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락의 '뒷담화'] 구글은 이세돌에게 큰 빚을 졌다
  • 이성락 기자
  • 입력: 2016.03.18 01:00 / 수정: 2016.03.18 00:08

이세돌 9단이 알파고와 4국 대결에서 승리한 뒤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구글 제공
이세돌 9단이 알파고와 4국 대결에서 승리한 뒤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구글 제공

[더팩트ㅣ이성락 기자] 최근 지하철 속 풍경이 흥미로웠습니다. 이어폰을 낀 채 스마트폰을 바라보는 한결같은 모습 속에서도 작은 변화가 있었죠. 평소와 다르게 스마트폰 화면을 차지하고 있던 건 '바둑' 혹은 '이세돌'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발 디딜 틈 없는 지옥 같은 지하철 안에서 예능프로그램이나 드라마가 아닌 바둑, 이세돌을 벗 삼고 있었습니다.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최후 대결이 있었던 지난 15일 오후까지 그 열기는 식지 않았습니다. 이세돌 9단이 1승을 거두면서 관심은 더욱 높아져만 갔습니다. 지하철뿐만 아닙니다. 대국이 펼쳐진 서울 광화문 포시즌스 호텔 인근은 온통 바둑 이야기뿐입니다. 특히 넥타이 부대로 북적이는 흡연장소에서는 "이세돌"이란 이름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토록 주목받을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때아닌 '바둑 열풍'이 신기할 따름이었죠. 껑충 뛴 중계방송 시청률, 쏟아지는 외신 등을 보며 이번 대국에 대한 높은 관심도를 실감했습니다. 더불어 바둑, 이세돌 9단의 인기는 치솟았습니다. 온라인에는 이세돌 9단과 관련된 이야기가 끊임없이 회자됐습니다.

왜일까요? 신드롬에 가까운 관심을 받은 건 이세돌 9단의 대결 상대가 사람이 아닌 인공지능이었다는 특수성이 작용했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인간이 생각 못 하는 수'로 이세돌 9단을 꺾은 인공지능의 바둑 실력도 꽤 흥미로운 부분이었죠. 일부 사람은 '인류의 승리, 기계의 승리' 등의 키워드를 앞세운 매스컴의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이세돌 9단이 수를 놓기 전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구글 제공
이세돌 9단이 수를 놓기 전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구글 제공

아무리 그래도 바둑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4~5시간 동안 가슴 졸이며 대국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건 상당히 놀라운 장면이었습니다. 바둑을 전혀 모른다고 밝힌 여대생에게 "(이번 대국에)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라고 물어봤습니다. 그는 "이세돌이 너무 귀여워요"라고 답했습니다. '성큼 다가온 인공지능 시대를 느꼈다', '알파고 무섭다' 등의 대답을 기다렸는데, 조금은 의외였습니다. 광화문 인근에서 만난 20대 남성 역시 "이세돌 형이 좋아서 봐요"라고 뜻밖의 애정을 드러냈습니다.

'인류 모두에게 성공적이었던 대결'로 평가받는 이번 대국의 공로를 다른 곳에서 찾기 싫은 이유가 여기에 있을까요? 지난 일주일 동안 "우리 세돌이", "세돌이 형", "갓세돌"로 불린 이세돌 9단의 인간적인 매력이 이번 대국을 성공으로 이끌었습니다. 알파고를 만든 구글의 기술력, 인공지능의 혁신, 그리고 마케팅 따위가 아니고 말이죠.

실제로 보이지 않는 알파고, 화장실조차 한 번도 가지 않았다는 대리인 아자황 박사와 비교해 이세돌 9단이 지은 표정은 '인간미' 그 자체였습니다. 그의 손은 위기 때마다 떨렸고, 패배한 뒤 목소리에는 분함이 느껴졌습니다. 4국에 승리했을 때 지은 어린아이와 같은 미소는 쉽게 잊히지 않습니다. 이세돌 9단은 집념을 통해 드라마틱한 장면을 만들어냈고, 한국발 뜨거운 이슈는 전 세계로 퍼져나갔습니다.

일찌감치 알파고의 최종 승리가 결정된 뒤라 관심이 떨어질 법도 했습니다. 맥이 빠진 상황에서도 이세돌 9단은 최선을 다해 '인간 승리'를 이뤄냈습니다. 1·2국까지만 해도 인공지능의 위대함을 외쳤던 이들도 인간 한계에 도전장을 던진 이세돌 9단의 '바둑 스토리'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대국이 끝난 뒤 이세돌 9단의 도전정신을 높이 사는 외신들의 보도가 쏟아졌습니다.

이세돌 9단이 5국에 앞서 딸의 응원을 받고 있습니다. /구글 제공
이세돌 9단이 5국에 앞서 딸의 응원을 받고 있습니다. /구글 제공

감동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불편한 사실을 마주합니다. 이번 대국의 최대 수혜자는 구글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입니다. 결국 전 세계인들이 보인 관심은 고스란히 구글의 주머니로 들어갔습니다.

구글은 값으로 매길 수 없는 막대한 광고 효과는 물론, 알파고의 약점까지 파악했습니다. 단 한 번의 행사로 인공지능 기술을 만천하에 뽐내면서 '인공지능=구글'이라는 이미지를 심는 데 성공했습니다. 구글 주가는 대국기간 중 껑충 뛰었습니다. 구글은 대국 진행과 상금을 포함해 20억 원 안팎을 쓴 것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구글의 잔치로 끝났다'는 말이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되는 대목입니다. 물론 이번 대결이 세계사에 중요한 순간 중 하나였다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불과 몇 개월 동안 엄청난 실력을 쌓은 알파고 또한 박수를 보낼 만합니다. 아울러 우리의 인공지능 산업기반이 열악하다는 것, 관심을 두고 상생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등 의견도 존중합니다. 그러나 이번 대국이 남긴 복잡한 뒷말은 거둬내고, 직면하게 된 사실만 보면 꽤 불편한 구석이 있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대국을 통해 알파고를 광고하고 돈을 벌어들인 구글이 이번 대결의 진정한 승자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기업이 이벤트를 통해 관심을 끌고 이득을 챙기는 건 당연한 일 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어딘가에서 승리의 샴페인을 마시고 있을 이들이 기억해야 할 것이 있어 보입니다. 정보가 부족한 가운데 고수의 기품, 바둑의 낭만, 투혼, 인간적인 매력으로 대국의 가치를 끌어올린 이세돌 9단에게 구글은 큰 빚을 졌습니다.

rocky@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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