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이성락 기자] "중대한 정치 사안이 생겨도 우리나라는 수습이 빨라. 불안 요소 때문에 괜히 우리(기업인)까지 들뜰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정치가 불안할수록 경제까지 망가지면 안 된다'는 사명감을 가져야 경제가 나빠지지 않는다는 거야."
1970~1990년대 한국 경제 성장기를 이끈 고(故) 최종현 SK그룹 선대회장의 경영 활동 등을 담은, 이른바 '선경실록'이 유고 27년 만에 세상에 나온다. 방대한 최 선대회장 관련 기록은 한국 근현대 경제사를 연구하는 중요한 사료로 쓰일 전망이다.
SK그룹은 기업 수장고 등에 장기간 보관한 최 선대회장 경영 철학, 기업 활동 관련 자료를 발굴해 디지털로 변환, 영구 보존·활용하는 디지털 아카이브 프로젝트를 완료했다고 2일 밝혔다. 2023년 창사 70주년 어록집 제작을 발간하는 과정에서 옛 자료의 역사적 가치를 확인하고, 프로젝트를 추진한 지 2년 만이다.
최 선대회장은 사업 실적, 계획 보고, 구성원과 간담회, 각종 회의, 행사 등을 녹음해 원본으로 남겼다. 이를 통해 그룹의 경영 철학과 기법을 발전시키고, 궁극적으로 우리나라 기업 경영의 수준을 높이고자 했다. 이러한 방침은 SK 고유의 기록 문화로 계승됐다.
이에 SK그룹 고유의 경영관리체계인 SKMS(SK Management System)를 정립하고 전파하는 과정, 그룹의 중요한 의사결정 순간에서 임직원과 토론하는 장면, 국내외 저명인사와 대담 내용 등이 상세하게 기록됐다.
이번에 복원한 자료는 오디오·비디오 형태로 약 5300건, 문서 3500여건, 사진 4800여건 등 총 1만7620건, 13만1647점이다. 최 선대회장의 음성 녹취만 오디오 테이프 3530개에 달한다. 이는 하루 8시간씩 들어도 1년 이상의 시간이 걸릴 정도의 분량이다.
SK그룹 관계자는 "최 선대회장의 생생한 육성 녹음을 통해 당시 경제 상황과 한국 기업인들의 사업보국에 대한 의지, 크고 작은 위기를 돌파해 온 선대 경영인의 혜안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일부 내용을 살펴보면, 최 선대회장은 1982년 신입 구성원과 대화를 통해 "땅덩어리가 넓은 미국에서도 인재라면 외국 사람도 쓰는 마당에 한국이라는 좁은 땅덩어리에 지연, 학연, 파벌을 형성하면 안 된다"라며 한국의 관계 지상주의를 깨자고 임기 내내 여러 차례 강조한다.
1992년 임원들과 간담회에서는 "R&D를 하는 직원도 시장 관리부터 마케팅까지 해보며, 돈이 모이는 곳, 고객이 찾는 기술을 알아야 R&D 성공 확률을 높일 수 있다"고 말한다. 같은 해 SKC 임원들과 회의에서는 "플로피디스크(필름 소재의 데이터 저장장치)를 팔면 1달러지만, 그 안에 소프트웨어를 담으면 가치가 20배가 된다"며 우리나라 산업이 하드웨어 제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1990년대 중반 유럽 한 국가의 왕세자 면담을 위해 준비한 보고서에는 앞으로 기후 위기가 심각한 국제 문제가 된다며 법정 기준치보다 훨씬 낮은 환경 기준을 맞추기 위해 함께 노력하자는 제안이 담겨있다.
SK 성장 과정도 최 선대회장의 목소리를 통해 정확히 확인할 수 있다. 세계 경제 위기를 몰고 온 1970년대 1·2차 석유파동 당시 정부 요청에 따라 최 선대회장이 중동의 고위 관계자를 만나 석유 공급에 대한 담판을 짓는 내용, 1992년 정당하게 획득한 이동통신 사업권을 반납할 때 좌절하는 구성원들을 격려하는 상황 등이 음성 녹취에 담겼다.
이 밖에도 다른 그룹 총수들과 산업 시찰에서 나눈 대화, 외국 담배회사가 한국 내 유통 협업을 제안하자 '비즈니스는 결국 신용'이라며 거절한 일화, 김장김치 보관법 등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가 오디오 테이프에 남았다.
SK그룹은 디지털 아카이브 자료를 그룹 고유의 철학인 SKMS와 수펙스추구 문화 확산 등을 위해 활용할 방침이다.
SK그룹 관계자는 "최 선대회장의 경영 기록은 한국 역동기를 이끈 기업가들의 고민과 철학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보물과 같은 자료"라며 "양이 매우 많고 오래돼 복원이 쉽지 않았지만, 첨단기술 등을 통해 품질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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