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철의 스포츠뒤집기] 런던 올림픽, 브라질 월드컵 예선 중간 점검
  • 손현석 기자
  • 입력: 2011.12.03 08:20 / 수정: 2014.06.20 17:23

"축구 대표팀이 이 팀 저 팀 번갈아 경기를 하니까 정신이 없네. 자네가 정리 좀 해 주게." 요즘 스포츠를 좋아하는 지인들에게 자주 듣는 말이다. 그럴 만하다. 연령대별 대표팀이 잇따라 경기를 하고 있으니 축구를 아주 좋아하는 팬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느 팀이 어느 대회를 치르고 있는지 헷갈릴 수 있다. 시기적으로 겹치는데다 국가대표팀과 23세 이하 대표팀이 들어 있는 조에 나머지 팀들이 모두 서아시아 나라들이어서 더욱 그럴 것이다.

먼저 국가대표팀은 2014년 브라질 월드컵 아시아 지역 3차 예선에 올라 있다. 레바논과 쿠웨이트, 아랍에미리트연합(UAE)과 B조에 편성돼 5차전을 마친 현재 3승1무1패, 승점 10점으로 조 2위인 레바논과 승점은 같지만 골득실차에서 앞서 선두를 달리고 있다. 2승2무1패의 쿠웨이트가 3위,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 출전했던 UAE는 5패로 탈락이 결정됐다.

지난달 15일 레바논과 치른 원정 경기에서 1-2로 져 최종 예선 진출을 확정하지 못했지만 내년 2월 29일 홈에서 열리는 쿠웨이트전에서 비기기만 해도 최종 예선에 나가게 된다. 혹시 쿠웨이트에 지더라도 레바논이 UAE에 지면 최종 예선에 오른다. 20개국이 4개국씩 5개 조로 나뉘어 진행되고 있는 3차 예선에서는 각조 2위까지 최종 예선에 진출한다. 4.5장의 본선 티켓을 놓고 겨루는 최종 예선에서 한국은 8회 연속, 통산 9회 월드컵 본선 출전을 노린다. 최종 예선을 통과하면 그때부터 국가 대표팀은 월드컵 대표팀으로 전환한다.

23세 이하 대표팀은 2012년 런던 올림픽 남자 축구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을 치르고 있다. 전체 일정의 절반을 마친 현재 2승1무, 승점 7점으로 A조에서 선두에 나서 있다. 오만이 1승1무1패로 2위, 카타르가 3무로 3위에 올라 있는 가운데 서아시아의 강호 사우디아라비아는 의외로 고전하며 1무2패로 꼴찌다. 4개국씩 3개 조로 나뉘어 열리고 있는 최종 예선에서 각조 1위는 런던 올림픽에 직행하고 각조 2위가 벌이는 플레이오프의 승자(아시아 4위)는 아프리카 4위와 대륙간 플레이오프를 치러 런던행 막차의 주인공을 가린다. 7회 연속, 통산 9회 올림픽 본선 출전을 겨냥하고 있는 23세 이하 대표팀은 내년 2월 5일 사우디아라비아, 22일 오만과 원정 경기를 갖고 3월 14일 카타르를 홈으로 불러 6차전을 치른다. 서아시아 2연전을 넘어서서 런던행을 확정하면 23세 이하 대표팀은 올림픽 대표팀으로 이름이 바뀐다. 이때쯤이면 24세 이상 와일드카드 3장의 윤곽이 드러나게 된다.

한국 남자 축구는 월드컵과 올림픽 단골손님이다. 그러나 불과 20여년 전만해도 한국은 양 대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무던히 애썼다. 한국 축구의 월드컵 도전사는 한마디로 한국 축구의 성장 역사다. 월드컵과 한국 축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할 때마다 한국 축구는 발전 방안을 모색했고 그런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발전해 1986년 멕시코 대회 이후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회까지 7회 연속 본선 출전의 결코 쉽지 않은 기록을 세우게 됐다.

축구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이라면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일본 축구 대표팀으로 김용식 선생이 출전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이 1938년 제3회 프랑스 월드컵 지역 예선에 대비해 1936년 11월 소집한 국가 대표팀 명단에 김용식, 이유형, 배종호, 박규정 등 4명의 한국 선수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1938년 프랑스 월드컵 지역 예선 12조에 속한 일본이 중일전쟁 등 내부 문제로 기권하지 않았으면 한국과 월드컵의 인연은 보다 일찍 맺어졌을 것이다. 1930년대 중반부터 1940년대 초반까지 연인원 40여 명의 한국 선수가 각종 국제 대회에 대비한 일본 축구 대표팀 훈련에 소집됐다. 한국 선수들의 실력이 뛰어났다는 증거다.

1945년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난 뒤 국내 축구계는 올림픽 등 국제 대회에 출전하기 위한 선결 요건인 국제축구연맹(FIFA) 가입을 서둘러 1948년 5월 21일 FIFA 가맹국이 됐다. 그리고 처음으로 출전한 국제 대회가 1948년 런던 올림픽이었다.

한국은 1회전에서 멕시코를 5-3으로 꺾었으나 8강전에서 대회 우승국인 스웨덴에 0-12로 크게 져 탈락했다. 이 대회 이후 한국 축구는 1964년 도쿄 올림픽에 한 차례 출전한 뒤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자동 출전권을 갖고 나서기까지 오랜 기간 올림픽과 인연을 맺지 못했다. 도쿄 올림픽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에 1-6, 브라질에 0-4, 아랍공화국연합(이집트+시리아)에 0-10으로 대패했다. 한국 축구의 암흑기였다.

1942년과 1946년 대회를 건너뛴 월드컵은 1950년 제4회 대회가 브라질에서 열렸다. 그러나 6월 24일부터 7월 4일까지인 대회 기간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은 대회에 나설 생각을 할 형편이 아니었다. 한반도에는 민족상잔 전쟁으로 포연이 가득했다.

1954년 스위스에서 개최된 제5회 월드컵에 아시아 지역에 배정된 티켓은 한 장이었다. 대만이 기권해 아시아 지역 예선은 한국과 일본의 맞대결로 좁혀졌다. 이때는 두 나라의 국교가 정상화되기 전이었고 이승만 대통령의 강력한 대일 정책으로 일본에서 두 차례 경기를 치러 한국이 1승 1무(5-1, 2-2)로 본선 출전권을 차지했다. 선수단이 출국하기 전 이유형 감독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한 "일본에게 지면 선수단 모두가 현해탄(대한해협)에 몸을 던지겠다"는 비장한 약속은 당시 시대상을 보여 준다.

한국은 본선 2조 첫 경기에서 헝가리에 0-9, 두 번째 경기에서 터키에 0-7로 크게 져 2패로 조기 탈락했다. 결승전에서 서독에 2-3으로 졌지만 8강전에서 브라질을 4-2로 꺾는 등 당시 헝가리는 스타플레이어 푸스카스를 앞세운 세계 최강 전력이었다. 이 대회와 런던 올림픽 전 경기에 출전한 골키퍼 홍덕영은 푸스카스 등 헝가리 선수들의 슈팅을 막느라 가슴과 배가 얼얼할 정도였다고 했다.

신세대 팬들에게는 믿어지지 않을 일화들이지만 이런 역사 속에 오늘날 한국 축구는 세계 수준에 다가가고 있다.

더팩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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