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캐스터] 행시출신 개그맨 노정렬 "공중파 못나와도 정권비판 개그 쭉"
입력: 2010.07.29 15:27 / 수정: 2010.07.29 15:27


[박형남 정진이기자] 여름 장맛비가 쏟아지던 날 영등포 민중의 소리 방송 스튜디오를 찾았다. 아담한 사이즈의 스튜디오에서는 대략 6~7명의 기자와 출연자들이 방송 준비를 하느라 분주한 모습이었다. 차장 밖으로 내리는 빗소리와 함께 아침의 몽롱함을 확 깨는 발랄한 음성도 함께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하늘색 셔츠에 선글라스를 쓴 개그맨 노정렬이 걸어오고 있었다. ‘비 오는 날 선글라스’라니, 그의 특이한 행보를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역시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간단한 인사를 마치고 스튜디오 한 켠에 자리를 잡았다.

노정렬은 인터뷰 시작과 동시에 역대 대통령들의 성대모사로 분위기를 후끈 달궜다. 스튜디오를 한 바탕 웃음바다로 만든 후 그는 그간 감춰왔던 속마음을 살며시 내비치기 시작했다. 체제에 순종하던 자신이 운동권이 된 이유. 행정고시에 붙어 공무원을 하다 개그맨이 된 이유, 그리고 방송 출연 문제 등… 자신을 향해 쏟아졌던 관심과 비판에 할 말이 많은 듯 보였다.

'체제꼴통 모범생'서 '문예활동 운동권'으로…"내 선택 후회한 적 없어"


노정렬은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초·중·고 12년을 체제에 순종하며 살았다고 한다. 자칭 '체제 꼴통'이라하는 그는 학창시절에 반에서 1~2등만 하는 모범생에 반공웅변대회에 앞장서 나가는 학생이었다. 평범한 대학생활을 꿈꾸며 서울대에 입학한 노정렬은 학교를 다닌 지 6개월 만에 뼛속까지 바뀐 전혀 다른 사람으로 태어났다.

"학교 안에 있는 잔디밭 나무 그늘 좋은 곳에서 책을 읽으려다 이렇게 됐어요.(웃음) 당시만 해도 학교에 경찰이 있어서 나무그늘 좋은 곳은 다 그들의 차지였었거든요. 비켜주지 않으려 한 번 덤볐다가 흠씬 두들겨 맞고 그 때부터 반항아로 다시 태어났죠. 더 이상 내가 알던 사회는 없었죠."

그 때부터 문예 선전 선동 활동을 시작했다. 풍물패 마당극 연극을 하면서 온 몸으로 체제에 맞섰다.(노정렬은 이 얘기를 하며 공소시효를 계산하더니 이젠 자유인이라며 껄껄 웃었다) 대학을 졸업하면서는 행정고등고시(이하 행시)를 준비했다. 사회 조직의 일원으로 사회를 변화시키겠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그 신념은 오래가지 못했다. 1994년 행시에 합격한 뒤 1년만에 공무원을 그만뒀다. 그에게 후회되지 않냐고 물었다. 이에 대해 노정렬은 “전혀요. 오히려 그 당시 동사무소부터 중앙부처까지 돌아다니며 조직을 익혔던 게 시사풍자개그를 하는데 큰 도움이 돼요”라고 답했다. 노정열이 MBC 7기 공채 개그맨으로 변신한 이유는 단순하다. 1996년 시사풍자개그 분위기가 가라앉자 시사풍자개그 맥을 잇고 싶어했기 때문. 또 시험에 워낙 강한 타입이라는 점도 작용했다는 게 그의 회고담이다.


15년 간 시사풍자 개그 한 우물…"요즘 이 정부에선 ‘방송 불가’ 고생"

이후 노정렬은 초지일관 시사풍자개그를 고집했다. 인기를 유지하기 위해 시대의 흐름에 따라 개그 스타일을 바꾸기보다는 자신만의 차별된 웃음 코드를 계속 유지하는 편을 택했다. 그렇다고 개그맨에만 국한되지도 않았다. 넘치는 끼로 98년부터 2002년까지는 한밤의 연예가 중계 리포터를 맡아 맹활약을 펼쳤다.

"지난 15년 간 시사풍자 개그를 계속 해왔던 건 국민들이 사회적으로 불만을 품고 있는 부분을 웃음으로 승화시켜 함께 나누길 원했기 때문이었어요. 한마디로 카타르시스를 제공하기 위함이죠. 저도 그러면서 속 시원함을 느끼고요. 리포터 활동은 그 자체가 재밌어서 오래했죠. 돈 때문에 한 건 절대 아니었어요.(웃음)"

방송을 하며 있었던 이런저런 추억을 얘기하며 노정렬은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가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이번 정부에서는 시사풍자개그가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란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새 정부가 들어선지 약 3개월 만에 그가 출연하던 방송프로그램 '폭소클럽2'가 종방했고, 그 이후에는 현재까지도 공중파 방송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폭소클럽2가 그렇게 시청률이 안 나오던 프로그램도 아니었는데 갑자기 끝을 낸다니 뭔가 있다 싶은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인지 이번 정부에서 제가 공중파 방송에 나가는 걸 기대하긴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혹자는 내 개그 수위가 너무 높아서 공중파에는 나올 수 없다고 하지만 그건 잘못된 말이거든요. 더 많은 대중과 내 개그를 나눌 수 있다면 얼마든지 수위 조절은 할 수 있는 준비가 돼 있다고 늘 말하고 다니는 터라…아쉬움이 많이 남죠."

그래서일까. 그의 말에는 공중파에 대한 그리움이 물씬 묻어났다. 가슴 속 깊이 쌓아뒀던 말들을 내뱉기 시작했다. 그 순간만큼은 ‘인간 노정렬’로 느껴졌다. 그는 “공중파에 출연하고 싶지만 진출할 수가 없어요. 개그 수위가 높아서 그런 것도 아니에요. 다만 저는 공중파 방송 배제 대상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죠”라며 “공중파에서 저를 받아줄 수 없는 이유는 이미 방송사 등에 인사스크린이 됐기 때문이에요. 이 때문에 제가 아무리 공중파로 돌아가고 싶다고 해도 절대로 돌아갈 수 없어요. 정권에 대한 비판을 많이 하는 저를 어느 누가 반기겠어요”라고 속내를 털어놨다.


꽉 조인 숨통 틔어준 인터넷 방송…"협박 받아도 앞으로 40년 더!"

공중파 방송에서 외면당한 노정렬이 선택한 건 인터넷 방송이었다. 게다가 ‘폴리캐스터’로서의 삶을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이런 차원에서 그는 지난해부터 벌써 1년이 넘게 시사평론가 최요한과 '노정렬-최요한의 개구쟁이'를 진행하고 있는 것. 시사토크쇼인 이 인터넷 방송은 민중의 소리가 담당하고 있는 데 노정렬은 여기서 꽉 막혔던 숨통을 틔웠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민중의 소리를 택한 건 여러 매체 중에서 이게 가장 재야에 가깝지 않느냐는 생각 때문이었죠. 협박도 수도 없이 받았죠. 방송 프로그램 게시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욕들이 즐비해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제가 공중파 방송에서 풍자개그 못하는 것 자체가 협박이죠. 제 입에 재갈을 물리겠다는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노정렬은 인터넷이 발달한 것을 너무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가 진행하는 인터넷 방송은 때때로 인터넷이 조회수가 3만이 넘게 나올 정도로 뜨거운 인기를 얻고 있기 때문이다. 노정렬은 거리에 일주일동안 10만 명만 나와 있으면 그게 혁명이라며 4천 800만 명의 시민 중에 3만은 매우 의미 있는 숫자임을 강조했다.

“풍자개그를 그만 둘 수 없는 제 마음은 조금 오버해서 말하면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그 마음과 같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선량한 국민들이 일제시대를 사는 것 같은 게 요즘입니다. 제가 총은 안 쏘지만 눈총을 쏘고 폭탄은 못 던져도 지탄을 던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올해 마흔인데 앞으로 딱 40년만 더 방송해보렵니다.(웃음)”

<사진=이호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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