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벌 열전 ③] '세기의 장사' 이만기와 '씨름 신동' 강호동
입력: 2013.05.14 16:46 / 수정: 2013.05.14 16:46

1980~1990년대 민속씨름 최고의 스타로 큰 인기를 누렸던 이만기(왼쪽)와 강호동. / 출처=스포츠서울 DB
1980~1990년대 민속씨름 최고의 스타로 큰 인기를 누렸던 이만기(왼쪽)와 강호동. / 출처=스포츠서울 DB

[ 심재희 기자] 씨름은 힘과 기술을 겨루는 대한민국의 전통 스포츠다. 1980년대 민속씨름은 프로야구, 프로축구와 함께 최고의 국내 스포츠로 자리매김 했다. 씨름 스타들은 투혼의 승부와 함께 연예인 이상의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씨름 앞에 '인기 스포츠'라는 말은 사라졌다. 침체기가 길어지더니 전혀 회복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씨름의 부활을 바라는 마음과 함께 <더팩트> 라이벌 열전 코너에서 '모래판의 황제들'을 초대했다. 모래판을 떠난 뒤에도 여러 방면에서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는 이만기와 강호동이 그 주인공들이다. 한국씨름의 전설적인 스타들이 펼친 라이벌 열전을 돌아보자.

◆ '세기의 장사' 이만기

1963년 7월 경상남도 의령에서 태어난 이만기는 마산 무학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으로 모래판 위에 섰다. 학교 클럽활동 시간에 씨름을 선택하면서 처음으로 샅바를 매게 됐다. 남다른 재능을 보였던 그는 마산중학교와 마산상업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서서히 두각을 나타냈고, 경남대학교에 진학하면서 한층 더 높은 기량을 과시했다. 1983년 제1회 천하장사대회에서 이만기는 신데렐라로 떠올랐다. 기대 이상의 선전을 펼치면서 준결승전까지 오른 뒤 강력한 우승후보로 평가 받던 이준희를 만났다. 힘과 경험 등 모든 면에서 이만기의 절대열세가 예상됐다. 하지만 이만기는 전문가들의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멋진 승리를 거두면서 돌풍을 태풍으로 바꿔놓았다. 결승전에서는 같은 한라급인 최욱진을 만났다. 최욱진은 앞서 열린 한라급 결승전에서 이만기에게 뼈 아픈 패배를 안겼던 인물. 이만기는 운명의 일전에서 밀고 밀리는 치열한 공방 끝에 3-2로 승리를 거두고 환호작약 했다. 한라급 결승전 패배를 말끔히 설욕했고, 모든 체급을 통틀어 최고의 씨름왕자를 가리는 무대에서 정상에 오르는 기염을 토해 냈다.

이만기는 출중한 실력 만큼 화려한 팬 서비스를 펼쳤다. / 출처=스포츠서울 DB
이만기는 출중한 실력 만큼 화려한 팬 서비스를 펼쳤다. / 출처=스포츠서울 DB

그렇게 시작된 '이만기 전성시대'는 수많은 명승부와 함께 '이만기 신화'로 이어졌다. 이만기는 현역으로 활약한 8년 동안 차원이 다른 기량으로 최고의 자리를 계속 지켰다. 천하장사 10번, 한라장사 7번, 백두장사 19번을 비롯해 총 47차례 공식대회 우승을 차지하면서 '세기의 장사'로 공인 받았다. 말 그대로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선수'라는 평가를 얻으며 씨름을 넘어 대한민국 최고의 스포츠 스타로 자리매김 했다. 자신보다 훨씬 더 체구가 큰 상대들을 환상적인 '기술 씨름'으로 제압하는 모습으로 씨름 꿈나무들의 우상이 됐다. 345전 293승 52패. 이만기가 선수 시절 남긴 성적표다. 승률이 무려 84.92%에 이른다. 열 번 싸우면 여덟 번 이상을 이겼으니 '씨름황제'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았다. 1980년대 최고의 씨름스타로 각광받았던 그는 27세였던 1990년 은퇴를 결정해 팬들을 아쉽게 했다. "더 뛸 수 있다"는 주위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전성기가 지난 시점이라고 판단했다. 항상 입에 담아 오던 "최고의 위치에서 박수 칠 때 떠나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 '무서운 10대' 강호동

강호동은 1970년 6월 경상남도 진주에서 처음으로 세상의 빛을 봤다. 마산 산호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이만기와 마찬가지로 마산중학교와 마산상업고등학교에서 씨름의 기본기를 갈고 닦았다. 타고난 힘에 믿기 힘든 운동신경까지 겸비하면서 '포스트 이만기'로 각광을 받았던 그는 10대의 어린 나이에 프로 무대에 뛰어들어 대형사고를 터뜨렸다. 1988년부터 본격적으로 프로 무대에 선 강호동은 1989년 18세의 나이에 백두장사에 오르면서 포효했다. 그리고 1990년 3월 제18대 천하장사에 등극하면서 최고의 선수로 우뚝 섰다. '무서운 10대' 강호동의 출연에 씨름판은 난리가 났고, 강호동은 각종 기록을 갈아치우면서 '씨름 황태자' 칭호를 얻었다. 대선배 이만기가 가지고 있던 최연소 천하장사 기록(이만기 20세, 강호동 19세)과 최연소 백두장사 기록(이만기 22세, 강호동 18세)을 모두 자신의 것으로 바꾸면서 '新 씨름황제'의 탄생을 세상에 알렸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강호동은 사상 처음으로 10대에 천하장사 3연패를 이뤄내면서 전성시대를 열어젖혔다. 개구쟁이 소년장사가 명실상부한 씨름황제로 서서히 자리를 잡아 나갔다.

무서운 신예 강호동의 혜성과 같은 등장으로 씨름 황제 이만기의 독주 체제가 막을 내렸다. / 출처=스포츠서울
'무서운 신예' 강호동의 혜성과 같은 등장으로 '씨름 황제' 이만기의 독주 체제가 막을 내렸다. / 출처=스포츠서울

무서운 기세로 거침없이 승리를 이어가던 강호동은 짧고 굵은 선수 시절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현역으로 활약한 4년 동안 천하장사 5회, 백두장사 7회의 엄청난 업적을 쌓았다. 프로 선수로 활약한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지만,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기량과 쇼맨십 등으로 씨름판의 최고 히트상품으로 주가를 드높였다. 141전 109승 32패. 강호동이 선수 시절 남긴 성적표다. 내로라 하는 강자들을 모두 모래판에 눕히면서 77.30%의 대단한 승률을 기록했다. 프로 데뷔 해에 경험 부족의 모습으로 적응기를 보낸 뒤에는 90%에 가까운 승률을 기록하면서 '무적'으로 군림했다. 180cm 정도에 불과한 키에 120kg을 훌쩍 넘는 몸무게로 다소 둔해 보이기도 했지만, 씨름판 위에 서면 강호동은 누구보다 더 날렵하고 영리한 선수였다. 엄청난 힘에 유연성까지 겸비해 신체 밸런스가 완벽에 가까웠다. 거기에 상대의 기술을 역이용하는 명석한 두뇌와 함께 특유의 패기 넘치는 모습까지 더하면서 최고의 씨름꾼으로 등극했다. 강호동은 전성기를 구가하던 1992년 씨름과의 작별을 고했다. 이만기처럼 최고의 위치에서 모래판을 떠났다. 당시 그의 나이가 만 22세에 불과했다. 새로운 씨름황제의 조기 은퇴에 씨름인들을 비롯해 수많은 팬들이 진한 아쉬움을 표했다.

◆ 황제와 신동의 혈전

대한민국의 전통 스포츠 씨름이 최고의 인기를 얻었던 1989년 7월. 백두장사 준결승전에서 역사적인 승부가 펼쳐졌다. 당해낼 선수가 없을 정도로 승승장구 하던 이만기와 앳된 외모의 신예 강호동이 결승 문턱에서 만났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씨름황제로 군림하고 있던 이만기의 승리를 점쳤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까지 이만기의 전적이 290승 19패였고, 강호동의 전적은 6승 25패였다. 승률 94%에 육박하는 베테랑 선수와 승률 20%가 채 되지 않는 풋내기의 대결이었으니 당연히 이만기의 우세가 점쳐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당시 18세에 불과했던 강호동이 이만기를 연거푸 모래판에 눕히면서 결승행 티켓을 거머쥔 것이다. 첫 판에서 의외의 승리를 따낸 강호동은 여세를 몰아 두 번째 판에서도 이만기를 제압하면서 승리를 결정지었다. 멋진 뒤집기 기술로 이만기의 자존심을 완전히 꺾으면서 결승전에 올라섰다. 패배를 당한 이만기도, 모든 씨름팬들도 믿기 힘든 상황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강호동은 이만기를 꺾은 게 운이 아니었다는 것을 결승전에서 확실히 증명했다. 임용제를 3-0으로 완파하고 꿈에도 그리던 백두장사에 등극하면서 모래판의 신동으로 날아올랐다.

이후 이만기와 강호동은 황제와 신동의 명승부를 총 6차례 펼쳤다. '젊은 피' 강호동이 패기를 앞세워 이만기의 천적으로 떠올랐지만, 이만기 역시 씨름황제의 명성에 걸맞은 반격으로 명승부를 만들어냈다. 역대 전적은 6전 4승 2패로 강호동의 우위. 강호동이 먼저 2연승을 거두면서 기세를 올렸지만, 이만기가 이후 2차례 경기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자존심을 회복했다. 그리고 1990년 백두장사와 천하장사 대회에서 강호동이 연거푸 승리하면서 다시 '이만기 킬러'라는 명성을 얻었다. 이만기가 잔 부상으로 베스트 컨디션이 아니었던 적이 있긴 했지만, 어쨌든 맞대결에서는 젊은 패기를 앞세운 강호동의 무서운 기세가 한 발 앞섰다. 1990년 이후 이만기가 은퇴를 선언했고, 강호동 역시 2년 뒤 샅바를 풀어 '세기의 맞대결'은 그대로 역사로 남게 됐다. 훗날 두 사람은 TV 방송프로그램에서 진행자와 손님으로 만나 선수 시절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눴다. "샅바만 잡으도 상대가 어떤 움직임을 취할지 알 수 있다. 이만기 선배가 워낙 고수였기에 일부러 힘을 다른 쪽으로 준 뒤, 그 역으로 경기를 풀었다." 강호동이 의미심장한 말을 건네자 이만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초고수들만 알 수 있는 멋진 명승부를 펼쳤던 이만기와 강호동이었다.

[영상] 이만기 vs 강호동, 추억의 명승부(http://www.youtube.com/watch?v=XMH9wujh1-4)

◆ 변신의 귀재들

'모래판의 황제'로 군림했던 이만기와 강호동. 그들은 20대 초, 중반에 은퇴를 선언하면서 여운을 남겼다. 하지만 선수 생활을 빨리 접은 만큼 다른 분야에서 잘 적응하면서 또 다른 화제를 낳았다. 이만기는 은퇴 후 인제대학교 사회체육학과 전임강사로 변신했다. 모래판이 아닌 강단에 선다는 것이 어색하고 어려울 수밖에 없었지만, 자신이 몸소 체험했던 부분들을 바탕으로 후배들을 잘 가르쳤다. 이듬해에는 인제대학교 씨름단 감독을 맡으면서 지도자로 데뷔했고, KBS 씨름해설위원으로 팬들과도 다시 만났다. '세기의 장사'답게 모래판 밖에서도 무한한 씨름사랑을 드러내면서 이만기다운 길을 걸어나갔다. 그리고 1998년. 이만기는 또 한 번 변신에 성공했다. 민관 합동의 대통령 자문기구인 제2건국 범국민추진위원회 위원으로 활약하며 큰 관심을 모았다. 2000년에는 중앙대학교에서 체육학 박사학위를 받아 정식으로 교수의 길을 열어젖혔다. 이후 열린우리당 체육진흥특별위원회 위원장과 자문위원을 지냈고, 현재 인제대학교 사회체육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또한, 국민생활체육 분야에서는 씨름 이외에도 배드민턴 종목의 간부 직을 맡으면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만기 파워'가 씨름에만 국한되지 않고 여기저기서 빛나고 있다.

강호동은 씨름판에서 내려온 뒤 개그맨으로 변신을 꾀했다. 선배 이경규의 도움을 받아 MBC 특채 개그맨으로 뽑히면서 연예계에 입문했다. 씨름선수 시절부터 남다른 끼를 선보였던 그는 개그 본능을 폭발하며 시청자들에게 큰 웃음을 선사했다.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귀여운 모습으로 '씨름판의 악동'에서 '개그계의 귀염둥이'로 이미지를 바꿨다. 개그 프로그램에서 큰 몸을 이리저리 흔들며 어린 아이들과 순수한 모습의 개그를 펼치는 그의 노력에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보냈다. 개그맨으로서 변신에 성공한 강호동은 예능프로그램에서 자신의 감춰뒀던 능력을 십분 발휘하며 만능 방송인으로 떠올랐다. 안정된 진행 능력을 보이면서 MC로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출연자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동시에 시청자들에게는 건강한 웃음을 전달하며 '방송계의 호동왕자'로 평가 받았다. 성실하고 겸손한 자세를 꾸준히 보이던 강호동은 지상파 각 방송사의 연말 연예대상을 거머쥐는 기염을 토했고, 현재까지 각 방송사의 메인 예능프로그램 MC를 맡으며 '국민 MC'로 각광을 받고 있다.


이만기(위)와 강호동은 은퇴 이후 변신에 성공하면서 제2의 성공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 출처=더팩트
이만기(위)와 강호동은 은퇴 이후 변신에 성공하면서 '제2의 성공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 출처=더팩트

◆ 20년 만의 재대결

지난 2011년 8월 KBS 예능프로그램 '해피선데이-1박 2일'에서 이만기와 강호동의 씨름대결이 펼쳐져 화제가 됐다. '1박 2일' 멤버인 강호동이 '손님' 이만기와 추억의 재대결을 벌였다. 1990년 현역 선수로서의 마지막 맞대결 이후, 무려 20년 만에 물러설 수 없는 승부가 펼쳐지게 된 것이다. 이만기와 강호동은 '씨름인'답게 샅바를 매고 모래판에 서자 '양보'라는 두 글자는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렸다. 두 사람 모두 현역 시절을 떠올리는 듯,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치열한 승부를 진행했다. 강호동은 '1박 2일'의 맏형으로서 동생들 앞에서 승리를 다짐했고, 이만기는 씨름 꿈나무들의 우상으로서 어금니를 꽉 깨물고 온 힘을 다했다. 피 말리는 혈전 끝에 가려진 경기 결과는 2-1로 이만기의 승리. 20년 전 프로무대에서 보여줬던 박진감 넘치는 승부가 그대로 재현되면서 시청자들에게 진한 감동을 전했다. 꾸준히 운동을 해 온 이만기 교수가 연예계 생활에 집중하고 있는 방송인 강호동을 제압하면서 자존심을 세웠다. 서로 몸에 묻은 모래를 털어주고, 물을 먼저 건네는 모습 등에서 진한 동료 의식도 느껴졌다. 두 사람의 맞대결로 '1박 2일' 시청률이 높게 치솟을 정도로 다시 펼쳐진 라이벌 대결이 큰 주목을 받았다.

이만기와 강호동의 20년 만의 재대결을 다시금 떠올리면서 '씨름의 부활'에 대한 기대와 아쉬움이 교차했다. 1980년대를 거쳐 1990년대 초반까지 민속씨름은 대한민국 최고의 스포츠 가운데 하나로 자리매김 했다. 야구, 축구와 비교해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부터 내리막을 걷더니, 아직까지 침체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여러 가지 악재들이 겹치면서 좀처럼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관중석이 가득 채워지며 뜨거운 열기를 내뿜었던 모습은 옛 일이 되어버렸다. 방송사들도 씨름을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어 한숨이 나온다. 대통령이 직접 관전하기 위해 방송시간을 조정하기도 했던 인기 스포츠의 위상이 완전히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마케팅도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고 있고 있으며, 스타들도 보이지 않는다. 간판급 선수들이 다른 격투기 무대에 진출할 정도로 경쟁력을 많이 잃었고, 이런 현상은 꿈나무 발굴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렇기 때문일까. 프로무대 1세대의 시작과 끝에 서 있었던 이만기와 강호동의 라이벌 구도가 그래서 더 그리운 듯하다. 대한민국 스포츠 선수들 가운데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이만기와 그의 철옹성을 무너뜨리면서 단박에 스타로 올라섰던 강호동의 숨 막히는 명승부의 추억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생생히 자리잡고 있다. 이만기와 강호동이 펼쳤던 모래판 라이벌전이 다시 재현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kkamanom@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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