삼성은 지난달 22일 창립 87주년을 맞았지만, 예년과 마찬가지로 기념 행사를 열지 않았고, 특별한 메시지 또한 내놓지 않았다. 삼성은 고 이건희 선대회장이 '제2의 창업'을 선언한 3월 22일을 창립일로 기념해 왔으나, 현재 삼성물산 창립일로 의미가 축소된 상태다. 삼성전자 창립일은 11월 1일이다.
위기 극복 차원의 별도 메시지가 나오진 않았지만, 조직 내부적으로는 이미 복합 위기를 극복해 내겠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룹 맏형인 삼성전자는 올해를 '근원적 경쟁력 회복의 해'로 삼겠다고 다짐한 상태다. 이재용 회장은 지난달 삼성 임원들에게 "삼성다운 저력을 잃었다. 중요한 것은 위기라는 상황이 아니라 위기에 대처하는 자세"라며 '독한 삼성인'이 돼달라고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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