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특집 TF취재기-매치 코디네이터의 세계②] '매의 눈'으로 찾아낸 불법토토 중계자
입력: 2015.09.28 05:00 / 수정: 2015.09.30 12:02
어둠이 그라운드를 덮고서야 매치 코디네이터의 업무는 끝이 보인다. / 대전월드컵경기장 = 이현용 기자
어둠이 그라운드를 덮고서야 '매치 코디네이터'의 업무는 끝이 보인다. / 대전월드컵경기장 = 이현용 기자

23일 대전월드컵경기장. K리그 대전 시티즌과 포항 스틸러스의 경기 시작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심판진과 신명준(42) 한국프로축구연맹 리그운영팀장의 파이팅 소리가 경기 시작 전의 긴장감을 높인다. 고형진 주심 얼굴에 맺힌 땀방울이 반짝 빛난다. 경기 시작 7분을 남기고 심판진이 휘슬을 불어 선수들 출격 시간이 임박했음을 알린다. 대전과 포항 선수들이 그라운드 입장을 위해 모였다. '에스코트 키즈'와 사소한 장난을 치며 긴장감을 떨친다. 경기 시작 5분 전, 드디어 선수들이 그라운드에 선다.

신영준 팀장이 경기 시작 카운트다운을 하고 있다.
신영준 팀장이 경기 시작 카운트다운을 하고 있다.

◆ 경기 시작과 동시에 새로운 업무의 등장

오후 7시 30분, 단 1초의 오차도 없다. 우상일 대기심과 신 팀장이 시계를 보며 경기 시작 카운트다운을 하고 고형진 주심이 정각에 경기 시작을 알리는 휘슬을 분다. 신 팀장의 자리는 두 팀의 벤치 사이다. 대기심이 교체 번호판을 드는 자리 바로 뒤다. 경기가 시작되자 신 팀장의 눈빛이 바뀌었다. 입은 꽉 다물었고 눈은 더 진지해졌다. 신 팀장은 15분 동안 아무 말 없이 경기를 지켜봤다. 초반 15분의 분위기가 이날 경기의 거친 정도를 나타내기에 한 장면이라도 놓칠세라 집중했다. 15분이 지나자 신 팀장은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매의 눈으로 찾아낸 불법 토토 중계자

신 팀장은 관중석 곳곳을 누비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의 관중이 경기장을 찾았는지 사진을 찍었다. 간혹 경기장의 관중을 부풀려 발표하는 경우도 있기에 사진으로 남기는 작업은 중요하다. 그리고 신 팀장은 관중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의 눈은 어느 때보다 바빴다. 붐비는 곳부터 외진 곳까지 매의 눈으로 관중석을 훑었다.

이윽고 그의 시선이 한 남성에게서 멈췄다. 혼자 경기를 보러 온 열혈 팬처럼 보였다. 어색한 점은 이어폰을 꽂고 있는 것뿐이었다. 신 팀장은 조용히 그 남성의 뒤에 가서 앉았다. 그의 통화 내용에 귀를 기울였다. 혹시나 방해가 될까 봐 멀찌감치 떨어져 신 팀장과 남성을 관찰했다. 3분 가량 앉아있던 신 팀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법 토토 중계 의심자가 있으니 사람을 불러달라"는 그의 말에 경호팀은 바빠졌다.

신 팀장(왼쪽)이 불법 토토 중계자 뒤에서 통화내용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신 팀장(왼쪽)이 불법 토토 중계자 뒤에서 통화내용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아마 중국 유학생일 거에요. 자기가 하는 일이 불법인지도 모를 거에요."
그의 말은 정확했다. 중국어로 통화를 하던 남성은 경호팀에 의해 경찰로 넘겨졌다. 남성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사이의 앳된 얼굴이었다. 경찰에 제시한 운전면허증은 그가 중국 유학생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경찰은 남성의 한국어가 어눌해 의사 소통에 애를 먹었다.
"불법인 거 알고 있었어요?"
"아니요"
"아르바이트비 5만 원 받죠? 이거 하면 안 되는 거예요."
"6만 원. 몰랐어요."
순수한 얼굴로 아르바이트비를 말하는 그의 얼굴이 안타까웠다. 자신이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 자체를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올해에만 신 팀장은 불법 토토 중계자를 4명 적발했다. 이제 어느 정도 노하우도 쌓인 듯했다. 하지만 결코 신 팀장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안타까움과 책임감, 그 중간 정도의 감정이 느껴졌다.

◆ 거칠어지는 경기, 높아지는 긴장감

전반전이 끝이 났다. 골은 터지지 않았다. 경고가 3개 나올 정도로 치열했다. 양팀 감독의 항의도 있었다. 신 팀장은 전반을 마치고 심판진과 회의를 했다. 그곳에 함께하진 못했지만 후반 경기 운영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가 오갔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휘슬과 함께 후반전이 시작됐다. 후반 1분 신 팀장 옆에 있던 기자에게 공이 날아왔다. 살짝 발을 갖다 대 앞에 있는 선수에게 전달했다. 신 팀장은 "저는 공을 건드리지 않아요. 경기에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는 행동 자체를 하지 않으려 해요"라고 말했다. 기자의 행동을 나무라거나 채근하는 말투는 아니었다. 그의 말 속에서 자기의 편이 있어선 안 되는 상황에서 오는 외로움을 읽었다.

신 팀장이 두 팀 선수들의 충돌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
신 팀장이 두 팀 선수들의 충돌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

후반 15분 포항 김승대의 선제골이 터진 뒤 경기는 더욱 열기를 더했다. 덩달아 신 팀장도 바빠졌다. 양팀 벤치는 교체할 때 선수 이름이 적힌 용지를 신 팀장 혹은 대기심에게 건넸다. 번호판에 등번호가 새겨지고 교체는 신속하게 이뤄졌다. 경기가 거칠어지면서 황선홍 포항 감독은 심판에게 항의했다. 대기심이 흥분을 가라앉히려 했지만 황 감독은 고개를 저으며 신 팀장에게 "연맹!"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신 팀장은 눈을 바라보고 빈 웃음으로 상황을 넘겼다.

신 팀장은 경기에 대한 모든 것을 기록했다. '매치 코디네이터 리포트'뿐만 아니라 사소한 것들까지도 메모했다. 그러면서도 그라운드 상황을 놓치지 않았다. 후반 중반 두 팀 선수가 충돌하자 재빨리 휴대전화를 꺼내 들고 그 상황을 동영상으로 찍었다. 흥분한 선수들은 신 팀장을 보고 흥분을 가라앉혔다. 신 팀장은 노련하게 큰 싸움으로 번지지 않게 막았다.

전반 추가 시간 1분(왼쪽)과 선수 교체 카드.
전반 추가 시간 1분(왼쪽)과 선수 교체 카드.

◆ 경기 종료, 그라운드에 어둠이 내리다

결국 경기는 1-0, 포항의 승리로 끝이 났다. 끝까지 경기장을 지킨 신 팀장의 발걸음은 인터뷰실로 향했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그는 타 구장 경기 결과까지 기록했다. 모든 경기를 종합해서 보고하는 임무 역시 그의 몫이었다. 인터뷰마저 마무리되고 공식적인 그의 업무 종료는 선수단이 버스를 타고 경기장을 떠나는 순간이었다. 구단을 배웅한 그는 심판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심판진은 이날 경기에 대해 리뷰를 하고 있었다. 진지한 표정으로 회의를 하는 모습에 심판실을 나왔다. 그라운드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한치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치열한 전쟁이 펼쳐졌던 곳이 맞는가 싶었다.

업무가 끝난 뒤 신 팀장의 만보기에는 숫자 12902가 새겨졌다.
업무가 끝난 뒤 신 팀장의 만보기에는 숫자 12902가 새겨졌다.

◆ 끝나지 않은 업무, 축구에 미친 사나이

경기장에서 '매치 코디네이터'가 하는 업무는 만보기 숫자 12902와 함께 끝이 났다. 집이 가까웠기에 신 팀장과 함께 승용차를 타고 서울로 복귀했다. 차 안에서도 그의 일은 계속됐다. 약 1시간이 지나서야 그는 참았던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는 오후 11시가 넘어서야 휴게소에 들러 늦은 저녁을 먹었다. 축구 이야기와 함께 야간 고속도로를 달려 자정이 넘은 시간, 우리는 서울에 도착했다.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이불을 목까지 덮고 하루를 되새겼다. 참 길었던 하루다. 그리고 많은 얘기 가운데 신 팀장이 했던 단 한마디가 머릿속을 채웠다.
"정말 축구를 좋아하지 않으면 하기 힘든 일이네요."
"좋아하는 거로는 안 돼요. 축구에 미쳐야 할 수 있어요."

[더팩트ㅣ이현용 기자 sporgon@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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