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철의 스포츠 뒤집기] 축구와 야구 '군대스리가’가 활성화되면
입력: 2015.02.21 08:00 / 수정: 2015.02.20 11:03
군대스리가 활성화 되면? KBO 임원진은 지난 1월 12일 육군 제 5보병사단을 방문해 자매 결연 협약식을 갖고 야구 관련 지원을 펼치기로 했다/KBO 제공
'군대스리가' 활성화 되면? KBO 임원진은 지난 1월 12일 육군 제 5보병사단을 방문해 자매 결연 협약식을 갖고 야구 관련 지원을 펼치기로 했다/KBO 제공

KBO(한국야구위원회)가 최근 몇 년 사이 열성적으로 펼치는 사업이 있다. 각급 부대에 야구 또는 야구와 비슷한 종목을 보급하는 일이다.

KBO 임원진은 지난 1월 12일 경기도 연천군에 있는 육군 제 5보병사단을 방문해 자매 결연 협약식을 가졌다. 이번 협약식은 장병들이 복무 기간 하기 힘든 야구를 여가 활동으로 즐길 수 있도록 해 건전한 병영 생활과 사기 진작을 도모하고 부대 체육 활동을 활성화하기 위해 추진됐다. KBO는 야구 장비와 교육 콘텐츠 등을 제공하는 등 적극적인 지원으로 사단 32개 예하 부대에 야구팀을 만들어 정기적인 대회를 개최하고 프로 야구 선수가 입대할 때 군 복무와 야구 활동을 함께할 수 있는 방안을 협의할 계획이다.

지난해 4월에는 강원도 원주에 있는 육군 제 1군사령부를 방문해 티볼 800세트를 기증했다. 이에 앞서 2012년에는 해병대 사령부에 티볼 80세트, 2013년에는 해병대 제 1사단에 티볼 130세트를 지원했다.

군대와 우리나라 축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1945년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난 뒤 곧이어 일어난 한국전쟁 그리고 이어진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군은 스포츠 발전에 크게 한몫을 했다. 특히 축구가 그랬다. 육군본부와 해군본부는 1948년에 이미 축구부를 보유하고 있었다.

1949년에는 9개팀이 출전한 사단 대항 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이때는 한국전쟁 전이어서 국군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을 때였다. 한국전쟁의 포연이 자욱했던 1951년 10월 경상남도 밀양에서 열린 전국축구선수권대회에는 헌병사령부와 공군, 해군, 육군보병학교 등의 군팀과 조선방직과 대구방직, 한국모직 등 실업팀이 자웅을 겨뤘다.

한국전쟁 뒤인 1955년 9월,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전국축구선수권대회 출전 팀을 살펴보면 이 시기 한국 축구에서 군이 차지했던 비중을 한눈에 알 수 있다. 16개 출전 팀 가운데 군팀은 병참단과 통신대, 해군, 제 22사단, 제7피복창, 해병대, 첩보대, 수도사단, 헌병사령부, 특무대, 1101공병단, 공군 등 12개나 됐다. 1956년 육군본부가 주최한 육군축구대회에는 사단 단위로 16개 팀이 출전해 성황을 이루기도 했다.

1960년 대전에서 열린 전국체육대회 축구 대학부에서는 공군사관학교가 우승했다. 이 무렵 3군 사관학교는 축구, 럭비 등 종목의 자체 대회를 갖고 각종 국내 대회에도 출전하는 등 상당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1965년 4월 방첩대의 해체는 군 축구가 한국 축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는 신호였다. 한국전쟁 와중인 1951년 특무대라는 이름으로 축구부를 만든 방첩대는 이후 14년여 동안 40명이 넘는 국가 대표 선수를 배출하는 등 축구 발전에 이바지했으나 단위 부대가 축구부를 운용하기에는 국내 축구의 판이 많이 커져 있었다.

그렇다면 군 스포츠와 야구는 어떤 관계일까. 오늘날 프로 야구 퓨처스리그에서 활동하고 있는 국군체육부대(상무) 야구부의 뿌리는 육군 야구부다. 육군 야구부는 한국전쟁이 채 끝나지 않은 1953년 초 만들어졌다. 이때 해군과 공군도 야구부 창단 작업을 벌였는데 육군이 가장 먼저 출발했다. 육군은 전국 각 부대에 흩어져 있던 야구 선수 출신 장병들을 불러 모았다. 1945년 일제 강점기에 벗어난 뒤 1세대 학생 야구 스타플레이어인 장태영과 박현식을 비롯해 정성용, 이병하, 김재복 등이 투수진을 구성했고 강태환, 문태성이 포수를 맡았으며 이용일, 김태원, 허종만, 황기대 등이 야수로 육군 야구부를 이뤘다.

육군 야구부 초창기 멤버 가운데 서울 상대 출신인 이용일은 제대한 뒤 기업인으로 활동하며 군산상고 야구부를 키웠고 대한야구협회 전무이사를 거쳐 프로 야구 탄생의 산파역을 맡아 KBO 초대 사무총장으로 선임됐다. 이후 3대에 걸쳐 사무총장을 맡아 프로 야구가 뿌리를 내리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공군은 허곤과 이기역, 정태수 등을 중심으로 야구부를 꾸렸다. 해군은 유완식과 이팔관, 이종호 등을 중심으로 창단에 힘썼으나 멤버가 부족해 1953년 4월 대구에서 열린 제 1회 3군대항야구대회에 출전하지 못했다. 이 대회에서는 육군이 공군을 16-4로 꺾었다. 뒷날 3군 체육부대가 통합되는 국군체육부대 야구부의 첫 공식 기록이다. 그해 9월 제 2회 대회에도 해군은 불참했고 육군이 공군을 5-4, 4-3으로 눌렀다. 이듬해인 1954년 7월에 열린 제 3회 대회에서는 공군이 육군에 4-2, 4-1로 연승했다.

그 사이 육군은 김일배를 감독으로 영입하고 박상규를 중위로 특별 임관해 코치 겸 선수로 끌어들이고 한태동과 김양중, 김정환, 허정규 등을 보강했다. 1950~60년대 한국 야구를 이끈 인재들이 육군 야구부에 모두 모였다.

실업 야구 전성기인 1960년대 초반, 13개 팀 가운데 군팀인 육군과 해군 헌병감실은 일정 수준 이상의 성적을 거두며 성인 야구 발전에 이바지했다. 해군 헌병감실은 1966년 해병대로 다시 창단하는데 이때 이후 육군-해병대의 경기는 한일은행-제일은행의 금융 라이벌전에 못지않은 실업 야구 최고의 흥행 카드가 됐다. 육군과 해병대의 야간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서울운동장 주변은 야구 팬들로 인신인해를 이뤘다. 1974년 해병대가 해체되면서 멤버 대부분이 공군으로 소속을 변경해 육군-해병대의 라이벌전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1978년에는 육군이 (중앙)경리단, 공군이 성무로 이름을 바꿔 군 야구부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지는 계기가 됐다. 경리단은 이후 육군 체육지도대를 거쳐 1984년 3군이 통합된 국군체육부대 야구부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단 대항 대회까지 있었던 축구만큼은 아니지만 야구도 반세기가 넘도록 군 체육 활동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스포츠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군대 스포츠 활동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특히 팀워크가 기본인 단체 종목은 군대 조직과 일맥상통한다.

올해는 군인들의 올림픽인 제 6회 세계군인체육대회가 오는 10월 2일부터 11일까지 문경을 중심으로 경상북도 9개 시·군에서 펼쳐진다. 한국 스포츠 발전을 앞장서서 이끌었던 군대 스포츠가 다시 한번 자신들의 임무를 해내야 할 시점이 됐다.

세계 10강을 자랑하는 한국 스포츠는 입대 적령기 선수들의 경기력 유지가 최우선 과제 가운데 하나다. 야구는 2020년 제 30회 도쿄 여름철 올림픽 정식 종목이 확실시된다. 보다 많은 우수 선수들이 입대한 뒤에도 경기력을 유지하면서, 나아가 국가 대표팀의 경기력 수준을 높이기 위한 방안으로 각 군 및 각급 부대의 야구를 바롯한 스포츠 활동을 활성화하는 방안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더팩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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