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철의 스포츠 뒤집기] 공부하는 운동선수 육성 정책에 박차를…
입력: 2015.04.18 08:00 / 수정: 2015.04.17 15:12
미녀 골퍼 미셸 위가 2012년 미국 서부 지역의 명문 스탠퍼드대학교를 졸업한 사실이 알려졌다. / 더팩트 DB
'미녀 골퍼' 미셸 위가 2012년 미국 서부 지역의 명문 스탠퍼드대학교를 졸업한 사실이 알려졌다. / 더팩트 DB


글쓴이는 최근 박영길 롯데 자이언츠 초대 감독을 만난 적이 있다. 박 전 감독은 이 자리에서 귀를 의심할 만한 얘기를 했다. 자신이 서울대학교에 지원했었다는 것이다. 물론 낙방했지만. 박 전 감독은 평준화 이전 부산 지역의 명문교인 경남중학교와 경남고등학교도 모두 시험을 쳐 입학했다고 한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시작한 야구 선수 생활을 하면서 요즘으로 치면 '특목고' 수준의 학교에 들어갔으니 쉽게 믿기 어렵다. 그러나 박 전 감독의 평소 언행을 보면 학창 시절 공부를 부지런히 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

요즘 스포츠계와 연예계에 걸쳐 화제를 모으고 있는 인물이 있다. 손연재의 직계 선배라고 할 수 있는 리듬체조 선수 출신인 신수지(2008년 베이징 올림픽 12위)다. 신수지는 은퇴 이후 프로 야구 시구자로 나서 리듬체조 동작을 응용한 ‘일루전 시구’로 국내는 물론 외국에서도 화제가 되는가 하면 방송 활동 틈틈이 볼링 훈련을 열심히 해 프로 볼러 테스트에 합격해 지난 3월에는 대회에 나서기도 했다. 신수지는 이제 리듬체조 선수가 아니고 볼링 선수다.

야구 선수들 가운데에는 은퇴한 뒤 골프 레슨 프로가 된 사례를 종종 볼 수 있다. 스윙 등 운동 동작이 야구가 골프와 비슷하기에 종목 전향이 비교적 쉽기 때문이다. 신수지와 몇몇 야구 선수 출신은 타고난 운동신경을 살려 은퇴 이후 제 2의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위 사례처럼 운동선수가 자신의 타고난 재능을 살려 제 2의 인생을 사는 게 가장 바람직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운동과 학업을 함께하며 은퇴 이후를 대비해야 한다.

2000년대 후반 미녀 골퍼로 국내외에 열풍을 일으켰던 재미동포 미셸 위는 투어 틈틈이 강의를 들으며 입학 6년 만인 2012년 미국 서부 지역의 명문 스탠퍼드대학교를 졸업했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미국 대학은 운동선수들의 학사 관리를 철저하게 한다. 1970년대 일이지만 글쓴이가 다닌 대학의 경우 모든 운동부 선수들이 기본 출석 일수를 채웠다. 그래야 학점을 받을 수 있었다. 강의실에서 자주 보게 되니 운동선수와 일반 학생이 친구가 되는 일이 자연스러웠다.

아무튼 미셸 위는 17살 때인 2006년 스탠퍼드대학교 입학이 결정됐다. 12살 때부터 아마추어 신분으로 미국 여자 프로 골프(LPGA) 투어에서 뛴 미셸 위는 2005년 프로로 전향한 뒤에도 운동과 공부를 함께 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미국에서는 인기 있는 4대 프로 스포츠(미식축구 야구 농구 아이스하키)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리는 대학 농구를 비롯해 대학 스포츠의 여러 종목에서 2학년을 마치고 중퇴하는 사례가 흔히 있다. 대개 프로 종목 선수들이다. 그러나 미셸 위는 '완주'했다.

아마추어 종목 선수들은 대체로 대학 4년 과정을 모두 마친다. 그리고 추가로 더 공부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1980년 레이크 플래시드(뉴욕주) 겨울철 올림픽에서 2014년 소치 대회까지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스피드스케이팅 남자부 모든 세부 종목(500m 1000m 1500m 5000m 1만m) 우승의 대기록을 세운 에릭 하이든(미국)이다. 여자부에서는 1964년 인스부르크 대회에서 옛 소련의 리디아 스코블리코바가 전관왕(500m 1000m 1500m 3000m)에 오른 적이 있다. 하이든은 그냥 5관왕이 아니었다. 모두 세부 종목에서 올림픽 신기록을 세웠다.

에릭 하이든은 1980년 헤렌벤(네덜란드)에서 열린 세계스피드스케이팅종합선수권대에서 네덜란드의 힐버트 반 더 두임에게 뒤져 2위를 기록한 뒤 매우 이른 나이인 22살 때 얼음판을 떠났다. 힐버트 반 더 두임은 그때를 기준으로 앞선 4년 동안 열린 국제 대회에서 에릭 하이든을 꺾은 유일한 선수였다. 에릭 하이든의 천재성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스케이트화는 벗었지만 에릭 하이든은 스포츠와 끈을 놓지 않았다. 이번에는 사이클이었다. 에릭 하이든은 빙판을 떠난 바로 그해 열린 모스크바 올림픽 미국 선발전에 출전했으나 성조기를 가슴에 다는 데 실패했다. 올림픽 출전권을 땄더라도 미국이 옛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한 항의로 대회에 불참해 동•하계 올림픽에 모두 출전하겠다는 꿈은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에릭 하이든은 이에 좌절하지 않고 1985년 전미프로사이클선수권대회에서 우승했다. 1986년에는 '투르 드 프랑스'에 도전했지만 경기 도중 다쳐 10대 초반부터 아버지의 적극적인 권유를 받아 미식축구와 아이스하키 등으로 시작한 스포츠와 인연을 끝냈다. 여기까지가 뛰어난 운동선수 에릭 하이든의 이력이다. 이제부터는 공부하는 에릭 하이든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운동과 함께 위스콘신대학교 매디슨 캠퍼스에서 대학생 생활을 시작한 에릭 하이든은 1991년 스탠퍼드대학교에서 의학 박사 학위를 받고 아버지 잭 하이든의 뒤를 이어 정형외과 전문의가 됐다. 하이든은 개업의이지만 WNBA(미국 여자 프로 농구), NBA(미국 프로 농구) 구단들과 2002년, 2006년 겨울철 올림픽 미국 스피드스케이팅선수단의 팀 닥터로 일하기도 했다.

운동선수 생활을 하면서 학업을 게을리한 사례 하나를 소개한다.

1982년 10월 말 일본 열도는 퍼시픽리그의 신흥 명문 세이부 라이온즈와 8년 만에 센트럴리그 1위를 차지한 주니치 드래건스의 일본시리즈로 달아오르고 있었다. 글쓴이는 일본시리즈 3~5차전이 벌어진 도코로자와에 있는 세이부 구장에서 전철로 연결되는 이케부쿠로역 근처에 있는 숙소 선술집에서 전직 프로 야구 선수와 우연한 만남을 가진 적이 있다. 선술집 주인의 소개로 만난 그는 1970년대 중반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3라운드쯤으로 지명된 투수였는데 3년 만에 퇴단했다고 했다. 선수층이 두꺼운 요미우리에서 살아남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명문 구단 요미우리가 지명권을 행사했을 정도니 아마추어 팀 코치 정도는 할 수 있는 실력이 있었지만 그는 아예 야구판을 떠났다고 한다. 이후 영어 학원을 비롯해 몇 종류의 기술 학원에 다녔다고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배운 건 야구밖에 없었으니 먹고살 길이 막막했다. 일본 고교 야구는 운동과 공부를 함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PL학원고를 비롯한 야구 명문교의 경우 야구 직업학교라고 보면 된다. 몇 년 전 우리 현실과 매우 닮아 있다.

그는 야구 선배의 도움으로 보험 회사에 취직했지만 입사 초기에는 업무에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업무도 제법 손에 익고 운동선수 출신 특유의 끈기와 돌파력으로 회사 안에서 제법 인정을 받게 됐지만 야구보다는 힘이 든다고 했다. 지금쯤 그는 보험 회사 임원이 돼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는 입사 초기보다 더 힘든 일들이 있었을 것이다.

최근 들어 운동과 학업을 함께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폭넓게 이뤄지고 있다. 글쓴이는 KBO(한국야구위원회)에서 발행하는 ‘더베이스볼’에 싣기 위해 3년 여 전부터 서울 시내 초등학교와 중학교 야구부를 취재하고 있는데, 모든 학교가 정규 수업을 마치고 훈련한다. 오전 수업조차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운동장으로 달려가던 때와는 학교 풍경이 완전히 다르다. 외국 원정에 나선 선수들과 동반한 기자가 입국 신고서를 대신 써 주는 일은 이제 옛이야기가 될 것이다. 공부하는 운동선수를 키우는 정책을 더욱 강하게 밀어붙여야 한다.

더팩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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