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오픈] 뉴욕에 내린 비, 파리에 내린 비
입력: 2017.06.06 04:00 / 수정: 2017.06.06 08:18
이형택과 정현
이형택과 정현

[더팩트 | 최정식 선임기자] 2014년 프랑스오픈 여자단식 4회전. 마리야 샤라포바(러시아)는 탈락 위기를 맞았다. 사만다 스토서(호주)에게 1세트를 3-6으로 내줬고 2세트 4-4에서 상대 서비스게임을 브레이크하지 못하면 지는 분위기였다.

스토서의 첫 서브는 폴트. 다시 서브를 넣으려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샤라포바 쪽 관중석의 한 팬이 휴대폰을 꺼두지 않았던 것이다. 샤라포바는 라켓을 들어올리며 스토서에게 기다려달라고 했다. 한껏 집중해 서브를 넣으려던 스토서는 멈출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다시 시도한 서브가 더블폴트가 되자 스토서는 분노를 터뜨렸다.

샤라포바는 상대 서비스게임을 브레이크하며 기사회생했고 결국 두번째 세트를 6-4로 따냈다. 샤라포바는 마지막 세트에서 단 한게임도 내주지않고 경기를 마무리하며 8강에 진출했다.

물론 전화벨 소리가 없었어도 샤라포바가 이겼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한번의 방해가 스토서의 집중력을 흐트려놓은 것은 틀림없다. 샤라포바는 이후 25포인트 가운데 20포인트를 따냈다. 갑자기 바뀐 경기 흐름에 당황한 스토서는 어이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스토서는 "상황이 어찌나 빨리 바뀌는지 내가 어떻게 경기하고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였다"고 말했다. 샤라포바는 "경기를 하다보면 상황이 바뀔 수 있다는 느낌이 오는 순간이 있다. 관중은 느끼지 못하지만 선수들은 알 수 있다. 오늘도 그런 경우였다"고 말했다.

같은 날 벌어진 남자단식 4회전에서는 타임아웃 논란이 있었다. 로저 페더러(스위스)와 에르네스츠 굴비스(라트비아)의 대결. 굴비스는 4세트 2-5로 뒤진 상황에서 허리와 허벅지가 불편하다며 메디컬 타임아웃을 요청했다.

문제는 굴비스가 7분간의 인저리 타임을 갖기 직전 페더러의 페이스가 살아나고 있었다는데 있다. 세트 스코어 1-2로 뒤지고 있었지만 경기의 주도권은 페더러가 잡고 있었다. 페더러는 자신의 서비스게임 직전 갑자기 경기가 중단된 뒤 혼자 계속 움직이며 몸이 식지않도록 애썼다.

그러나 경기가 재개된 이후 6게임 가운데 5게임을 내주고 말았다. 4세트는 따냈지만 결국 세트스코어 2-3으로 패배했다. 페더러는 경기가 끝난 뒤 "요즘은 예전처럼 메디컬 타임아웃을 악용하는 일이 많지 않지만 여전히 벌어지곤 한다"면서 "그는 별로 아파보이지 않았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승부에는 흐름이 있다. 그 흐름에 따라 승자와 패자가 갈린다. 일방적으로 끝나는 경기도 있지만 대개는 흐름과 결과를 바꿔놓을 수 있는 전환점이 있다. 그리고 때로는 경기 외적인 요인이 그런 터닝포인트가 되기도 한다.

정현(세계 67위)이 4일 열린 프랑스오픈 남자단식 3회전에서 니시코리 게이(9위, 일본)과 풀세트 접전 끝에 2-3(5-7 4-6 7-6 6-0 4-6)으로 져 16강 진출에 실패했다. 아쉬운 것은 경기의 흐름이 완전히 바뀌는 상황에서 중단됐다가 다음날 다시 시작했다는 점이다.

정현은 3일 경기에서 1,2세트를 내줬으나 3세트를 타이브레이크 대결 끝에 따냈다. 이후 분위기가 바뀌며 정현이 4세트에서 니시코리의 게임을 잇따라 브레이크, 3-0으로 리드했다. 니시코리는 자신의 게임을 내주자 라켓을 바닥에 내동댕이치는 등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고, 메디컬 타임아웃을 요청했다. 허리가 아프기도 했지만 갑자기 바뀐 흐름을 일단 끊으려는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빗방울이 굵어지면서 경기가 중단됐고 결국 다음날로 연기됐다. 니시코리는 속개된 경기에서 4세트를 의도적으로 포기했고 5세트에 집중해 승자가 됐다.

벨소리와 타임아웃이 샤라포바와 굴비스를 살린 것처럼, 갑자기 쏟아진 비가 니시코리를 살린 것이 아닐까? 니시코리는 경기 후 "비로 경기가 중단된 것은 행운이었다. 통증이 있었는데 회복할 시간을 벌었다. 운이 따랐다"고 말했다. 정현은 "어제 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그렇다 해도 결과가 달랐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한국 남자 선수 가운데 가장 높은 세계랭킹(36위)을 기록한 이형택은 17년 전 US오픈에서 아무도 예상치 못한 놀라운 성적을 냈다. 예선을 거쳐 승승장구하며 16강까지 오른 것이다. 그때 그의 랭킹은 182위였다. 8강 진출을 다툰 상대는 세계 최고의 선수 가운데 하나였던 피트 샘프러스(당시 4위, 미국). 일방적인 경기가 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1세트를 타이브레이크 끝에 내주는 등 선전했다.

2세트 다섯 번째 게임을 맞았을 때 플러싱메도에 폭우가 쏟아져 경기가 중단됐다. 첫 세트에 땀이 나면서 컨디션이 좋아졌던 이형택은 경기가 중단돼 땀이 식은데다 다시 경기가 시작된 뒤 바람이 불어 몸이 굳으면서 컨디션이 나빠졌다. 반면 초반에 고전했던 샘프러스는 서브의 위력이 살아나면서 여유있게 2,3세트를 따내고 승리했다.

이형택의 경우는 정현과 좀 다르다. 타이브레이크에서 졌고, 2세트 경기가 중단되기 전 게임 스코어 1-3으로 뒤진 상황이었다. 자신에게 유리한 흐름이 끊긴 것은 아니었다. 이형택도 비가 내려 경기가 중단된 것보다는 타이브레이크를 내준 것을 아쉬워했다. 그러나 비만 아니었다면 이후에도 좀 더 좋은 승부를 펼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은 아쉽다.

이형택은 샘프러스와 경기 전날 밤 잠을 설쳤다고 했다. 그러나 샘프러스와 대결한 뒤에는 한 번도 상대가 강자이기 때문에 잠을 못 이룬 적이 없다. "세계 누구와 붙어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는 것이다.

만약 비가 내리지 않았다면 정현이 자신쪽으로 돌아선 경기 흐름을 이어가며 이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정현 자신의 말처럼 결과가 어떻게 됐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정현은 1세트 5-5에서 자신의 게임을 내줬고, 2세트 4-4에서도 브레이크를 허용했다. 그리고 마지막 5세트에서도 4-5에서 서비스게임을 놓쳤다. 거의 대등한 대결을 펼쳤지만 고비에서 기술과 경험의 차이가 드러난 것이다.

2000년 처음으로 샘프러스 같은 강자를 만났던 이형택과 달리 정현은 니시코리 이전에도 노바크 조코비치(2위, 세르비아) 등 강자들을 상대했다. 그런 그에게도 니시코리와 대결은 좋은 경험이 됐다.

2회전 경기를 치르며 어깨와 허리 부상이 있었고, 정현과 경기에서 앞서다가 추격을 당해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든 상태였던 니시코리는 경기 운영 방법을 바꾸는 등의 노력으로 위기를 넘겼다. 상대에게 배운 점이 있을 것이다.

정현 스스로도 돌출 변수에 좀 더 잘 대처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을 것이다. 비 때문에 좋은 흐름이 끊기는 상황마저도 이겨낼 수 있어야 톱 랭커로 올라설 수 있다.
malishi@tf.co.kr

발로 뛰는 <더팩트>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카카오톡: '더팩트제보' 검색
▶이메일: jebo@tf.co.kr
▶뉴스 홈페이지: http://talk.tf.co.kr/bbs/report/write
- 네이버 메인 더팩트 구독하고 [특종보자▶]
- 그곳이 알고싶냐? [영상보기▶]
AD
인기기사
실시간 TOP10
정치
경제
사회
연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