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슈 신동' 이하성이 부상과 슬럼프를 극복하고 '아시아 챔피언'으로 거듭났다. /평택=남윤호 기자 |
[더팩트ㅣ평택=이현용 기자] "어렸을 때부터 방방 날아다녔어요."
한국에 2014 인천 아시안게임 첫 금메달을 안긴 이하성(20·수원시청)은 어릴 때부터 또래들과 달랐다. 진중한 성격과 달리 몸을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우슈 신동'으로 이름을 알린 그는 부상과 슬럼프로 힘든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시련도 그를 막진 못했다. 인내와 노력, 그리고 우슈에 대한 강력한 의지로 부활했다. 그리고 2014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더팩트>는 한국의 첫 금메달을 따낸 '우슈 영웅' 이하성의 집을 찾아 그의 부모와 함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나눴다. '앨범토크'에 까치발 소년에서 '아시아 챔피언'으로 성장한 이하성의 '우슈 스토리'를 담았다.
◆ 까치발을 들고 방방 날아다닌 '의젓한 아이'
이하성은 어렸을 때부터 평범하진 않았다. 21일 경기도 평택에 있는 자택에서 <더팩트>와 만난 어머니 맹현주(45) 씨는 "아들이 참 얌전했다. 항상 까치발을 하고 다녔다. 그래서 밑에 집에서 우리 집에 사람이 없는 줄 알았다더라"면서 "밖에선 어렸을 때부터 방방 날아다녔다. 텀블링을 하고 짧은 거리를 가도 평범하게 가지 않더라"고 과거를 회상했다. 맹 씨는 집에서 혼자 구르고 다리를 찢는 아들을 보고 체육관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마침 맹 씨의 사촌 동생이 우슈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이하성과 우슈의 인연은 시작됐다.
또래 아이들과 다른 점은 특별한 운동 신경뿐만 아니었다. 맹 씨는 "정말 착한 아들이다. 남한테 폐 끼치는 일이 없다. 모범적이고 진중하며 의젓하다"며 한 가지 에피소드를 꺼냈다. 이하성이 초등학교 2학년 때 계단에서 넘어져 이마를 4바늘이나 꿰맸다. 같이 있던 교사에게 "선생님, 여기 피나요"라고 그러더니 울지도 않고 병원에 갔다. 병원에서 만난 이하성에게 맹 씨가 "안 아팠어?"라고 묻자 "그냥 피났지 뭐"라고 덤덤하게 말했다. 아파도 생전 티 낸 적이 없는 과묵한 아이였다.
어릴 때부터 우슈를 시작한 이하성은 '스타킹'에 출연하면서 유명해졌다. |
◆ 언론의 뜨거운 관심을 받은 '내성적인 우슈 신동'
이하성은 우슈를 시작하고 언론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스타킹'을 비롯해 여러 프로그램에 출연해 얼굴을 알렸다. 아버지 홍선(45) 씨는 "적수가 없었다. 대회를 나가면 우승이었다"고 당시를 추억했다. 이하성 방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메달과 상장이 이를 증명했다. 신문 인터뷰도 그에겐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맹 씨는 이하성의 인터뷰 기사들을 고스란히 스크랩해 간직하고 있었다. 이하성은 어릴 때부터 많은 공연을 다녔다. 명절이면 가족 앞에서 화려한 재롱을 보이며 어른들을 기쁘게 했다.
많은 사람 앞에 서는 것이 일상인 신동이었지만 이하성은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그는 "하성이가 말수가 워낙 적다. 꼭 필요한 말만 하는 스타일이다"며 "공연 전에 항상 긴장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맹 씨 역시 "정말 많이 쑥쓰러워한다. 우리는 다 보인다. 긴장을 해서 관중들의 눈을 안 쳐다본다"면서 "어렸을 때 항상 내가 앉을 자리를 하성이가 지정해줬다. 동작이 끝나면 늘 눈을 맞췄다"고 설명했다.
아버지 홍선(오른쪽) 씨와 동생 하용 군이 이하성의 상장과 메달을 보고 있다. |
◆ '전교 2등' 공부도 운동도 만능!
이하성은 문무를 겸비한 학생이었다. 천부적인 운동 재능과 우슈로 다져진 탄탄한 신체 능력은 여러 종목의 '러브콜'을 받았다. 운동만이 아니었다. 맹 씨는 "공부도 잘하는 편이었다. 운동을 하면서도 좋은 성적을 유지했다. 중고교 때 전교 2등을 할 정도였다"고 아들을 자랑스러워했다. 상장 사이에 자리한 성적표에 찍힌 '전체 석차 3'이라는 숫자가 맹 씨의 말을 증명했다.
공부와 운동 모두 능했기에 한 때 '투 잡'을 꿈꾸던 시절도 있었다. 맹 씨는 "초등학교 때 이비인후과 의사가 되고 싶어 했다. 치료와 공연을 같이 할 것이라고 말했다"며 "중학교 올라가니 운동에 집중하겠다더라"고 에피소드를 털어놨다. 아들이 운동보다 공부를 하길 바란 적은 없었냐는 질문에 이 씨는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아들이 하고 싶은 것을 했으면 좋겠다고 항상 생각했다. 아들이 즐거워하면서 운동을 했고 이런 날이 왔다"며 미소 지었다.
이하성(위 가운데)은 중고교 시절 부상과 슬럼프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 / 동생 하용 군 제공 |
◆ 끊이지 않은 부상과 슬럼프
항상 좋은 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승승장구하던 이하성에게 찾아온 것은 슬럼프와 부상이었다. 이 씨는 "아들이 운동은 항상 좋아했지만 공연하는 것을 싫어했다. 배려심이 깊어 자신이 끝까지 참으로 하는 성격인데 힘들어 했다. 그때 슬럼프가 왔다"고 아련한 눈빛으로 과거를 회상했다. 맹 씨 역시 "그때 잠깐 사춘기도 왔다. 처음 의견이 부딪혔는데 바로 편지로 '미안하다'고 하더라. 그때 아들이 많이 힘들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이하성을 가로막는 것은 지독한 부상이었다. 훈련을 하다 한쪽 골반뼈가 부러졌다. 다음 해 다른 한쪽이 골절됐다. 수술이 어려워 병원에 누워 뼈가 붙기를 기다리는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이하성 동생 하용(18) 군은 "내 꿈은 선수 재활트레이너다. 형 영향으로 이런 꿈을 갖게 됐다. 다치는 것을 보니 정말 마음이 아팠다. 형이 금메달을 목에 걸었을 때도 형이 고생한 시간들이 생각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하성이 금메달을 딴 뒤 어머니 맹현주 씨와 나눈 대화(아래)와 고등학교 성적표. / 맹현주 씨 제공 |
◆ 인내로 다시 비상한 '우슈 천재'
이하성은 힘든 시간을 견뎠다. 그런데 지난해 9월 이번엔 무릎이 문제였다. 무릎 연골이 파열됐다. 하지만 진통제 투혼을 발휘하며 지난해 10월에 열린 국가 대표 선발전에 참가했다. 수술을 해야 했지만 아시안게임에 대한 강력한 의지로 수술을 미뤘다. 이 씨는 "선발전을 위해 수술을 미뤘다. 그러다보니 후유증이 많았다"고 안타까워했다.
모든 시련을 극복한 이하성은 12년 만에 한국 우슈에 금메달을 안겼다. 한국의 첫 금메달이어서 더 값졌다. 인고의 시간을 견딘 '우슈 신동'이 '아시아 챔피언'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하성의 금메달 소식에 가족들도 많은 축하를 받았다. 이 씨는 "회사를 가야 하는데 걱정이다"며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그러면서 "앞으로 아들이 부상 없는 게 첫 번째다. 그리고 슬럼프 겪지 않고 지금처럼 열심히 했으면 좋겠다"고 소망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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