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일의 코리언 레전드]<2> ‘탁구여왕’ 현정화 “北 이분희가 편지 전해” 깜짝 고백…①편
입력: 2011.04.27 10:11 / 수정: 2011.04.27 13:43

'처음'이라는 단어처럼 많은 의미가 부여된 것도 없지 않을까? 처음 학교에 간 날, 처음 여행한 곳, 처음 사랑을 고백한 날까지…. '처음'은 우리 마음 속에 애틋하고 설레는 추억으로 남아 꼭 기억하고자 다짐하는 아름다움이 되곤 한다.

하지만 여기 잊혀진 ‘처음’이 하나 있다. 1991년 4월 29일 남북한 7천만의 시선이 자그마한 탁구공 하나에 모아졌다. 분단 46년 만에 처음으로 남북 대표 선수들이 단일팀을 구성해 하나의 깃발을 들고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해 여자 단체전 결승에 올랐다. 리분희, 유순복(이상 북측), 현정화(남측)로 구성된 '코리아'는 세계 최강 중국과 3시간 40분의 혈투를 벌인 끝에 3-2로 승리해 금메달을 차지했다.

'코리아'라는 이름 아래 한반도 지도를 단기, 아리랑을 단가로 한 사상 '첫' 남북 스포츠 드라마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을 남긴 채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았다.

▲ 선머슴같던 탁구 유망주는 어느덧 전설이 됐다.
▲ 선머슴같던 탁구 유망주는 어느덧 '전설'이 됐다.

첫 남북 스포츠 드라마의 중심에 서 있던 현정화는 한국 탁구의 전설이다.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단식 세계 챔피언 자리에 올랐고 여자복식, 혼합복식, 단체전 등 여자 선수가 출전 할 수 있는 세계선수권대회의 모든 세부 종목에서 우승을 거머쥐며 그랜드슬램을 이뤘다.

지난 19일 안양 농심공장 체육관에서 대한탁구협회 전무이사이자 한국 마사회 탁구팀 사령탑인 현정화(42) 감독을 만났다. <코리언 레전드>의 두 번째 주인공인 현 감독에게 찬란했던 20년 탁구 이야기를 들어 봤다.

▲ 현정화 대한탁구협회 전무이사 겸 한국마사회 탁구단 감독
▲ 현정화 대한탁구협회 전무이사 겸 한국마사회 탁구단 감독

◆ 인기 비결? "제 딸이 김연아를 기억하듯, 어른들도…"

"전설이요? 그런 말까지는 못 들었어요.(웃음) 제 밑으로 10년, 위로 20년까지 저의 선수 시절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시죠. 제 딸이 11살인데 나중에 커서 피겨스케이팅의 김연아 선수를 기억할 것 같아요. 그것과 비슷해요. 제가 열살 때부터 선수로 활약했는데 50~60대 어르신들은 저를 또렷하게 기억하시죠."

레전드에 선정된 소감에 현 감독은 겸손하고도 담담한 한마디를 건넸다. "80년대를 돌이켜보면 지금보다 생활이 어려웠잖아요? 문화적으로 재미있는 일도 많지 않았죠. 그런 분위기에서 86년 서울 아시안게임, 88년 서울 올림픽에 이어 91년에 지바 세계선수권대회까지 탁구가 연일 승전보를 전했어요. 그래서 더 사랑해주셨죠."

▲ 초등학교 3학년 때 우연히 잡은 탁구채는 현정화의 운명을 뒤바꿔 놓았다.
▲ 초등학교 3학년 때 우연히 잡은 탁구채는 현정화의 운명을 뒤바꿔 놓았다.

▲ 86년 아시안게임, 88년 서울 올림픽은 현정화 신화의 예열에 불과했다.
▲ 86년 아시안게임, 88년 서울 올림픽은 '현정화 신화'의 예열에 불과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우연히 등하교 길에 찾게 된 탁구부는 현 감독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가볍게 잡아 본 탁구채를 통해 탁구의 재미에 운명처럼 빠져들었다. 그리고 초등학교 6학년 때 첫 우승을 맛봤다. 이후 중학교 3학년 때 영국 주니어오픈에서 4개(단식, 복식, 혼합복식, 단체전) 부문을 모두 휩쓸며 '천재'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탁구 선수셨어요. 어머니는 딸을 운동시키지 않으려고 하셨죠. 그런데 4관왕을 하고 오니까 받아들이셨어요.(웃음) 당시에는 운동선수에 대해 '배고프다', '머리가 나쁘다' 등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했죠. 그런데 머리가 나쁘면 운동도 잘할 수 없어요. 물론 그 당시에는 환경이 매우 어려웠죠. 또 제가 부모가 돼 보니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하겠더라고요.(웃음)"

▲ 인터뷰 중인 현정화 감독 / ⓒ 노시훈 기자
▲ 인터뷰 중인 현정화 감독 / ⓒ 노시훈 기자

◆ '올림픽 챔피언' 현정화…"'떨림'이 그대로 살아 있어"

타고난 승부욕에 천재적인 기량까지. 현정화의 탁구 인생은 탄탄대로였다. 1986년 아시안게임 우승으로 예열을 마치더니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는 몽골에서 선교사 활동을 하고 있는 양영자(44)와 호흡을 맞춰 금메달을 획득했다.

"1등을 했다는 것보다 수많은 관중 속에서 경기를 했다는 '떨림'이 아직도 살아 있어요. 그리고 저는 성취감을 중요시하는데, 어린 나이에 부담을 많이 받았잖아요? 그런데 해냈어요. 당시에는 중국 탁구를 이긴다고 감히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중국을 이기니까 정말 신기했죠."

▲ 88 서울올림픽 금메달 콤비 양영자(왼쪽)와 현정화
▲ 88 서울올림픽 '금메달 콤비' 양영자(왼쪽)와 현정화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현정화-양영자 콤비는 1987년 뉴델리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다이리리-리후이펀 조를 꺾고 우승하는 등 메달 전망을 한층 높였다. 중국은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특이하게도 왼손잡이들인 자오즈민-천징 조를 결성해 대회에 내보냈다. 양영자와 호흡을 맞춘 현정화는 첫 세트만 20-22로 내줬을 뿐 2, 3세트를 21-8, 21-9로 가볍게 잡아 올림픽 여자 복식 초대 챔피언이 됐다.

"서울 대회 때 탁구가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어요. 올림픽을 앞두고 'D-365'라는 전광판을 하나씩 넘기면서 훈련했죠. 힘들었지만 전 정말 행복했어요. 좋은 선수들과 함께 훈련한다는 것과 내 기술이 계속 발전하고 있다는 것, 탁구라는 것이 정말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 지난 세월을 회고하는 현정화 감독 / ⓒ 노시훈 기자
▲ 지난 세월을 회고하는 현정화 감독 / ⓒ 노시훈 기자

◆ '통일의 신혼여행' 남북 단일팀…감동의 46일 드라마

현 감독 탁구 인생의 특별한 추억은 1991년 지바에서 만들어졌다. 1990년 10월 평양과 서울을 오가며 열린 '남북통일축구경기'를 계기로 달아오른 남북 스포츠 교류 분위기 속에서 1991년 2월 탁구 남북 단일팀 구성 논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곧 이어 구성된 남북 단일팀 '코리아' 선수단은 세계선수권대회에 대비해 나가노, 나가오카, 지바로 옮겨 다니며 전지훈련을 했다.

"정말 단일팀이 만들어질까 생각했죠.(웃음) 그런데 정말 성사되니까 얼떨떨했어요. 일본에서 한 달 동안 훈련했는데 늘 상대 선수로 만났던 친구들이라 어색했지만 호감이 있었기에 금세 잘 지낼 수 있었죠. 숙소는 우리가 5층을 쓰고, 북한 선수들이 7층을 썼어요. 당시에는 남북 관계가 워낙 무거웠잖아요? 그래도 훈련할 때, 식사할 때 늘 함께 다니면서 친해질 수 있었어요."

'코리아'는 여자 단체전 결승에서 세계 최강 덩야핑이 버티고 있는 중국과 혈투 끝에 3-2 기적 같은 승리를 이뤄 냈다. 게임 스코어 2-2로 맞선 가운데 북측 선수인 유순복이 가오준을 2-0으로 꺾고 우승을 확정짓자 현정화도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끌어 앉았다. 관중석에서는 푸른 한반도 깃발이 넘실거렸고 남북 응원단은 아리랑을 목청껏 불러 댔다.

▲ 1991년 지바 세계선수권대회 코리아여자 단체팀 홍차옥, 유순복, 현정화, 리분희 (왼쪽부터)
▲ 1991년 지바 세계선수권대회 '코리아'여자 단체팀 홍차옥, 유순복, 현정화, 리분희 (왼쪽부터)

"제가 당시에도 참 냉정하기로 소문이 났었어요. 잘 웃지도 울지도 않는다고요. 그런데 우승을 확정한 순간 우리 테이블로 세계 모든 언론이 모여들었죠. 막 쓰러지고 난리가 아니었어요. 그 화면을 보면 지금도 눈물이 날 정도예요. 나도 그랬지만 지금의 60~70대 어르신들처럼 한국전쟁을 겪으신 분들은 통일의 느낌을 받으셨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그랬어요."

이 우승은 역대 남북 교류 역사의 최고의 순간으로 회자되고 있다. 지바의 황홀한 추억은 민족의 최대 과제인 통일에 대한 열망과 가능성을 보여 준 첫 사례였다. 현정화와 리분희가 서울과 평양으로 각각 돌아갈 때 손수건을 적시던 장면은 아직도 국민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돼 있다.

▲ 현정화(왼쪽 사진 왼쪽, 오른쪽 사진 오른쪽)와 리분희는 시대의 라이벌이자 46일 간의 동반자였다
▲ 현정화(왼쪽 사진 왼쪽, 오른쪽 사진 오른쪽)와 리분희는 시대의 라이벌이자 46일 간의 동반자였다

◆ "北 이분희, 얼마 전 나에게 편지 썼다" 깜짝 고백

헤어져 있던 46년의 시간에 비해 46일 간의 만남은 턱없이 짧았다. 1973년 사라예보 세계선수권대회 이후 18년 만에 다시 찾은 코리비용컵(여자 단체전 우승컵)은 분단된 조국의 현실을 또다시 상징했다. 우승컵은 함께 보관할 수 없는 현실로 남북 양측이 1년씩 보관한 뒤 반환했다.

"(리분희에게) '잘 가'라는 말 밖에 못하겠더라고요. 그렇잖아요? '편지할게, 전화할게'라는 말을 할 수 없잖아요. 결국 2년 뒤에는 다시 적으로 만났어요. 어린 마음에도 왜 이러한 아픔을 주는지 힘들었어요. 둘도 없는 형제인데 다시 만나니 적으로 변해 있었어요."

▲ 1991년 지바 세계선수권대회 때를 설명하고 있는 현정화 감독 / ⓒ 노시훈 기자
▲ 1991년 지바 세계선수권대회 때를 설명하고 있는 현정화 감독 / ⓒ 노시훈 기자

리분희는 당시 북한 여자 탁구의 간판 스타였지만 단일팀 생활을 하면서 묵묵하게 자기 할 일을 했다. 그런 리분희와 현정화가 함께한 46일의 시간은 짧지만 강렬했다.

"1993년 예테보리 세계선수권대회 이후 한번도 못 봤죠. 몸이 안 좋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지금은 탁구계를 떠나서 장애인 운동을 지도하는 일을 한다고 얼핏 들었어요. 지난해 광저우 장애인아시안게임 때 잠시 왔었다고 하더라고요. 아마 내년 런던 장애인올림픽 때 임원으로 올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꼭 한번 만나 보고 싶죠."

현정화는 깜짝 놀랄 만한 이야기를 전했다. "제가 얼마 전 영국 대사관 파티에 초청을 받아서 간 적이 있어요. 대사님하고 탁구도 쳤고요. 그런데 대사님이 얼마 전 북한을 다녀오셨다고 들었어요. 그리고 대사관 담당자 한 분이 (리) 분희 언니를 만났는데 언니가 저한테 전해 달라고 ‘편지 한 통’을 건넸다고 하더라고요. 깜짝 놀라서 혹시 배달 사고라도 날까 봐 제가 직접 받겠다고 했어요. 아직 받지는 못했는데, 20년 만에 편지로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요…." <①편 끝>

<글 = 김용일 기자, 사진 = 노시훈 기자>

kyi0486@tf.co.kr

발로 뛰는 <더팩트>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카카오톡: '더팩트제보' 검색
▶이메일: jebo@tf.co.kr
▶뉴스 홈페이지: http://talk.tf.co.kr/bbs/report/write
- 네이버 메인 더팩트 구독하고 [특종보자▶]
- 그곳이 알고싶냐? [영상보기▶]
AD
인기기사
실시간 TOP10
정치
경제
사회
연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