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철의 스포츠 뒤집기] 한국 스포츠 종목별 발전사-야구(3)
입력: 2015.05.09 08:00 / 수정: 2015.05.09 09:08
지난해 12월 2014 한국야쿠르트 세븐 프로야구 골든글러브 시상식 수상자들이 포토타임을 가졌다. / 배정한 기자
지난해 12월 '2014 한국야쿠르트 세븐 프로야구 골든글러브 시상식' 수상자들이 포토타임을 가졌다. / 배정한 기자


제 2회 전조선야구대회에 우리나라 야구 초창기 강호 배재고보는 중학단은 물론 청년단에도 출전하지 못했다. 제 1회 전조선소년야구대회에서 불상사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대신 배재 관계 야구인들은 반도구락부라는 이름으로 청년단에 출전해 우승을 차지했다. 전경신과 치른 결승전 3회 초 반도구락부 공격 때 전경신의 투수가 보크를 범했다는 심판 판정에 전경신 측이 불복 항의해 큰소리가 오가자 심판이 몰수 게임을 선언하는 바람에 반도구락부가 우승했다. 중학단 결승에서는 경신학교가 청년단의 전경신이 몰수 게임 당한 것에 불만을 품고 기권했기 때문에 휘문고보가 부전으로 우승했다. 구락부(俱樂部)가 클럽의 음역어라는 건 1편에서 소개한 바 있다.

조선체육회와 각 학교 관계자 사이에서는 배재고보에 대한 5년 출전 금지는 지나치게 가혹하다는 동정론이 돌았고(2편 참조) 조선체육회 이사회 결의와 교장들의 태도 완화로 1922년 9월 21일 배재고보에 대한 제재가 풀렸다. 당시 배재고보에 대한 제재는 경기장 시설이 매우 열악했던 시절, 단지 한 학교에 대한 징계로 그치지 않고 경기장 이용에 매우 불편을 느껴야 되는 심각한 문제였고 더구나 스포츠 강호 배재의 경기 불참은 경기 수준 향상 측면에서도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징계가 풀리자 배재는 10월 14일 자기 학교 운동장에서 막을 올린 제 3회 전조선야구대회에 출전했다. 이 대회 중학단에는 평양의 숭실중학, 개성의 송도고보, 대구의 계성학교, 정주의 오산학교 그리고 서울의 경신학교와 휘문고보, 배재고보, 중앙고보 등 8개 팀이 나섰다. 청년단에는 연희전문(오늘날의 연세대학교)과 배재구락부, 중앙체육단, 대구청년단, 반도구락부, 숭실구락부 등 6개 팀이 참가했다.

중학단 결승에서는 배재고보가 숭실중학을 5-2로 꺾고 우승했다. 청년단 결승에서는 중앙체육단이 배재구락부를 12-5로 크게 물리치고 패권을 안았다.

당시 동아일보는 불상사를 예방하기 위해 ‘선수들의 인격을 믿는다’라는 제목으로 “참가 선수들은 원래 운동을 사랑하며 규율과 질서를 존중하는 사람들이라 한때의 혈기로 못난 행위를 할 까닭이 없겠지만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스스로가 대회를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노력해 주기 바란다. 또 응원단이나 일반 관중들도 우리의 운동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회 규정에 따라 질서를 지켜 주기 바란다”는 내용의 기사를 썼다. 주최 측이나 후원 언론사가 대회 불상사에 대해 얼마나 걱정하고 있었는지 짐작이 갈 만하다.
이 대회가 끝난 뒤 박석윤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이라고 할 수 있는 대회 관전기를 10월 21일부터 11월 3일까지 11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연재했다. 박석윤은 일본의 명문 제 3고교와 도쿄제국대학(오늘날의 도쿄대학)의 명투수로 활약했던 야구인이다. 박석윤은 1922년 3월 유억겸과 함께 도쿄제국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귀국한 엘리트 가운데 엘리트였다. 유억겸은 귀국 즉시 연희전문의 학감으로 취임했고 뒷날 조선체육회 이사, 부회장을 거쳐 회장 자리에 세 차례나 올라 우리나라 체육 발전에 공헌했다.

1922년 12월 8일 미국 프로 야구 올스타 팀이 처음으로 우리나라를 방문해 전조선군과 친선경기를 가졌다. 애초 미국 프로 야구 올스타 팀은 10월 3일 일본에 도착해 경기를 가진 뒤 12월 4일 나가사키항을 떠나 상하이로 가도록 일정이 짜여 있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조선체육회 이사 이원용이 고원훈 회장의 양해 아래 체육회 돈 200원을 여비로 받아 혼자 도쿄로 가서 요미우리신문사 운동부장의 소개로 미국 프로 야구 올스타 팀 감독인 헌터를 만나 대전료 1천 원과 서울 체재비를 부담하는 조건으로 초청 계약의 윤곽을 잡아 놓고 1주일 만에 돌아왔다.

이원용은 미국 프로 야구 올스타 팀 초청 건을 체육회 이사회에 올렸으나 이사장인 임경재, 이사 박우병 등이 “체육회가 프로팀을 초청할 수는 없다”고 강력히 반대하는 바람에 초청 안이 부결됐다. 이제는 올림픽에서도 프로 선수들이 뛰고 있지만 아마추어리즘이 엄격하게 준수돼야 한다는 주장이 강력했던 시절이라 아마추어와 프로의 교류는 비록 친선경기여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이다.

미국 프로 야구 올스타팀 초청 안이 체육회 이사회에서 부결되자 이원용은 체육회 이사직을 사임하고 개인 자격으로 미국 프로 야구 올스타팀을 초청하기로 결심했다. 이원용은 동일은행 행장 민대식으로 부터 500원을 빌려 박석윤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헌터 감독을 다시 만나 초청 계약을 맺고 내한 일정도 짰다. 이때 동아일보는 안창남 조종사의 고국 방문 비행 행사를 치르느라 재정이 모자라 후원할 수가 없어 결국 명목상의 주최는 조선일보가 맡기로 했다.

경기장은 철도국의 호의로 사용료를 내지 않고 용산철도국 운동장을 쓰기로 했고 입장료는 지정석 5원, 1등석 3원, 2등석 2원, 3등석 1원, 학생은 50전이었다. 1920년대 단성사(최근 까지 영화관으로 사용됐다)와 우미관(드라마 ‘야인시대’에 등장한 곳) 등 서울 시내 영화관 입장료가 40~50전 정도였고 고급 만년필이 10전인 당시 물가를 보면 꽤 비싼 가격이었다.

경기에서는 미국 프로 야구 올스타 팀이 20개의 장·단타를 날려 전조선군을 23-3으로 완파했다. 대회 수입 1천700원으로 미국 프로 야구 올스타 팀의 출전료와 조선호텔 숙박비, 환영연 비용 등에 사용했고 동일은행에 진 빚 500원은 뒷날 이원용과 박석윤이 갚았다.
<계속>

더팩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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