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일의 코리언 레전드]<11> '히말라야 신화' 엄홍길, 해군 UDT 모집에 "내가 갈 곳"…ⓛ편
  • 김용일 기자
  • 입력: 2011.08.19 11:17 / 수정: 2011.08.19 11:17

▲ 엄홍길은 전설이 돼 돌아왔다
▲ 엄홍길은 전설이 돼 돌아왔다

누군가는 산과 인생을 동의어쯤으로 해석한다. 산을 타면 인생을 타는 느낌이라고 한다. 지도에 등산로가 나와 있지만 직접 올라보지 않고서는 산의 참 맛을 알 수 없다. 누구나 자신에게 맞는 과업, 즉 인생의 등산로를 갖고 있다. 살면서 만날 시련이나 기쁨의 구체적인 그림은 알 수 없기에 인생의 등산로도 걸어봐야 참 맛을 알 수 있다.

엄홍길(51)의 인생 등산로는 무척이나 이채롭고 격렬했다. 그렇기에 어느 누구보다 가슴이 뜨거웠다. 히말라야 8천 미터 14좌에 이어 로체샤르(8400m)와 얄룽캉(8505m) 등 로체(8511m)와 캉첸중가(8586m) 위성봉마저 오른 세계 최초의 산악인이 되기까지. 22년 동안 무려 38번의 도전을 시도했다. 그 과정에서 후배 6명, 셰르파 4명을 잃었다.

어느 덧 엄홍길이라는 이름은 그 자체가 산이 됐다. 풍상을 견딘 지리산 고사목 같은 탄탄한 신체와 북한산의 부드러운 능선처럼 포근해진 눈매. 모든 것을 포용할 것 같은 너른 한라산의 마음과 머리를 지녔다. 이제는 오늘날의 자신을 만들어 준 동료 산악인과 셰르파 유족을 돕고, 그를 정상으로 이끌어 준 히말라야 산에게 진 빚을 갚으며 살고 있다.

▲ 엄홍길 휴먼재단 상임이사
▲ 엄홍길 휴먼재단 상임이사


글쓴이는 17일 동국대학교 인근 엄홍길 휴먼재단에서 '코리언 레전드' 11번째 주인공인 엄홍길 대장을 만났다. "난 전설이 아닌데…(웃음). 코리언 레전드에 선정됐다는 소식에 행복하고 반가울 뿐입니다"라며 먼저 말을 건넨 엄 대장은 아버지 같은 인자한 미소로 글쓴이를 맞아주었다. 편안함 속 전설의 아우라가 느껴지는 것도 과언이 아니었다.

◆ '휴먼재단 설립'…유가족 도와 네팔 오지에 학교 세우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몸이다. 대한산악연맹 대회협력위원장, 푸르메재단과 서울복지재단, 한국토지공사, 기상청 홍보대사. 밀레 상무이사 겸 엄홍길 휴먼재단의 상임이사직까지. 바쁜 일정으로 최근까지 역임한 상명대학교 석좌교수 자리를 내놓았다. 그의 삶의 17번째 히말라야 등정으로 여기고 있는 휴먼재단 사업에 올인 하기 위해서였다.

- 휴먼재단 사업의 의미는 정확히 무엇인가요.

인생의 마지막 도전이죠.(웃음) 22년 동안 히말라야 8천 미터를 포함해 16좌를 오르면서 젊음의 모든 것을 바치지 않았습니까? 히말라야가 나를 받아주기까지 형용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이 도움을 주신 분들이 많죠. 나의 모든 꿈을 이루게 해준 분들에게 진 빚을 갚고 싶은 바람이 담겨졌어요.

▲ 엄홍길 대장의 미소에서 산 내음이 전해졌다
▲ 엄홍길 대장의 미소에서 산 내음이 전해졌다


- 휴먼재단의 설립 과정은 어떻게 되나요?

재단 설립은 언제나 마음속에 품고 있었어요. 주변 사람들에게도 자주 이야기 했었죠. 때마침 2007년 국내 한 문화재단에서 특별 공로상을 수상하면서 상금을 받았어요. 당시 상금을 재단 운영비로 사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즉, 하늘이 나에게 '빨리 시작하라'고 주신 상으로 여겼어요.(웃음)

- 지금까지 휴먼재단의 사업성과에 대해서 만족하시나요.

2008년 5월 28일에 창립이 돼 첫 번째 사업은 네팔 히말라야 오지 팡보체 마을에 초등학교를 건립하는 것이었죠. 2009년 5월에 기공식을 가졌는데, 이후 많은 분들의 관심이 밀알이 돼 지난해 타르푸, 팡보체. 올해 타르푸, 룸비니 지역까지 초등학교 기공식과 준공식을 했어요. 이 밖에도 개발도상국에 의료 지원 사업, 국내외 청소년 교육 및 소외계층 지원 사업을 하고 있죠. 욕심만큼 빠르게 진행하지는 못했어요. 하지만 8천 미터 산을 올랐듯이 한 걸음, 한 걸음 힘을 모으고 있죠. 이제는 인생의 8천 미터에 도전하는 기분입니다.

▲ 타고난 산 꾼이었던 엄홍길 대장
▲ 타고난 산 꾼이었던 엄홍길 대장


◆ '40년 산 꾼' 엄홍길, 아파트 살았을 때 몸이 '갑갑'

1960년 경남 고성에서 2남 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세 살 때 부모를 따라 의정부시 호원동에 위치한 도봉산 망월사계곡으로 이사했다. 산은 유년시절부터 놀이터요, 벗이었다. 고교시절까지 학교를 다닐 때도 매일 같이 산을 오르내렸다.

- 산에서 40년을 사셨어요. 2000년 이후에야 평지로 내려오셨다던데.

2000년 이후 아파트에서 살았는데 도저히 적응이 안 되더라고요. 갑갑하고, 고생했죠. 사실 어린 시절에 산에 살 때는 부모님 원망을 무척 했었어요.(웃음) 그런데 환경은 무시하지 못하겠더라고요. 어느 순간 산이라는 존재가 내 마음에 크게 자리했어요. 산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데…. 이야, 빨려들더라고요.(웃음)

- 중학교 때 클라이밍(암벽등반)을 하셨다고 들었어요.

도봉산에 큰 바위가 있었어요. 주말이 되면 암벽 등반을 위해 산악인들이 많이 찾아왔었죠. 어렸을 때부터 그런 광경을 보고 자라니까 (암벽등반이) 놀이처럼 인식이 됐죠. 두려움도 없었고요. 산을 많이 탔기에 이미 몸은 암벽 등반을 할 수 있도록 갖춰졌죠.(웃음)

▲ 도봉산 자락은 그의 꿈의 날개를 심어준 보금자리였다
▲ 도봉산 자락은 그의 꿈의 날개를 심어준 보금자리였다


- 학창 시절은 어떠셨나요. 부모님께서 산 오르는 것에 걱정하시지 않으셨는지.

자연 속에서 성장을 하다 보니 신체가 튼튼했죠. 다른 친구들보다 힘도 좋고, 운동을 즐겨했어요. (나쁜 친구들 손 좀 봐주셨나요?) 물론이죠.(웃음) 부모님께서는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산에만 오른다고 걱정을 하셨죠. 하지만 제 인생을 산에 걸어야겠다는 의지를 잘 받아주셨죠.

엄홍길은 어린 시절부터 배낭 멘 이들과 어울려 지냈다. 양주고 시절 바위 꾼을 만나며 본격적인 산 꾼이 됐다. 1979년 고교 졸업 후 설악산에 들어가 희운각 대피소에서 2년간 생활하며 물품을 지어 날라주기도 했다. 꿈같은 생활이었다.

◆ '해군 UDT 출신'…히말라야 16좌 등정의 숨은 원동력

▲ 2000년 캉첸중가(8,586m) 등반에 성공하고 귀국한엄홍길(왼쪽에서 네 번째)
▲ 2000년 캉첸중가(8,586m) 등반에 성공하고 귀국한
엄홍길(왼쪽에서 네 번째)


- 대장님께서 해군 수중폭파대(UDT) 출신인 것을 모르시는 분들이 많던데요.

그렇겠죠.(웃음) 어릴 때부터 산에서만 생활을 했잖아요? 본래 호기심도 많고, 도전적이고 모험적인 성향이 강했죠. 편안하고 안주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어요. 군대 갈 나이가 되면서 무언가 색다른 경험을 하고 싶었죠. 어차피 가야할 군대라면 산이 아닌 바다로 가보고 싶었어요.(웃음)

- 해군에 입대하셨는데, 복무 도중 UDT로 재 지원하셨다고요?

해군에서 4개월 교육을 마치고 11명의 전우들과 배를 탔죠. 그런데 재미가 없더라고요. 조그마한 배에서 가만히만 있었죠. 배에서만 오래 생활을 하다 보니 숙식을 알아서 해결을 해야 하는데, 제가 막내니까 취사병 역할을 하게 됐어요.(웃음) 바다를 지키러 왔는데 요리나 시키고, 음식 냄새나 맡으니까…(웃음). 그러던 어느 날 배가 고장이 나서 대기 발령 상태로 있는데 우연히 UDT 모집 현수막을 봤죠. 내용을 쭉 훑어보고 나니 '아, 이곳이 내가 가야할 곳이다'라는 생각이 딱 들었어요.(웃음)

- UDT 생활은 어떠셨어요? 산 꾼 생활이 도움이 되셨나요.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았죠.(웃음) 훈련 받을 때는 교관들의 몸이 됐죠. UDT 입소 후 6개월 교육 훈련을 받았을 때는 정말 아침에 눈을 뜨면 그만두고 싶었죠. '하루만 더, 하루만' 이런 식으로 버텨냈죠. 얼차려를 받지 않으면 잠이 안 왔다니까요.(웃음).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산을 타면서 기초 체력은 남들보다 좋았어요. 큰 도움이 됐죠.

▲ 해군 UDT를 자원 입대한 그는 전역 이후 본격적인 고산 도전에나섰다
▲ 해군 UDT를 자원 입대한 그는 전역 이후 본격적인 고산 도전에
나섰다


◆ 고산 첫 도전 '참패' 후 동료 죽음까지 "성공의 디딤돌된 것"

혹독한 군 생활을 이겨낸 엄홍길은 전역 후 본격적인 고산 도전을 결심했다. 정신은 어느 때보다 무장됐고, 육체는 강철처럼 단단해졌다. 평생 산 꾼으로 살아야겠다고 결심한 그에게 히말라야 등반은 1985년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부터 시작됐다.

- 당시 대장님의 나이에서 고산 도전을 결심한 것 자체가 놀라운데요.

처음에는 그 정도까지 생각한 것이 아니었죠. 국내에서 여러 산들을 오르내리면서 내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에베레스트를 갔죠. 여러 실패를 겪고 성공을 맛보면서 10년 후인 1995년쯤 '아, 나도 할 수 있겠구나. 한번 해보자'고 확고히 결심을 했어요.

설악산 네 개 이상을 합친 높이. ‘그 까지 것’이라는 자신감으로 도전했다. 그러나 첫 원정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약간의 바람만 휘몰아쳐도 꼼짝 못하는 자기 자신에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듬해 겨울, 두 번째 도전에서는 동료까지 잃으며 처참하게 하산했다.

▲ 산을 사랑한 그에게도 동료의 죽음은 익숙하지 않았다
▲ 산을 사랑한 그에게도 동료의 죽음은 익숙하지 않았다


- 같이 오르던 동료의 죽음을 보는 것은 익숙하지 않으셨죠?

당시(1986년) 제가 먼저 빙벽을 올라갔는데 나중에 무전기로 연락이 왔어요. 우리를 도와주던 셰르파가 사고가 났다고요. 빙벽을 내려오는데 중간에 그 친구 배낭이 벗겨져 있고 옷가지도 찢겨서 걸쳐져 있더라고요. 눈 곳곳에는 핏자국도 있었고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인간의 죽음을, 그것도 동료의 처참한 현장을 보고 엄청 후회했죠. 다시는 산을 쳐다보지 않겠다고 다짐했고요.

-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엄홍길, 네가 산을 떠날 수 있을 것 같아?'라는 무언의 메시지였죠. 목표가 자꾸 나를 흔들었고요. 꼭 해내야겠다는 신념과 의지, 희망을 잃지 않게 되더라고요. 그 친구가 그 곳에 잠들었는데 오기가 생겼죠. 결국 1988년 세 번째 도전 만에 성공을 했어요. 만약에 처음부터 성공하며 승승장구 했다면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지 몰라요. 생사를 넘나들며 시련과 고통을 겪은 끝에 성공을 맛봤기에 이후에도 해낼 수 있었죠. <①편 끝>…②편(8월 26일)에서는 엄홍길의 히말라야 등정 이야기, 오은선 논란에 대한 사견, 산악 인생의 비전 등이 이어집니다.

<글 = 김용일 기자, 사진 = 노시훈 기자>
더팩트 스포츠기획취재팀 기자 kyi0486@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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