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벌 열전 ④] '꾀돌이' 유남규와 '파워 드라이브' 김택수
입력: 2013.05.19 10:00 / 수정: 2013.05.19 10:00

유남규(왼쪽)과 김택수는 선수 시절 최고의 라이벌이자 서로를 이끌어주는 소중한 동료였다./ 스포츠서울 DB
유남규(왼쪽)과 김택수는 선수 시절 최고의 라이벌이자 서로를 이끌어주는 소중한 동료였다./ 스포츠서울 DB


[ 심재희 기자] 탁구는 1980년대부터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인기 스포츠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통해 한국탁구는 '만리장성' 중국을 뛰어 넘으면서 세계 최고로 떠올랐다. 1990년대 들어서도 세계적인 수준을 자랑하면서 한국탁구는 승승장구 했다. 하지만 2000년을 넘어서면서 한국탁구는 고개를 숙였다. 중국과 유럽에 밀리면서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한국탁구의 위기론'이 고개를 들 때마다 인구에 회자되는 인물들이 이번 라이벌 열전을 장식할 주인공이다. 바로 유남규와 김택수다. 녹색테이블에서 지름 40mm에 불과한 공 하나도 세계를 제패했던 우리들의 탁구영웅들. 유남규와 김택수의 라이벌 이야기를 소개한다.

◆ '왼손 천재' 유남규

1968년 6월 4일 부산에서 태어난 유남규는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운동신경을 자랑했다. 초등학교 입학 후 축구와 인연을 맺었던 그는 부산 영선초등학교 3학년 때 학교 축구부가 없어지는 바람에 새로 생긴 탁구부에 들어가게 됐다. 우연한 계기로 탁구 라켓을 잡은 그는 '왼손 천재'로 불리면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부산 남중학교에 진학해 성장세를 거듭했고, 1982년 청소년대표로 뽑히면서 될성부른 떡잎으로 인정받았다. 그리고 1983년 아시아청소년탁구선수권대회에서 '만리장성' 중국을 뛰어넘고 우승을 차지해 차세대 한국탁구의 간판스타로 떠올랐다.

유남규는 부산 광성공고 재학 시절이었던 1984년 처음으로 국가대표로 선발됐다. 이후 국제 경험을 쌓으면서 더 강한 선수로 거듭났고, 1986년 아시안게임이라는 큰 무대에 서게 됐다. 사실 대회 전까지만 해도 유남규에게 금메달을 기대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무서운 신예' 유남규는 경기가 거듭될수록 기세를 올렸고, 결국 개인 단식과 단체전에서 모두 우승을 차지하면서 2관왕에 올랐다. 세계랭킹 50위에 불과했던 유남규가 세계 톱랭커들인 중국의 장자량과 후이준을 연달아 꺾으면서 시상대 제일 높은 곳에 섰던 것이다.

유남규는 탁구 역사상 최고의 왼손 펜홀드 전형 선수로 인정받고 있다./ 스포츠서울 DB
유남규는 탁구 역사상 최고의 '왼손 펜홀드 전형' 선수로 인정받고 있다./ 스포츠서울 DB

2년 뒤 1988년 서울올림픽. 탁구가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대회에서 유남규는 세계를 제패했다. 결승전에서 대표팀 선배 김기택을 맞이해 세트 스코어 3-1 승리를 거두면서 두 손을 번쩍 들었다. '한국의 왼손 천재'가 세계 최고의 선수로 등극하는 순간이었다. 이후 유남규는 1990년 베이징아시안게임 단체전 금메달을 따냈고,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남자복식 동메달을 보탰다. 그리고 1998년 방콕아시안게임을 끝으로 은퇴의 길에 접어들었다. 은퇴 이후 곧바로 지도자의 길에 들어선 유남규는 아직도 탁구 역사상 '최고의 왼손 펜홀드 전형 선수'로 인정받고 있다.

◆ '대기만성' 김택수

김택수는 1970년 5월 25일 광주에서 처음으로 세상의 빛을 봤다. 광주 무진중학교 시절 정식으로 탁구 선수로 데뷔한 그는 출중한 기량을 뽐내면서 유망주로 떠올랐다. 그리고 광주 숭일고등학교 3학년 태극마크를 처음으로 달면서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1990년 베이징아시안게임 복식에서 금메달을 따낸 그는 단식과 복식에서 모두 세계 톱랭커로 올라서면서 주목을 받았다. 특히, 파워 넘치는 드라이브 공격은 세계 최고의 기술로 평가받을 정도였다. 공격적인 경기 운영으로 중국 선수들과 유럽 선수들을 윽박지르는 모습은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김택수는 세계 정상의 자리에 올라설 듯 올라설 듯하면서도 오랫동안 아쉬움만 곱씹었다. 1991년 지바 세계선수권대회 단식 동메달을 따냈고,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단식과 복식에서 다시 동메달을 거머쥐었다. 1993년 예테보리 세계선수권대회 복식에서 동메달에 그친 김택수는 1995년 톈진세계선수권대회에서 다시 단체전 동메달을 보탰다. '동메달 징크스'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정상의 문턱에서 번번이 좌절하고 말았다.

김택수의 파워 드라이브는 세계 최고의 회전력과 스피드를 자랑했다./ 유튜브 영상 캡처
김택수의 '파워 드라이브'는 세계 최고의 회전력과 스피드를 자랑했다./ 유튜브 영상 캡처

어느덧 서른을 바라보게 된 김택수는 1998년 방콕아시안게임에 나섰다. 그리고 꿈에도 그리던 메이저대회 단식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만년 우승후보'의 꼬리표를 떼어내고 실력에 걸맞은 성적을 드디어 올렸다. '대기만성형' 스타로서 탁구 꿈나무들에게 큰 희망을 줬다. 하지만 이후에도 올림픽과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정상에 오르지 못하는 비운을 맛봤고, 결국 2004년 정들었던 태극마크를 반납했다. 무려 17년 동안 국가대표로서 숱한 명승부를 낳은 김택수는 은퇴와 함께 대표팀 코치로 선임되면서 지도자 인생을 시작하게 됐다.

◆ 한국이 자랑하는 '드라이브 달인들'

유남규와 김택수는 '펜 홀드 전형'의 선수들이었다. 세계적으로 셰이크핸드 전형이 대세를 이루기에 둘의 멋진 경기 모습은 더 진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참고로 현재 대한민국 선수들도 95% 이상이 셰이크핸드 전형이다. 유남규와 김택수는 연필을 쥐듯이 탁구채를 꼭 잡고 호쾌한 드라이브를 연신 날려댔다. 회전과 속도, 그리고 코너워크에서 유남규와 김택수와 비교되는 펜 홀드 전형의 선수는 현 대한민국 국가대표 유승민뿐이다.

유남규는 왼손잡이라는 희소성에 날카롭고 정확한 드라이브를 주무기로 삼았다. 거기에 '탁구 IQ가 200 이상'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수읽기에 능했다. 상대와의 수 싸움에서 결코 밀리지 않았으며, 매우 공격적인 경기 운영으로 점수를 차곡차곡 쌓았다. 상대의 약점을 찔러 불안한 리시브를 잘 유도해냈으며, 이후 왼손 공격 드라이브가 작렬하면 어김없이 유남규의 득점이 성공됐다.

김택수는 파워 드라이브가 일품이었다. 힘을 바탕으로 경기를 펼치는 유럽 선수들을 파워로 압도할 정도로 드라이브가 강하고 빨랐다. 불안한 자세에서도 엄청난 회전을 걸어 날리는 김택수의 드라이브는 상대 선수 앞에서 힘차게 전진 회전을 걸며 튀어 올라 멋지게 득점으로 연결됐다. 김택수는 이 파워 드라이브를 바탕으로 긴 랠리를 상대와 주고받는 '탁구쇼'를 펼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1998년 방콕아시안게임 결승전에서 중국의 류궈량을 상대로 '32구 랠리' 끝에 승리한 장면은 한국탁구 최고의 장면 가운데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영상] 1988년 서울올림픽 탁구 남자단식 결승전, 유남규 vs 김기택(http://www.youtube.com/watch?v=1Dua1APQvl4)


◆ 라이벌이자 파트너


유남규와 김택수는 2년 선후배 사이다. 청소년 시절부터 숙명의 라이벌로 탁구인생을 같이 걸어왔다. 10대에 태극마크를 달 정도로 전도유망한 선수였던 둘은 성장세를 거듭하면서 세계적인 선수로 올라섰다. 국가대표 시절 초반에는 유남규가 한걸음 앞서 나갔다.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연속 제패하면서 유남규가 세계 정상의 자리에 우뚝 섰고, 김택수는 유남규를 위협하는 라이벌로서 항상 자리매김했다. 이후 김택수가 꾸준히 성장하고 유남규과 부상과 부진이 겹치면서 내리막을 걸으면서 상황은 역전됐다. 김택수가 새로운 에이스로 각광을 받았지만, 맞대결에서는 유남규가 결코 밀리지 않으면서 둘의 라이벌 관계는 계속 유지됐다.

둘의 맞대결은 그야말로 뜨거운 경쟁이었다. 왼손 펜 홀드 전형과 오른손 펜 홀드 전형이 맞붙어 숱한 명승부를 만들어냈다. 경기 운영 능력과 수 싸움에서는 유남규가 한 수 위에 있었고, 힘과 정공법에서는 김택수가 우위를 점했다. 2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둘은 함께 훈련하고 서로에게 배우면서 더 좋은 선수로 성장해 나갔다. 둘의 대결은 이제는 보기 힘든 '드라이브 달인'의 맞대결이라는 점에서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또한, 유남규와 김택수는 라이벌이자 파트너였다. 서로 마주보며 녹색 테이블을 달구는 최고의 단식 선수였지만, 함께 복식으로 나서고 팀으로 단체전에 출전할 때는 승리를 합작하는 단짝이었다. 공격 스피드와 파워에서 세계 최고의 기량을 자랑하는 그들이었기에 복식으로 함께 출전해 좋은 성적을 자주 거뒀다. 또한, 둘은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의 1,2번 선수를 번갈아 맡으면서 단체전 승부의 키를 쥐고 있었다.

[영상] 1998년 방콕아시안게임, 김택수 vs 류궈량 '32구 랠리'(http://www.youtube.com/watch?v=rTFu_M-jRS4)


◆ 후배들의 교과서


유남규와 김택수는 대표팀에서 라이벌이자 파트너로 10여 년을 함께 지냈다. 그리고 은퇴를 선언한 이후에도 비슷한 행보를 걷고 있다. 곧바로 지도자의 길에 접어들어 또 다른 경쟁체제에 돌입했다. 국가대표팀과 실업팀 지도자를 거쳤고, 대한탁구협회 이사직도 맡았다. 자신들이 선수 시절 세계적인 선수로 거듭날 수 있었던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열심히 전수하고 있다.

둘은 후배들의 교과서로 통한다. 부단한 노력을 바탕으로 세계 톱랭커에 오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유남규는 어린 시절부터 트레이닝복 속에 모래주머니를 감춰 달고 훈련할 정도로 남다른 승부욕을 보였고, 김택수는 '동메달 징크스'를 겪는 과정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매일매일 기량을 갈고 닦아 대기만성형 스타가 됐다. '흘린 땀은 결코 배반하지 않는다'라는 진리를 일깨워 준 그들이기에 후배들은 두 탁구영웅을 바라보면서 오늘도 라켓을 힘차게 휘두르고 있다.

2000년대 들어서 한국탁구가 침체기를 걷고 있다. '만리장성' 중국은 고사하고, 유럽에도 밀리면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탁구계에서는 "유남규나 김택수 같은 선수가 빨리 나와야 한다"는 이야기가 끊이질 않는다. 자신들을 뛰어 넘는 선수를 키워내는 것이 이제는 유남규와 김택수의 숙제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후배들의 교과서로 통하는 유남규 감독과 김택수 감독이 한국탁구의 부활을 위해 시원한 드라이브를 걸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유남규(위)와 김택수는 지도자로서 후배들에게 세계 최고의 노하우를 전수하고 있다. / 더팩트 DB
유남규(위)와 김택수는 지도자로서 후배들에게 '세계 최고'의 노하우를 전수하고 있다. / 더팩트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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