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남·정진이기자] ‘얼짱’. 이제는 하도 많이 쓰여서 진부한 단어가 됐지만 이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이들에게 자연스럽게 눈길이 가는 건 여전하다. ‘폴리캐스터(정치와 중계자를 합쳐 만들어진 신조어)’에도 얼짱이 있다. 특히 남성 중심인 정치학계에서 ‘얼짱’으로 불리는 그는 실력과 외모, 그리고 정치권을 꿰뚫어보는 직관력을 갖춘 전천후 폴리캐스터다.
그러나 시련도 있었다. ‘폴리캐스터’로 자리매김할 때까지 주변의 편견과 의도하지 않은 각종 루머로 인해 적잖은 마음의 상처를 받기도 했다. 바로 김민전 경희대학교 교수 얘기다. 그런 그가 <더팩트>에 폴리캐스터가 되기 전까지 겪었던 시련, 그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법 등을 낱낱이 공개했다. 그와의 인터뷰를 보다 생생하기 전하기 위해 일문일답 형식으로 풀었다.
#. 어린시절
-어렸을 때부터 정치에 관심 있었나.
“신문을 무척 좋아했어요. 제일 재미있었던 게 신문읽기였을 정도였으니까요. 학창시절에 시험기간 동안 신문을 못 볼 때면 모두 모아뒀다가 시험 끝나면 한꺼번에 읽을 정도였는걸요. 왜 좋아하는지를 묻는다면 천성이라고 말하고 싶네요. 사람들의 얘기, 사람들의 행동에 관심이 무척 많아요. 지금도 카페 같은 데 가면 옆 테이블 사람들은 무슨 얘기를 하고 있을까 하는 호기심에 귀를 쫑긋 거릴 정도인데요.(웃음)”
- 뒷면(스포츠, 연예면)만 읽은 것은 아닌가.(웃음)
“아니에요.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었어요. 가장 재미있었던 게 정치기사였어요. 정치기사는 아버지와 함께 읽으며 기자가 왜 이렇게 썼을까를 유추하는 게 재미있었죠. 지나온 한국 정치사를 보면 어느 드라마보다 더 극적인 드라마적 요소가 많은 것 같아요. 반면 가장 어려웠던 것은 사회기사였어요. 가슴 아픈 기사들이 많아서 오래 읽기가 싫어했어요. 어린 마음에도 그렇게 힘든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 너무 슬펐던 것 같아요.”
- 말을 참 조리 있게 잘한다. 학창시절 리더였을 것 같다.
“의도했던 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초등학교·중학교 때 반장을 계속 했어요. 그 당시 여학교에서는 공부 잘하는 학생과 리더십 포지션이 비례했죠. 공부를 잘하는 애들이 조금 더 여성성을 버렸고 이 때문에 더 리더십 포지션에 가깝게 있는 경우가 많았죠. 저도 그 중 한명이었지 않나 싶어요.(웃음)”
#. 학창시절
- ‘반장’이었어도 대학에 가는 건 어려웠을 듯하다. 시대적 환경도 한몫했을 수도 있다. 어려움은 없었나.
“대학입학은 어렵지 않았어요. 여자든 남자든 좋은 대학을 간다는 건 부모로서 자랑이지 않나요.(웃음) 그래도 부산에서 서울로 혼자 올려 보내는 게 편치 않았던지 할머니와 같이 상경해 지내게 됐죠. 학교 다니면서 시위하는 틈에 껴서 짱돌 몇 번씩은 던졌지만, 운동권에 깊게 관여를 안했던 이유 중의 하나가 할머니와 같이 살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정치에 관심이 많으면 학생운동에 눈을 돌리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행동보다는 분석을 좋아했어요. 대신 구경은 많이 했죠. 1987년에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 같은 정치가들이 여의도에서 100만 명씩 모아놓고 운동했을 때, 지지하는 정치성향과는 상관없이 구경을 다니곤 했어요. 그 때는 여의도 한 번 들어오면 길 막히고 버스도 없어서 광화문까지 걸어나가야 했었죠. ‘월드컵 분위기’를 연상하면 더 쉽게 이해될 거예요.(웃음)”
-그 당시 어떤 분석을 했나.
“1987년 대선 때 노태우 전 대통령이 당선된 것이 개인적으로 큰 충격이었어요. 그래서 그 당시 제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달았죠. 최다득표제가 아니라 지금처럼 과반수 이상을 얻어야 당선되는 제도였다면 아마 노태우의 시절은 없고 바로 김영삼, 김대중 정권으로 넘어가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유학생활
- 외교학과에 진학한 뒤 서울대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천성은 속일 수 없나보다. 이 때문에 미국 유학을 떠났나.
“그렇다고 볼 수 잇죠. 당시만 해도 한국 정치학계에서는 ‘사회주의가 좋은가, 아니면 자본주의가 좋은가’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어요. 제도라는 것은 군화발로 밀면 되는 것이지 중요한 게 아니었던 시절이죠. 하지만 민주화로 변화하면 할수록 게임의 룰이 중요한 만큼 소위 민주주의 국가라 말하는 미국 정치는 어떻게 움직이는지 직접 체험하고 보고 싶었어요.”
- 집안의 반대가 심했을 텐데.
“엄청 심했어요. 그 때만 해도 ‘여자가 유학을 가면 시집을 못 간다’는 분위기였거든요. 때문에 어머니가 울고불고 난리셨죠. 하지만 전 이미 그 시나리오까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웃음) 미리 학교 수속을 끝내고, 비행기표까지 사놓고서 ‘통보’한 거죠. 반대하셨어도 그 때는 무조건 유학을 가야했어요.”
- 실제로 봐 보니 어떠했나.
“놀라운 장면들을 많이 목격했어요. 예를 들면 제가 머물던 아이오와주만 해도 아침마다 그 지역 주민들이 커피 한 잔씩 들고 와서 지역정치 현안을 논의했거든요. 선거 때마다 집안에 담요를 돌리고 봉투를 뿌리던 한국정치와는 너무나도 달랐어요. 누가 떠밀어서가 아니라 자기가 먹을 것을 사들고 와서 자기의 입장을 얘기하는 모습은 한국에선 상상도 못했던 정치 환경이었죠.”
- 유학생의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충격의 연속이었지만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클린턴 전 대통령과 함께’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겠네요.(웃음) ”
- ‘클린턴 전 대통령과 함께?’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
“우리나라에는 스캔들 사건을 일으킨 미국대통령으로 더 유명하지만 저는 클린턴의 젊은 정치를 보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90년에 민주당 후보가 되기 위해 사전작업을 하고 있던 클린턴 전 대통령은 제가 생각하던 정치인의 이미지를 바꿔놓았죠. 당시만 해도 제가 가지고 있는 정치인 이미지는 ‘잘 먹고 잘 사는 고양이’ 이른바 ‘뚱뚱한 고양이’였거든요. 하지만 클린턴은 정치에 대해서 너무나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열정을 가진 젊은 정치인이었어요."
-한 가지 사례를 들어달라.
“클린턴이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2년 후에 있었던 양원 합동연설 때였어요. 그 당시 클린턴이 ‘대통령인 내가 잘해서 정치가 잘됐다’고 말하지 않고 ‘재정적자를 이겨내는데 내각의 장관이 잘해준 덕분이다’며 그 장관을 일으켜 세워 박수갈채를 보냈어요. 이기적이지 않은 정치인, 자기사람 관리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정치인이었죠.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어요.”
#. 국회
- 유학생활 이후 국내에 복귀했다. 그 이후의 생활은.
“그 당시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어요. 한국에 들어왔을 때 서른이었는데 ‘나이 서른의 여자 박사를 누가 뽑아줄 것인가’에 의문점이 들었어요. 그래서 결국 국회로 들어가게 됐죠. 국회사무처 연수국 교수 등을 지내면서 한국 정치의 현실을 볼 수 있었어요.”
- 국회 내 생활에 대해선 만족하나.
“국회에서 현장을 직접 접했다는 게 큰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어요. 국회에 있으면서 미국에서 본 제도를 같이 비교경험할 수 있는 순간도 많았고, 그것을 제안할 수 있는 기회도 많았어요. 국회에서의 경험이 제가 다른 학자들과 좀 다르게 말할 수 있었던 ‘교두보 역할’을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이 때문에 방송출연이 잦아졌던 것 같네요.(웃음)
# 방송
- 내공을 인정받아서 방송까지 출연하게 됐는데.
“2001년 후반에 소속을 국회에서 경희대로 옮기고 난 후 처음으로 심야토론프로그램에 출연했어요. 어차피 제가 아는 얘기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부담감은 없었죠. 하지만 그 때 나이가 서른 일곱살이었어요. 젊은 여자가 나가서 정치 얘기를 하는 게 호기심의 대상인 동시에 거부감을 주는 대상이기도 했던 모양이에요. ‘여자가 머리를 풀고 나가면 나라가 시끄럽다’, ‘왜 비스듬히 앉았냐’며 야단치는 전화도 많이 받았어요.”
- 처음으로 진행을 맡았던 '추적 60분'이란 프로그램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역시 남의 밥그릇은 함부로 넘봐서는 안된다’는 것을 느꼈어요.(웃음) 처음 방송 제의가 왔을 때 부산 사투리 때문에 거절했어요. 그런데 '대본이 있기 때문에 더 쉽다'며 3주 정도 설득을 당하다 보니 ‘한번 해볼까’라는 호기심이 생겼어요. 근데 결과적으로는 대본이 있는 게 더 어렵더라고요. 대본을 읽는 데에 연기력이 필요했거든요. 학교에서도 말만 해봤지 글을 읽어보진 않았잖아요. 결국 망했어요.(웃음)"
- 괴소문에도 시달려야 했는데.
“방송 끝나고 게시판에 불이 났어요. ‘이게 컨셉이냐’부터 시작해서 ‘PD와 진행자의 관계를 추적하라’ 등 말들이 많았어요. 고민 끝에 하루빨리 그만두기로 결심했지만 방송쪽에선 실패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 했어요. 다행히 몇 개월 안 가서 2002년 월드컵이 있었고, 프로그램이 한 달 쉬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빠졌죠. 그리고 다시는 방송을 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어서 방송을 다시 시작하게 됐나.
“처음에는 방송은 보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왜 실패했을까’ ‘다시하면 잘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던 중 2004년에 ‘YTN 쟁점토론’ 제의가 들어왔고, 오프닝을 제외하고는 제 마음대로 진행할 수 있는 형식이라 용기를 냈어요. ‘추적60분’ 때보다는 조금 나았던 것 같아요. 대본이 거의 없었으니까요.(웃음)"
#. 여성 평론가
- 유학 후 국내에서 활동할 당시 여성이라는 편견 때문에 힘들어했다. ‘여성 폴리캐스터’로서 살아남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요즘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지만 처음에는 교수가 아닌 연예인 취급을 받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오로지 외모나 옷차림 등에만 관심이 쏠렸던 거죠.”
- ‘여성 폴리캐스터’에 대한 시선은 어떠한 것 같냐.
“한국은 굉장히 '순결주의'를 원하는 사회입니다. 때문에 방송에 나오고, 젊은 사람이 신문에 활발하게 기고를 하는 활동을 일부에서는 곱게 보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공부는 언제하냐’는 질타가 이어졌던 터라 젊었을 때는 그게 고민이었죠. 하지만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면서 사는 게 좋다'는 생각을 해요. 그러면 마음이 편해요.(웃음)"
- 앞선 질문의 연장선상으로 남성중심 정치학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법은.
“30대는 죽기 아니면 살기로 덤볐죠. ‘남자에게 지지 않겠다’, ‘여자이기 때문에 쉬운 길로 돌아가지는 않겠다’는 등의 생각을 했어요. 남자들과 경쟁하겠다는 결심도 했죠. 하지만 2004년 뇌종양 판정을 받고 한 번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니 생각이 바뀌더라고요. 이른바 ‘너무 오기로 버티려고 하지 말자’라는 생활신조가 생긴 셈이죠.”
- 방송에 출연하는 정치평론가의 매력은 무엇인가.
“가장 큰 매력은 많은 사람들에게 제 생각과 의견을 말할 수 있다는 거예요. 유권자들이 판단할 수 있는 정보를 전달해주는 것, 나쁜 정보들이 범람하지 않도록 하는 역할자로서의 매력이 있죠. 특히 정치개혁 토론장에서 보람을 느낄 때가 종종 있어요. 그곳에서 제공하는 의원들의 자료집에 제 글이 들어가 있을 때, 제 생각이 그 사람들을 통해서 제도화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때 만족감과 성취감을 느끼죠.”
- 평론가로서의 어려운 점은.
“요즘 같은 시대에 평론을 하고 있다는 거예요. DJ시대까지만 해도 옳은 말을 하면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하지만 그 후로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중립에 서 있는 사람들의 입지가 굉장히 좁아졌죠. 어떻게 하면 양극화로 갈린 사람들을 중간으로 어떻게 끌어들일 수 있을까가 가장 큰 어려움이죠.”
#. 앞으로 계획
- 앞으로의 계획은 어떤가.
“계속 폴리캐스터, 평론가로서 활동해야죠."
-한 언론 인터뷰에 ‘죽어도 정치는 안할 것’이라고 말했는데
“솔직히 인간사회에 ‘죽어도’라는 말은 없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돌이켜보면 ‘정치에 가담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하는 때가 많지 ‘정치를 할 걸’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어요. 저는 누가 당선이 될지 가장 먼저 집어내지만, 결국 그 당선자를 가장 먼저 싫어하게 되는 저를 발견하거든요. 그래서 아마 정치는 안하게 될 것 같아요.”
- 마지막으로 진행해보고 싶은 프로그램이 있다면.
“지금까지 어떤 방송을 ‘하고 싶어서’ 한 적은 없어요.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아요. 기회가 되고 같이 하는 분들이 좋으면 모르겠지만요. 언젠가 방송에 관여했던 한 교수가 ‘나이 오십 지나서 방송하는 건 추하다’라고 얘기를 하셨어요. 제 나이 오십이 되려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 후에 어떻게 해야 할지는 그 때 가서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요.(웃음)"
<사진=김용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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