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벌 열전 ②] '슛 도사' 이충희와 '농구 9단' 허재
입력: 2013.05.08 11:24 / 수정: 2013.06.04 15:45

이충희(왼쪽)와 허재가 현역 시절 악수를 나누는 모습. 이충희는 현대, 허재는 기아자동차 소속이었다. / 출처=스포츠서울 DB
이충희(왼쪽)와 허재가 현역 시절 악수를 나누는 모습. 이충희는 현대, 허재는 기아자동차 소속이었다. / 출처=스포츠서울 DB

[ 심재희 기자] 국내에 프로농구가 출범되고 난 뒤 외국인 선수들이 그 동안 볼 수 없었던 차원이 다른 기량을 발휘하면서 코트를 휘젓고 있다. 물론, 토종 선수들의 기량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하지만 타고난 신체조건과 선진농구를 익힌 외국인 선수들이 각 팀의 중심축으로 자리잡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KBL은 용병천하다', '외국인 선수 농사가 한 시즌을 좌우한다' 등의 이야기가 계속 나올 정도니 말 다 했다. 때문에 상대적으로 국내 선수들이 작아져 보이는 분위기 속에서 외국인 선수와 맞대결을 벌여도 전혀 밀리지 않을 것 같은 대한민국 농구계 전설적인 스타들이 회자되곤 한다. 그 가운데 가장 많이 사람들의 입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인물이 바로 이번 라이벌 열전의 주인공들이다. '슛 도사' 이충희와 '농구 9단' 허재. 한국을 넘어 아시아를 건너 세계 수준에 근접했다는 평가를 얻었던 농구계의 레전드 스타들. 지금 생각해도 정말 대단하고 자랑스러운 이충희와 허재의 이야기로 라이벌 열전 두 번째 문을 활짝 열어본다.

# '슛 도사' 이충희

1959년 11월 7일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난 이충희는 어린 시절 인천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인천에서 유년기를 보내면서 농구와 인연을 맺게 됐다. 농구 명문 인천 송도중학교에서 농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송도고등학교를 거쳐 고려대학교에 입학하면서 전국구 스타로 떠올랐다. 고려대학교 시절부터 이충희는 '슛 도사'의 위력을 만방에 떨쳤다. 어느 위치 어느 각도에서든 슛을 던질 수 있었고, 그의 손을 떠난 공은 어김없이 림을 통과했다. 182cm로 농구선수 치고는 그리 크지 않은 신장이었지만 탁월한 보디 밸런스와 부드러운 슛 터치, 그리고 무수한 반복 연습으로 일궈낸 놀라운 슛 적중률을 보이면서 최고의 득점력을 갖춘 슈터로 확실히 자리매김했다. 이충희가 뛰던 당시 고려대는 그야말로 무적을 자랑했다. 49연승을 질주하면서 전성기를 맞이했다.

대학 시절 이미 대한민국 최고의 슈터로서 입지를 굳힌 이충희. 그를 두고 실업팀들이 스카우트 전쟁을 벌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실업팀의 쌍두마차였던 현대와 삼성이 이충희를 잡기 위해 끊임없이 구애의 손짓을 뻗었고, 결국 이충희는 현대를 택하면서 '전설의 6번'(이충희의 등번호)의 시대를 열어젖혔다. 실업무대 데뷔 이후 이충희는 '슛 도사', '슛쟁이', '득점 기계'라는 여러 가지 별명을 얻었다. 꾸준한 노력으로 얻은 출중한 기량에 숱한 경기를 뛰면서 풍부한 경험까지 더해 최고의 농구스타로 우뚝 섰다. 농구대잔치 무대에서 6년 연속으로 득점왕 타이틀을 거머쥐었고, 한 경기 최다득점(69득점) 등의 기록을 수립하기도 했다.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득점행진을 이어가면서 소속팀 현대의 우승 청부사로 우뚝 섰다.

이충희는 현대 소속으로 실업무대 최고의 스타로 우뚝 섰다. / 출처=스포츠서울 DB
이충희는 현대 소속으로 실업무대 최고의 스타로 우뚝 섰다. / 출처=스포츠서울 DB


이충희는 대한민국 국가대표로서 태극마크를 달고도 코트 위에서 펄펄 날았다. 사실, 1980년대 한국농구는 세계 수준과는 거리가 멀었다. 기술과 파워에서 모두 세계적인 팀들보다 한참 모자랐다는 것이 중론이다. 하지만 이충희만은 달랐다. 다른 선수들이 들으면 서운할지도 모르겠지만 '군계일학'의 모습이었다. 중남미와 유럽의 거구 선수들을 상대로도 이충희의 득점력은 환하게 빛났다. 아시아를 넘어 세계 수준의 기량을 뽐내면서 NBA 스카우트들의 눈을 놀라게 만들기도 했다. 1986년 스페인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이충희는 개인 득점 2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대한민국 대표팀의 득점 대부분을 책임졌고, 아시아의 작은 나라에서 온 '에이스' 이충희를 향해 NBA의 댈러스 매버릭스 등이 강력한 러브콜을 보냈다. 하지만 병역문제로 이충희는 NBA 진출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1990년대 접어들어 부상으로 제 컨디션을 찾지 못한 끝에 1992년 국내무대 은퇴를 선언했다. 이후 이충희는 대만으로 날아가 플레잉 코치로 활약하면서 지도자 생활을 준비했는데, 전성기가 한참 지난 시점에서도 특유의 득점력을 발휘하면서 '신기의 슈터'라는 찬사를 받았다.

# '농구 9단' 허재

허재는 1965년 9월 28일 강원도 춘천에서 처음으로 세상의 빛을 봤다. 서울 용산중학교와 용산고등학교에서 활약하면서 '슈퍼스타'의 탄생을 알렸다. 슛과 드리블, 패스, 라비운드 등 모든 부분에서 수준급 기량을 나타낸 그는 '세기의 농구천재'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성장세를 거듭했다. 중앙대학교에 진학하면서 허재는 대한민국 농구의 간판스타로 발돋움했다. 저학년 때부터 선배들을 제치고 중앙대학교의 당당한 주전으로서 팀의 중심이 되었고, 2학년이던 1987년에는 국가대표 대표팀에 뽑혀 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 맹활약을 펼치며 농구팬들의 머릿속에 그의 존재를 확실히 각인시켰다.

대학 무대에서 중앙대학교를 무적의 팀으로 거듭나게 한 허재는 1987년 실업팀 입단을 준비하게 됐다. 허재를 잡기 위한 스카우트 전쟁이 펼쳐졌다. 당시로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액수인 억대의 몸값이 예상되면서 허재가 속하게 될 실업팀에 대한 관심이 드높았다. 결국 허재의 선택은 기아였다. 1986년 창단한 기아는 '허재 날개'를 달고 단숨에 최강의 실업팀으로 우뚝 서게 됐다. 허재는 기아 소속으로 만개한 기량을 마음껏 선보이면서 '농구대통령'으로 떠올랐다. 농구대잔치 8시즌 동안 무려 7차례 우승을 이끌면서 '기아 전성시대'를 활짝 열어젖혔다. 중앙대학교 선배인 한기범, 김유택, 그리고 후배인 강동희와 함께 '기아 왕조'를 완성시켰다. 이 때 나온 것이 바로 한국농구 역사상 가장 좋은 호흡을 보였던 조합으로 평가 받고 있는, 그 유명한 '허-동-택 트리오'다.

허재(오른쪽)가 은퇴 경기에서 전 국가대표 배구선수 장윤창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 출처=스포츠서울 DB
허재(오른쪽)가 은퇴 경기에서 전 국가대표 배구선수 장윤창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 출처=스포츠서울 DB

허재는 프로농구가 진행되던 1998년 오랫동안 정들었던 기아 유니폼을 벗고 나래 블루버드(이후 TG 삼보로 바뀜)로 이적했다. 이후 8시즌 동안 2524득점 1148리바운드 1572도움 508가로채기를 기록하면서 명불허전을 증명했다. 마흔에 가까운 나이가 되어서도 변함없는 카리스마와 출중한 실력으로 후배들과 함께 우승의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그리고 2004년 명예롭게 은퇴를 선언했다. 국가대표로서도 허재는 대한민국의 에이스 역할을 톡톡히 했다. 허재의 가세로 농구대표팀은 더 빠르고 강력한 팀으로 거듭날 수 있었고, '만리장성' 중국을 잇따라 꺾으면서 기세를 드높였다. 1990년 아르헨티나 세계선수권대회 이집트전에서 허재는 무려 62득점을 혼자 올리면서 세계선수권대회 개인 최다득점을 기록하기도 했다. 차원이 다른 허재의 기량에 '농구 9단'이라는 새로운 별명이 붙었고, 은퇴 시점까지 그는 '농구 9단'의 멋진 기량을 팬들에게 꾸준하게 펼쳐 보였다.

# 득점 기계 vs 올 라운드 플레이어

이충희와 허재는 지금도 대한민국 농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들로 꼽힌다. 이충희가 허재보다 여섯 살이 많아 함께 활약한 기간이 그리 길지는 않았다. 그래서 직접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의 전성기를 비교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은 것을 보면, 이충희와 허재가 전성기 시절 보여줬던 기량이 정말 대단하긴 대단했던 모양이다. 두 선수 모두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천재성을 발휘했고, 대학교 시절 이미 슈퍼스타로 떠올랐다. 또한, 실업무대에서 명성을 떨치면서 소속팀의 우승 청부사로 나섰고, 태극마크를 달고 대한민국 대표팀의 에이스 역할을 담당했다. 만약 두 선수가 여건이 허락되어 NBA에 진출했더라면, 성공여부를 떠나 한국농구의 수준을 더 빨리 끌어올려줬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아쉬움 섞인 의견이다.

'농구천재'로 평가 받았던 두 선수는 기본적으로 가드 포지션을 맡았다. 과거 포지션 분화가 확실하게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주 득점원' 정도로 인식 되었지만, 농구의 인기가 올라가고 다양한 전술이 유입되면서 '슈팅가드'라는 공통분모를 지니게 됐다. 농구선수로서 그리 큰 키가 아니었지만(이충희 182cm, 허재 188cm) 두 선수 모두 피나는 연습을 통해서 얻은 고감도 슛 감각으로 득점행진을 이어나갔다. 이충희는 30득점 이상의 경기를 수도 없이 펼쳤고, 허재는 챔피언결정전 경기 도중 혼자 17득점을 연속해서 기록하는 등 믿기 힘든 장면을 심심찮게 연출했다.

주요 포지션은 '슈팅 가드'로 같았지만 이충희와 허재의 플레이 스타일은 달랐다. 이충희가 득점에 완전히 특화된 '득점 기계'의 모습을 보였다면, 허재는 득점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다재 다능함을 보이는 '올 라운드 플레이어'로 위력을 더했다. 우선, 이충희는 '알고도 못 막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득점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교과서적인 폼과 빠른 타이밍으로 슛을 시도하며 상대 수비진의 방어벽을 무용지물로 만들었고, 비장의 무기인 '페이드 어웨이'로 수많은 득점을 뽑아냈다. 몸의 중심이 흔들린 상황에서도 마지막 슛 터치를 깔끔하게 가져가면서 기복 없는 득점행진을 펼쳤다. 단신의 약점을 확실한 기본기가 바탕이 된 정확한 기술과 높은 슛 적중률로 완벽하게 극복해냈기에 '슈팅 가드의 교본'으로 평가 받았다. 사실 이충희는 시력이 매우 좋지 않았다. 림이 여러 개로 흔들려 보일 정도로 조준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눈이 아닌 몸 전체로 득점에 대한 최고의 감각을 줄곧 유지했다.

허재는 코트 위에서 '팔방미인'의 모습을 선보였다. 득점이면 득점, 도움이면 도움, 리바운드면 리바운드. 모든 면에서 수준급의 능력을 보였다. 체공력이 좋아 상대 장신 센터진의 숲을 과감하게 정면 돌파하는 모습으로 농구팬들에게 감동을 선사했고, 정상급 포인트 가드를 능가하는 '매직 패스'로 도우미 역할까지 담당했다. 탁월한 위치선정과 점프력을 바탕으로 리바운드도 적잖이 잡아냈으니 허재의 팀 공헌도는 그 어떤 선수보다도 높을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허재는 슈팅 가드뿐만 아니라 포인트 가드, 스몰 포워드의 역할도 모자람 없이 해냈다. 타고난 농구 센스에 경험이 점점 더 더해지면서 그는 '올 라운드 플레이어'로 거듭났던 것이다. 상황에 맞게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할 줄 아는 허재는 '농구대통령'으로서 경기를 지배해 나갔다. 경기 외적인 부분에서 돌출행동을 여러 차례 보여 구설에 오르기도 했지만, 코트 위에서 '미친 존재감'을 발휘하며 팬들의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 허재였다.

# '이충희+허재'의 탄생을 바라며!

지나간 추억을 들춰내면서 이충희와 허재의 화려했던 선수 시절을 떠올리는 농구팬들이 아직도 매우 많다. 그 만큼 선수로서 이충희와 허재가 보여줬던 모습이 시대를 뛰어넘을 만큼 정말 대단했다는 의미다. 세계 무대에서 장신의 수비수들을 제치고 고군분투하며 득점을 올리던 이충희의 모습과 마술 같은 드리블과 스피드로 매경기 예술적인 플레이를 펼치던 허재의 활약상이 스페셜 동영상으로 제작되어 추억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기도 하다. 직접적인 비교에는 무리가 따르겠지만, 서두에 언급했듯이 두 선수가 전성기 시점에서 지금 프로무대에서 뛴다면 외국인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손에 땀을 쥐게 했을 것이라는 즐거운 상상이 다시금 머리를 스친다.

돌려놓고 보면, 두 선수가 선사했던 감동이 아직도 너무 진하게 남아 있어 아쉬운 생각도 든다. 이충희와 허재 이후에 그에 필적하는 선수들이 많이 나왔고, 또 나오고 있다. '국보급 센터' 서장훈을 비롯해 김주성, 이상민, 문경은, 현주엽 등 출중한 개인기량을 발휘하면서 스타로 성장한 선수들이 눈에 띈다. 하지만 뭔가가 부족한 느낌이다. 외국인 선수들의 가세와 스포츠 과학의 발전으로 국내 선수들의 개인 기량이 더 좋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이충희와 허재가 줬던 진한 감동만큼 강렬한 활약상은 나오지 않고 있다. 혹자들은 이런 말을 한다. 외국인 선수를 완전히 제압하려면 '이충희+허재'가 나와야 한다고. 선수 시절 1000개의 슈팅을 매일 성공하고 훈련을 마쳤던 이충희의 끊임없는 노력과 농구를 예술로 승화시켰던 허재의 천재성이 어우러진다면 농구팬들이 바라는 '슈퍼스타'가 분명히 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이충희도 나왔고 허재도 나왔으니 '이충희+허재'가 나오기를 바라는 것이 농구팬들의 허황된 욕심만은 아닐 게다.

이충희와 허재는 현역에서 은퇴한 이후에도 꾸준하게 농구와 함께 팬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지도자로서 후배들을 이끌고 있다. 유니폼을 입고 땀을 흘리지는 않고 있지만 '슛도사'와 '농구 9단'의 전진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선수 시절 보여줬던 멋진 모습을 감독이 되어서도 계속 펼쳐 보이고 있기에 두 사람이 진정한 한국농구의 전설로 인정받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한국농구를 논할 때 절대로 빠지지 않는 두 사람 이충희와 허재. 두 농구 전설의 라이벌 열전 2라운드가 감독 맞대결로 이어지고 있다.

허재(왼쪽)와 이충희는 KCC와 동부의 지휘봉을 잡고 다음 시즌 감독 맞대결을 벌이게 된다. / 출처=스포츠서울 DB
허재(왼쪽)와 이충희는 KCC와 동부의 지휘봉을 잡고 다음 시즌 '감독 맞대결'을 벌이게 된다. / 출처=스포츠서울 DB

kkamanom@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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