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F확대경] '헤처모여식 시무식' 없다…'달라진' 재계 새해 첫날 풍경
  • 이성락 기자
  • 입력: 2020.01.03 06:40 / 수정: 2020.01.03 06:40
2일 새해 경영을 시작한 기업들이 전통적인 방식의 시무식에서 벗어나 공감과 소통을 강조하는 신년 행사를 개최했다. 사진은 SK그룹 신년회에서 행복을 주제로 패널 토론이 진행되는 모습. /SK그룹 제공
2일 새해 경영을 시작한 기업들이 전통적인 방식의 시무식에서 벗어나 공감과 소통을 강조하는 신년 행사를 개최했다. 사진은 SK그룹 신년회에서 '행복'을 주제로 패널 토론이 진행되는 모습. /SK그룹 제공

2020년 재계 시무식, 딱딱한 격식 벗고 공감·소통[더팩트ㅣ이성락 기자] 재계 시무식 풍경이 확 달라졌다.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집무상 새해 주의 사항을 설명하는 딱딱한 '훈화식' 시무식 대신 다양한 방식으로 공감하고 소통하는 시간으로 탈바꿈했다. 단상은 사라졌다. 경영진의 신년사를 과감히 없앤 기업도 있다. 일부는 오프라인 시무식을 열지 않고 영상 메시지를 통해 새해 인사를 전했다. 일률·획일적이었던 시무식이 각 기업이 추구하는 다양성과 개성을 드러내는 무대로 변화하고 있다는 평가다.

현대자동차그룹(현대차그룹)은 2일 오전 서울 서초구 양재동 본사 대강당에서 신년회를 개최했다. 시무식에서 신년회로 이름을 바꾼 것에서 엿볼 수 있듯 현대차그룹 신년회는 의례적인 식순과 무거운 분위기 없이 '새해맞이 모임' 성격으로 진행됐다. 미리 정한 식순이 없다 보니 신년회 종료 후 몇몇 직원은 주위 동료에게 "끝난 건가?"라는 질문을 하기도 했다. 한 부장급 직원은 "새해 회사 분위기가 많이 자연스러워진 것 같다"며 긍정적인 평가를 했다.

현대차그룹 신년회는 그야말로 '효율적'이었다. 10여 분 만에 끝난 '초간단 신년회'에서 시무식 단상, 주요 경영진을 위한 별도 의자 등은 보이지 않았다. 준비물이 사라지자, 주변을 정리하는 직원들도 없었다. 오직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만 무대에 올라 프레젠테이션 식으로 간단한 메시지를 남겼다. 그는 "떡국은 드셨느냐?"는 질문으로 말문을 뗐다. 이후 정의선 수석부회장은 "저는 어제 아침에 떡국을, 점심에도 떡국을 먹었다"며 농담을 건넸고, 대강당에는 직원들의 웃음소리가 울렸다.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수석부회장이 2일 오전 서울 서초구 양재동 본사 대강당에서 열린 신년회에 참석해 새해 인사를 전하고 있다. /현대자동차그룹 제공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수석부회장이 2일 오전 서울 서초구 양재동 본사 대강당에서 열린 신년회에 참석해 새해 인사를 전하고 있다. /현대자동차그룹 제공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이어졌다. 새해 목표를 공유하는 과정에서 분위기가 다소 엄숙해지자 정의선 수석부회장이 직접 "새해 첫날부터 긴장하지 말자"며 직원들 간 악수를 제안했다. 이에 직원들은 옆 사람과 악수하며 새해 인사를 전했다. 몇몇 직원이 머뭇거리자 "이것도 수평적 커뮤니케이션의 일환"이라며 정의선 수석부회장이 직접 분위기를 주도했다. 그는 "저부터 솔선수범해 여러분과 수평적 소통을 확대하겠다"며 "여러분은 스타트업 창업가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일해달라"고 당부했다.

이날 격식 없이 진행된 현대차그룹 신년회에서 다소 부자연스러웠던 부분은 오직 정의선 수석부회장의 '옷차림'이었다. 지난해부터 시행된 복장 자율화 제도로 직원들이 캐주얼 차림을 선택한 것과 달리 짙은 정장과 넥타이를 갖춘 탓이다. 이에 정의선 수석부회장은 자신의 복장에 대해 해명(?)하기도 했다. 그는 "저의 복장 때문에 직원들의 걱정스러운 눈빛이 느껴진다. 대한상의 행사 참석 이유로 정장을 입은 것이니 아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정의선 수석부회장은 또 "옷은 목적에 맞게 입으면 된다"며 효율성을 강조했다.

최태원 회장은 신년회에 참석했지만, 별도 신년사를 하지 않았다. 사진은 지난달 17일 서울 종로구 서린사옥에서 99회차 행복 토크를 하고 있는 최태원 회장. /SK그룹 제공
최태원 회장은 신년회에 참석했지만, 별도 신년사를 하지 않았다. 사진은 지난달 17일 서울 종로구 서린사옥에서 99회차 행복 토크를 하고 있는 최태원 회장. /SK그룹 제공

이날 오후 서울 광진구 워커힐호텔에서 2020년 신년회를 개최한 SK그룹은 파격적인 방식을 선택했다. 기업 행사로 제한하지 않고 일반 시민과 고객을 초청한 것이다. 사옥 인근 식당 종사자와 기관 투자자, 청년 구직자 등 다양한 이해 관계자들의 목소리를 청취하는 등 기존 시무식 형식을 깨뜨렸다. 이와 함께 최태원 회장의 메시지가 담긴 신년사도 없앴다. 신년회에 참석한 최태원 회장과 주요 경영진들은 이해 관계자의 의견과 제언을 경청하는 시간을 가졌다.

구체적으로 소셜벤처 지원사업을 하는 허재형 루트 임팩트 대표, SK텔레콤 사외이사인 안정호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교수, 전북 군산의 지역공동체 활동가 조권능 씨 등이 현장 발언을 했다. SK그룹에 바라는 점을 담은 이해 관계자들의 목소리도 영상을 통해 소개했다. 신입사원에서 임원까지 직급에 제한을 두지 않고 패널을 모집해 '2020 행복 경영'을 주제로 SK 구성원 간 대담도 진행했다. '행복 경영'은 기업 활동의 궁극적 목적을 '사회 구성원의 행복'으로 두는 최태원 회장의 경영 철학이다.

이처럼 SK그룹이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신년회를 도입한 건 SK가 지향하는 행복과 딥 체인지(근본적 변화)를 고객, 사회와 함께 만들고 이루겠다는 최태원 회장의 의지를 반영하기 위함이다. SK그룹 관계자는 "이번 신년회는 최태원 회장이 '행복 토크' 등을 통해 강조해온 행복 경영에 대해 구성원들이 느낀 소회와 고민을 공유하고 실행 의지를 다지는 자리였다"고 평가했다.

구광모 LG그룹 회장이 디지털 신년 영상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LG그룹 제공
구광모 LG그룹 회장이 디지털 신년 영상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LG그룹 제공

LG그룹은 당초 임직원 수백 명을 강당 등 한자리에 모아 시무식을 개최해왔다. 하지만 올해부터는 오프라인 시무식 자체를 없앴다. 대신 경영진의 주요 메시지를 영상에 담아 전 세계 임직원들에게 전달했다.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글로벌 LG 전체 구성원과 더 가깝게 소통하기 위함이다. 이는 평소 형식과 격식을 차리지 않는 실용주의적인 구광모 LG그룹 회장의 경영 방식과 맥을 같이 한다.

LG그룹은 구광모 회장 신년사를 담은 디지털 영상을 '새해 편지'로 불렀다. 구광모 회장은 이 편지를 통해 새해 인사를 전한 뒤 '고객 가치 실행' 의지를 다졌다. 구광모 회장은 "2020년 경영 환경이 그 어느 때보다 쉽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럴수록 저는 고객 가치 실천을 위한 LG만의 생각과 행복을 더욱더 다듬고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고객에게 감동을 선사하는 데 누구보다 앞서고, 더 나은 미래와 세상을 향해 함께 가는 따뜻한 기업을 다 같이 만들어 보자"고 강조했다.

이날 CJ그룹도 기존 시무식 행사를 진행하지 않았다. '글로벌 CJ'로의 도약을 지향하고 있는 만큼 구성원 일부만 참석하는 오프라인 시무식에서 벗어나자는 취지다. CJ그룹은 사내 방송을 통해 전 세계에 근무하는 임직원에게 손경식 회장의 신년사를 동시 방영했다. 이외에도 GS그룹이 허태수 신임 회장과 임직원이 대면하는 첫 공식 행사인 이날 '신년 모임'에서 기존 시무식 방식을 버리고 스탠딩 토크 방식을 채택, 임직원들과 자유롭게 소통했다.

재계는 시무식 풍경의 변화폭이 갈수록 커질 것으로 보고 있다. 큰 기업일수록 임직원 집중도가 높지 않아 특정 지역에서 진행하는 시무식이 공감대를 얻기 힘들고, 기업 내부 문화도 실리를 중시하고, 유연한 소통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계 관계자는 "세대교체와 조직 문화 개선 작업이 이뤄지면서 시무식도 젊어지는 모양새"라며 "각 기업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다양성과 개성을 잘 드러내는 수단으로 시무식을 활용할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격식과 틀은 과감히 파괴될 것"이라고 밝혔다.

rocky@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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