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가 21일 김용희 육성총괄을 SK의 제 5대 감독으로 선임했다. / SK 와이번스 제공 |
첫 경험은 오래도록 기억되게 마련이다. 첫사랑의 추억이 대표적이다. 스포츠 기자에게는 첫 취재 경험이 첫사랑과 비슷하다. 글쓴이는 초년병 때 취재했던 일들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1970년대 후반 남자 고교 배구의 강호 옥천공고를 취재하기 위해 오렌지 주스를 사 들고 장충체육관 근처 숙소를 찾아갔던 일, 이창호 감독을 취재하러 구기터널 근처에 있는 미도파 배구단 훈련장에 갔다가 뒷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세터로 성장하는,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L모 선수와 내외했던 일 그리고 취재용 지프를 타고 당시에는 서울 서북쪽 끝자락인 충암고등학교 야구부를 찾아갔던 일 등등.
이런 추억들 가운데 글쓴이는 지난 23일 프로 야구 SK 와이번스 사령탑에 오른 김용희 감독과 얽힌 일들을 이따금 떠올리곤 한다. 김 감독과 처음 만난 건 1979년 가을이었다. 그해 초 이용일 전무이사(뒷날 한국야구위원회 초대 사무총장) 체제로 바뀐 대한야구협회는 야구 붐을 더욱 활성화하기 위해 야구대제전을 10월과 11월 사이,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열었다. 실업과 대학에서 활약하고 있는 졸업생 그리고 재학생(3학년)을 묶은 전국 26개 고교 올스타가 출전한 제 1회 대회에서 경남고는 선린상고를 6-3으로 누르고 우승했다.
당시 신문 기사를 보면 이 대회를 기획한 이용일 전무이사의 의중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다. “(전략) 7년 전 없어진 도시대항야구대회 성격을 지닌 이 대회가 혈연과 지연을 통한 관객 동원에 성공하면 프로 야구의 토착화 가능성도 점칠 수 있어 팬들의 관심이 더욱 크다.” 토착화(土着化)라는 말이 좀 어색하긴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프로 야구를 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프로 야구 출범 전해인 1981년 제 3회 대회(우승 인천고)까지 개최된 야구대제전은 프로 야구의 리허설 같았다.
또 하나 이 대회와 관련해 기억해 둘 일은 대회 수익금이 ‘남서울대운동장’에 짓고 있는 야구장 기금으로 기탁됐다는 것이다. 이 야구장이 오늘날의 잠실종합운동장 야구장이다.
제 1회 대회에서는 19타수 11안타(타율 .579)의 맹타를 휘두른 경남고 김용희(포철)가 최우수선수(MVP)로 뽑혔고 최동원(작고 연세대)이 우수투수상을 받았다. 이때 글쓴이는 김용희를 취재하면서 꽁치라는 별명을 무심코 꺼냈는데 겉으로 나타내지는 않았지만 썩 좋아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키가 크고 몸매가 늘씬해서 경남고~고려대 시절 붙은 별명인데 정작 본인은 이 별명을 싫어했다. 글쓴이는 그때 언제인가 김용희에게 그럴 듯한 별명을 지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1980년 10월에 열린 제 2회 대회에서 경남고는 중앙고를 3-2로 물리치고 2연속 우승했다. 김용희가 2연속 MVP가 됐고 결승전에서 3피안타 10탈삼진으로 완투한 최동원(아마추어 롯데 자이언츠)이 우수투수상을 수상했다. 그때 글쓴이는 타의로 펜을 놓게 돼 김용희를 취재할 수 없었다.
1982년 프로 야구가 출범해 김용희는 롯데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었고 그해 7월 4일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올스타 3차전에서 만루 홈런을 터뜨리는 등 뛰어난 타격 실력으로 초대 미스터 올스타가 됐다. 김용희의 이 홈런은 개막전 이종도(MBC 청룡)의 만루 홈런과 한국시리즈 6차전 김유동(OB 베어스)의 마무리 만루 홈런을 이어 주는 징검다리 만루 홈런이었다. 만루 홈런으로 시작해 만루 홈런으로 끝난 프로 야구 원년이었다.
1985년 펜을 다시 잡은 글쓴이는 부산 구덕구장에서 김용희와 만났고 6년 전 결심을 떠올리며 김용희에게 롯데 중심 타선인 김용철과 묶어 ‘YY포’라는 별명을 선물했다. KIA 타이거즈 선동열 감독의 ‘무등산 폭격기’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지은 별명이다.
김용희는 큰 키에서 비롯된 허리 통증 때문에 프로 8시즌 내내 힘들게 운동했지만 1984년 한국시리즈 우승에 이바지하는 등 대표적인 ‘롯데 맨’으로 활동한 뒤 1989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
선수 생활을 마친 뒤에도 김용희와 글쓴이의 인연은 이어진다.
“명철이가?” “이 사람, 또 잘못 전화했네. 날세.” “아이고, 형님 죄송합니더.” 2000년대 중반 김용희 롯데 자이언츠 2군 감독은 휴대전화로 선수 신명철(申命澈)이 아닌 기자 신명철(申明徹)을 찾곤 했다. 신명철의 몸 상태도 확인하고 잘하라고 격려도 하고 싶어 전화했을 텐데 정작 전화를 받은 사람은 야구 선수가 아닌 야구 기자였다.
30년이 넘는 시간이 흘러 글쓴이는 더팩트 편집위원으로 일하고 있고 김용희 감독은 SK 제 5대 사령탑으로 일선에 복귀했다. 기자가 특정 지도자를 응원할 수는 없지만 오랜 인연이 이 말을 하게 만든다.
“김 감독, 잘하소.”
더팩트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