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 0. 결승전의 스코어로서는 좀 모자란 듯한 감이 있지만 경기 내용은 충분히 납득할 만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팬들이 스페인의 놀라운 테크닉과 물 흐르는 듯한 패스워크에 매료되면서도 독일의 우승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했던 것은, 월드컵 결승 총 6회 출전에 3회 우승, 유럽컵 5회(이번 대회를 빼고) 결승 진출에 3회 우승에 빛나는 독일의 저력과 관록을 떨쳐버릴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오늘 독일은 독일 답지않게 유달리 서두르는 문전 쇄도와 부정확한 패스, 프리킥과 코너킥 등 셋 피시즈(set pieces) 상황을 제대로 살려내지 못하는 등 결정적인 순간의 집중력이 부족했다. 거기다 이번 대회 내내 지적되었던 것처럼 독일은 장신 플레이어들의 신장과 점프력에 의거한 고공플레이를 효과적으로 활용하지 못하면서, 이상하리만큼 라틴적인 공간침투에 집착하는 유달스런 고집을 부린 듯하다.
독일은 미로슬라브 클로제를 비롯, 주장 미하엘 발락, 케빈 쿠라니 등 헤딩의 명수들이 즐비함에도 불구하고 측면으로부터의 예리한 크로스를 공급하는 일은 대단히 빈약했다. 스쿼드에 포함되지 못한 베른트 슈나이더가 아쉬울 정도로 고전적인 윙플레이가 펼쳐지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그건 반드시 과거 잉글랜드 축구처럼 ‘킥 앤 러시’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 루카스 포돌스키와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처럼 발재간을 겸비한 윙플레이어들의 측면돌파 위에, 스페인의 최종 수비라인과 골키퍼 사이를 갈라놓는 질 좋은 크로스가 있었다면 한 골 정도의 만회는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사후적인 분석에 다름 아니다.
결승에 오르기 전까지 독일의 상대진영 벌칙구역 침투는 종래의 독일 국가대표 스타일과는 약간 다른 매력적인 버라이어티(variety)들이 있었다. 하지만 키가 작은 미드필더들의 숏패스로 접근하는 테크닉 위주의 스페인을 초월하기 위해서는 일단 스페인 스스로가 결여된 부분을 특화시키는 전술적 배려가 있어야 했다. 하기야 평균신장이 작은 스페인이 이번 대회 전체를 통해 고공플레이가 별로 나쁘지 않았다는 점도 독일에게는 약 오르는 부분이기도 했다.
언제나 2위만 차지하는 미하엘 발락. 4-2-3-1의 공격형 미드필더를 맡은 발락은 중원의 볼포제션을 좀 더 지배하는 집중력과 장악력이 필요했었으나 지난 경기에 이어 그다지 인상적인 플레이를 보여주지는 못했다. 후반에 수비형 미드필더 토마스 힛츨스베르거가 나가고 공수연결의 주역은 토르스텐 프링스가 연출하도록 안배되었으나 발락의 공격가담과 전방 지휘역할은 그다지 나아지지도 못했다. 솔직히 말해 발락은 현 독일 대표팀의 유일한 월드 클래스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지단이나 피구의 반열에 결코 올릴 수는 없음을 재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스페인은 득점왕 다비드 비야가 불의의 부상으로 뛰지 못하게 되자 훼르난도 토레스 1명만을 전방 스트라이커로 박는 4-1-4-1의 시스템으로 돌아갔다. 스페인 국가대표가 지난 1-2년간 개발시켜온 이 시스템은 4-4-2와 4-1-3-2 등을 신축적으로 가미하면서 비교적 다양한 변화를 추구해 온 바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숏패스를 바탕으로 한 고도의 볼포제션 게임에 충실한 원칙을 고수해 왔다.
오늘 토레스가 전반 22분께 헤딩슛으로 골대를 맞추자 필자의 딸이 ‘저 애 오늘 일 낼 것 같다’고 하더니만 몇 분 후 기어코 결승골을 득점하는 집요한 승부욕을 보였다. 이 골은 지켜 본 사람이면 짐작하겠지만 골키퍼 옌스 레만이 앞으로 나오는 상황에서 대부분 오른쪽으로 한 번 접고 때려 넣는 것이 상식이나, 토레스는 수비수 필립 람보다 뒤늦게 스타트하면서도 긴 보폭을 이용해 한 발 앞서 감각적인 슈팅을 성공시켰다. 비야가 4골을 넣는 동안 단 1골로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던 토레스가 지금까지의 생애에 있어 가장 중요한 골을 집어넣는 감격적인 순간. 오늘과 같은 4-1-4-1에서는 비야와의 콤비 플레이 없이 혼자서 동분서주해야만 하는 극도의 체력전이 요구된 것이나, 마치 전성기의 바티스투타를 연상시키듯 정열과 파워가 넘치는 호쾌한 플레이를 구사했다.
스페인 수비라인은 그 어느 때보다도 침착한 응집력으로 독일의 배후침투를 철저히 차단하는 냉정함을 잃지 않았다. 특히 후반에 들어 독일의 동점골 가능성을 의식한 탓인지 전방으로의 이동을 적절히 자제하면서 가끔 토레스에게로 한 방에 질러주는 롱패스를 통해 그들이 숏패스 하나에만 의존하는 단조로움을 이미 극복했다는 증거들을 서서히 보여주기 시작했다.
거기다 끊임없이 하프라인을 넘자마자 좌우 대각으로 예리한 패스를 빠르게 찔러주는 미드필더들의 민활한 공격은 독일 수비수들의 대오를 흩트려 놓기에 충분한 위력이 있었다. 후반 25분 경 슈팅슈는 독일 4개, 스페인 11개. 그 후에도 스페인이 문전에서 좀 더 빠르게 쇄도했더라면 1-2개의 추가골이 터질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들이 빈번히 생겨났다.
오늘, 독일의 중앙수비수 페르 메테르자커는 스페인의 안드레스 이니에스타나 토레스의 침투를 방어하는데 매우 버거운 듯이 보였고, 양 사이드 백들의 공격가담 후 수비전환 템포는 스페인의 ‘환타스틱 4’(샤비-이니에스타-파브레가스-실바)의 편대비행을 막아내는데 번번이 타이밍을 놓치는 장면들을 연출했다. 대 터키전의 영웅 필립 람은 바로 그 실수로 후반에 마르셀 얀센과 교체되었다. 그렇다고 스페인의 빠른 템포가 저지되거나 특유의 숏패스 네트워킹이 중원에서 차단당하는 일은 없었다.
결국 공수의 안정과 미드필더들의 기술적 우위에서 스페인의 승리는 별로 이의를 달 수 없는 결과였다. 가장 많은 골을 넣었고, 가장 적게 실점했다. 이로서 스페인의 중앙수비가 약하다든지 카를레스 푸욜이 배후로 침투하는 공격수의 침투에 약하다느니 하는 지적들은 유로2008 저 너머로 사라졌다.
오늘 스페인의 우승은 유로84 결승 이래 24년만의 결승진출이자 유로64 우승 이후 무려 44년만의 쾌거였다. 오늘 이후 유럽컵에서는 최소한 ‘이제는 실망시키지 않는다’ 는 약속을 지킨 만큼, 다음은 월드컵에서 무적함대의 복권을 기도할 때다.
하지만 오늘, 다른 그 무엇보다 스페인이 얻은 중요한 또 하나의 소득은 사상 최악의 지역감정을 갖는 스페인이 진정한 하나의 국가대표를 바라보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소속의 선수들이 이제 정말로 하나의 강한 국가대표 아래 결집했다는 사실은 축구세계에 있어 독일통일이나 남북통일 이상의 극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 대회 유럽챔피언 그리스를 후보들만으로 깬 여유있는 그들, 88년 동안 벼려왔던 이탈리아전의 승리, 월드컵과 유럽컵 공히 세계 최다결승진출국인 독일을 실력으로 누른 그들..... 오늘, 진정으로 메이저 대회의 징크스를 날려버리면서 ‘테크닉’을 축구의 중심에 다시 아로새긴 젊은 그들을 칭찬해 주자. 바모스 에스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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