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남기자] 6.2 지방선거 이후 이재명 성남시장 당선자만큼 언론의 조명을 받는 기초단체장이 드물다. 호화청사 매각이란 메가톤급 뉴스를 던진데 이어 초등학교 졸업 후 공장근로자로 살아온 그의 험한 성장과정이 알려지면서 '의지의 한국인'(?)으로 떠올랐다. 마치 준비된 시장처럼 선거 이후 시정 구상을 서슴 없이 내 보이고 있는 이 당선자는 15일 인수위 사무실을 찾았을때도 민원인들에 둘려 싸여 있었다. 판교 개발과 함께 100만명 시대를 맞이한 성남시는 말 그대로 '할일 많은' 곳이었다.
“이주대책을 꼭 세우겠다. 그러나 당장은 힘들다” 이 당선자의 설득에 주민들은 “3년이고 5년이고 대책을 세워주기만 하면 기다려줄 수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는 “집 한 채가 달려있는데 시민들에겐 큰 문제다”라면서 "현장에서 몸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아버지에겐 항상 '반항아'…"가족들보다는 남이 먼저~, 생활력은 최고"
남의 말을 잘 듣고 현장을 중시하는 그의 철칙은 그의 아버지 성품과 무관하지 않다. 이 당선자의 아버지는 남의 일에는 발벗고 나서지만 가족에게는 엄혹했다. 남의 뜻을 존중하니 이장까지 지냈지만, 늘 손해보는 스타일이었다.
“경북 안동 산골짜기에 살다가 성남시 A시장에서 청소부 일을 하셨어요. 청소부 일을 하시면서도 동네 골목을 다 쓸고 다니셨죠.(웃음) 집안일보다 남의 일을 열심히 하셔서 제가 불만이 많았어요. 더욱이 어린 제 생각에 가족들에게 부당하다 싶을 정도로 엄하셔서 반항적인 때도 있었죠. 지금은 영남대학교로 통합된 대구 청구대학교를 재학하시다 중퇴했지만 당시로서는 학력이 높으신 분이었죠. 하지만 자녀가 7남매인데다 경제적으로 어려워 공부시킬 생각은 못하셨던 것 같아요.
이 탓인지 이 당선자 형제들은 검정고시 출신이 많다. 이 당선자가 검정고시로 중고교 과정을 마쳤고, 형과 남동생도 검정고시 출신이다. 형제들은 대다수가 국·중졸이 최종학력이지만 우애는 남달랐다. "다들 공장생활도 하고 직장생활을 하며 서로를 도왔어요. 7남매 중 대학을 간 사람은 저와 형님뿐이죠. 어머니도 힘들어하셨는데 아버지께 정을 느끼지 못하셨어요. 아버지는 애정 표현에 서툴렀던 같아요. 지금 제가 가장이 되어 보니깐 아버지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은데, 아버지의 삶 자체가 가슴이 아파요. 제가 사법시험에 합격했던 때 위암으로 투병하시다 55세에 생을 마감하셨어요. 혼수상태에서 몇 달 버티다 가셨는데 임종은 지켰어도 마지막 말씀은 듣지 못해서 더욱 마음이 아픕니다.”
13살 무렵 시골 생활을 청산하고 올라온 성남은 당시 전형적인 빈민 지역이었다. 이 당선자의 아버지가 미리 빵배달을 하며 자리를 잡았고, 그 후 온 가족이 따라 올라 왔다. 아버지는 시장청소부, 어머니는 시장 화장실을 지키고 10원씩 받으며 생활했고, 나머지 가족들은 공장 등지를 다니며 노동자 생활을 했다. 힘들었던 당시 이 당선자의 꿈은 두 가지였다고.
초등학교 이후 공장 생활…팔 비뚤어지는 등 온 몸이 만신창이!
“집사람은 이런 얘기를 하지 말라는데 저는 숨기질 못해서요.(웃음) 사실 그 당시 꾸던 꿈 두 가지를 이뤄서 다른 사사로운 욕심이 없기도 해요. 첫째 꿈은 냉장고에 신선한 과일을 넣어두고 제가 먹고 싶을 때 꺼내 먹는 것이었어요. 아버지가 시장 청소를 하시면서 상인들이 버린 과일을 주워 오셨었거든요. 그래서 신선한 과일이 참 먹고 싶었죠. 두 번째는 노가리에 생맥주를 시켜먹는 것이었어요. 일을 하며 20만원을 받아 생활비를 보내고, 형제들 공부도 돕는다고 저는 늘 '깡소주'를 먹었거든요. 생맥주에 노가리를 안주 삼아 먹는 게 어떤 느낌인지 궁금했었죠.”
초등학교 시절을 안동에서 보낸 이 당선자는 성남으로 이사 오기 전까진 개구쟁이였다고 한다. 산골짜기 개구리를 잡으러 다녔고, 워낙 장난기가 심해 화장실 청소를 도맡기도 했다. 장난을 치다 혼이 많이 났던 그는 “나도 나중에 한번 때려보고 싶어” 선생님의 꿈을 가질 정도로 철 부지였다. 그런 그는 성남으로 올라온 후 공장 직공으로, 곧바로 생계에 뛰어들었다.
어린 나이에 뛰어든 사회에서 그는 상처가 많았다. 고무공장, 함석공장에 다니며 손에 자잘한 상처가 생겼고, 야구 글러브 공장에 다니다 팔을 다친 탓에 지금도 팔이 약간 비뚤어져 있다. 공장에 다니며 화공약품 냄새를 너무 많이 마신 탓인지 냄새를 잘 맡지 못하는 직업병도 얻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반 지하 셋방에서 여덟식구가 먹고 살기 위해선 일을 해야 했다. 그래도 그 안에서 꿈은 시들지 않고 쑥쑥 자라났다.
“제 인생 방향에 큰 영향을 준 기억이 있어요. 함석공장, 냉장고 만드는 공장에 다닐 때인데 성남시 산이 민둥산이었어요. 산에 진달래가 많이 피어 진달래를 주식으로 먹고 살기도 했죠. 어느 날 점심시간에 갑자기 산에 가고 싶었어요. 공장 바로 뒤가 산이니 점심시간에 다녀올 수도 있는 것인데 철문을 잠그고 못 나가게 하더라고요. 출근한 후 퇴근 때까진 공장문을 잠궈 놨었는데 정말 무슨 수용소 같았어요. 그렇게 갇혀 있다는 느낌, 제가 누릴 수 있는 휴식시간인데도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 자유를 박탈당한 그 기분이 좋지 않았어요. 자유롭게 살고 싶었죠.
영혼의 상처를 입은 이 당선자를 자극하는 계기가 또 있었다. "구타로 인해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어릴 때 공장 다니면서 구타를 많이 당했어요. 군대문화가 공장으로 옮겨와서 아침저녁으로 구타하는 게 스포츠고, 오락일 정도였죠. 제가 막내다 보니 참…. 그런데 어느 순간 보니 저를 때리는 최상급자가 고졸 대리였어요. 저는 그 때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관리자가 될 수 있나보다 생각했죠. 그렇다면 야간학교를 가야하는데 이를 위해선 검정고시를 봐야 한다는 거예요. 더군다나 정상적인 야간학교가 아니라 전수학교, 공민학교였어요. 그래서 그럴 바에는 그냥 검정고시를 보자 해서 중·고 검정고시를 봤는데 바뀐 게 하나도 없더라고요.(웃음) 어쨌든 저는 운이 좋은 사람이에요. 그 당시 제 삶 자체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거든요.”
검정고시 통해 '중앙대 법대' 장학생으로 입학…"장학금은 가족 생활비로"
자신의 삶을 받아들일 수 없어 개척하기 시작한 어린 소년. 이 당선자는 결정적으로 군사 쿠데타를 겪으며 삶의 방향을 바꿨다. 군사정권의 첫 개혁조치가 본고사 폐지였다. 81년부터 예비고사, 학력고사만으로 대학 진학이 가능해지면서 수험생 64만 명 중 2500등 위는 등록금을 면제하고 20만원을 지원하는 제도가 생겼다. 우연히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이 당선자는 “잘하면 나도 돈 받고 대학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낮에는 공장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독서실에서 공부하며 문자 그대로 주경야독으로 시작한 공부는 결실을 맺었고, 82년 3월 공부를 시작한 이 당선자는 그 해 11월 중앙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다.
“그 전부터 공부를 한 것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됐겠죠. 학원도 다녔어요. 저녁 6시에 퇴근해 서울까지 한 시간 차를 타고 가 저역 11시까지 공부했죠. 끝나고 성남으로 돌아오면 12시였는데 그대로 독서실에서 2시까지 공부했고요. 그런데 서울까지 가는 시간이 아까워서 그만두고 진짜 독학을 했어요. 그래서 영어 발음을 잘 못해요. 나름대로 혀를 굴리는데 아무도 못 알아 들어요(웃음).
이 당선자는 대학 입학후 '특혜'(?)를 누렸다. "공장에서 한 달 월급 7만원을 받았는데 당시 중앙대학교에서 등록금 면제하고 20만원씩을 받았어요. 3년간 무조건 받을수 있었죠. 결국 군사정권에 간접적으로 혜택을 받은 터라 제가 ‘전두환 장학생’이라고 얘기해요. 법대를 간 이유도 중대에서 커트라인이 가장 높은 과를 택한 것이었어요. 돈 많이 준다고 해서 갔는데 성적이 잘나온 게 아까워 가장 높은 점수의 과를 택한 거죠.”
이 당선자는 변호사가 뭔지, 판사가 뭔지 알지도 못한 상태로 법대에 갔다.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야 선배들로부터 사법고시에 대한 설명을 들었고, 공장에서 일하다 부상을 입고 팔이 비틀어져 6급 장애인 판정을 받은 그는 취직이 힘드니 사법고시를 봐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하지만 공부만 하는 생활은 아니었다. 이 당선자의 대학 동기가 운동권 언더서클 책임자였고, 그로 인해 운동권에도 발을 들였던 것. 하지만 횅동대원 수준에 그쳤고 주동자까지는 가지 않았다. 당시 이 당선자는 동기에게 “너는 학교 다닐 때 열심히 해라, 나는 좀 더 영향력 있는 곳에서 길게 가겠다. 그 때 함께 가자”고 약속했다. 운동권 핵심이었던 동기는 이 당선자가 변호사를 개업하고 사무장을 맡는 인연으로 이어졌다.
이 당선자는 대학 입학때부터 사법고시를 목표로 잡아 운동권 일을 병행했다. 그는 3학년 때 1차에 합격하고, 4학년에 2차 시험을 치렀는데 한 과목 시험문제를 잘못 써 아깝게 고배를 마셨다. 40점이 과락이었는데 당시 39.6점을 받았다고.
“성적표를 받고 돌뻔 했어요. 정말 후회가 되더라고요. 성질을 못 이겨 손등으로 칠판을 때렸는데 연골이 없어졌어요(웃음). 떨어지고 나서 다시 1년 동안 시험을 준비했는데 그 시기가 제 인생에 큰 도움이 됐어요. 더욱 겸손해지고, 확고하게 다른 이들을 위해 봉사, 헌신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됐죠.”
5.18 민주화운동 사건에 대한 현실 직시…"검사 발령 거부 후 인권변호사로~"
사법고시에 패스해 자신과 가족이 잘 먹고 잘 살자고 생각했던 이 당선자의 목표는 대학시절부터 변화했다. 정치현실을 알게 되고, 진실과 접하며 과거 공장 동료들과 TV에 보도된 5·18민주화운동에 대해 “북한에 사주 받은 폭도들이 나라를 다 죽이려든다”는 얘기를 나눴던 기억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사람 목숨을 빼앗아 권력을 만드는 현실을 직시하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연수원 졸업 후 판·검사를 지망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아 권력을 장악하는 집단을 위해서 공부할 수 없었다. 때문에 검사 발령 자체를 거부했다. 대신 인권 변호사 길을 택했다. 개인의 무능함이 아니라 사회구조적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사회로부터 혜택 받은 것을 시민들에게 돌려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 깊이 박혀있었기 때문이다.
이 당선자는 인권 변호사를 하면서 억울한 사람, 가난한 사람들을 대변해주는데 앞장섰다. 일례로 택시기사들이 기본급을 받지 못할 때 기본급을 받을 수 있도록 변론을 해줄 정도로 사소한 사건까지 변론을 했다. 1994년에는 성남 참여연대(성남시민의 모임)를 결성해 본격적으로 시민운동에 뛰어들기도 했다. 문득 조금은 의외의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난을 극복하고 빛을 발할 수 있는 순간인데도 욕심을 부리지 않기 때문이다. “주변사람들도 의외라고 해요. 힘들게 살면 숨기려고 하고 거기서 탈출하려고 하는데….”
그의 이런 기질로 웃지 못할 일도 적지 않았다. 어린 시절 노가리에 생맥주를 먹어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이 당선자는 한때 술을 즐겼다. 심지어 법정에서도 술 냄새를 풍긴 적도 있다고 한다. “사람이 한 순간에 망가지겠더라고요. 결국 사람이 되려면 결혼을 해야 된다는 생각에 선을 보기로 했어요. 91년 8월 달에 5명을 소개 받았는데 8월 중에 만나는 사람과 결혼하기로 마음먹은 거죠. 결국 3번째 소개팅에서 아내를 만났어요. 형수가 다니는 교회 사람이었는데 한눈에 반했죠. 8월 9일날 만나서 10월 달에 결혼하자고 했는데 이듬해 3월에 했어요. 결혼을 너무 서두르는 저를 보고 장인어른은 ‘결혼사기꾼’인 줄 알았다고 하네요.”
아내 몰래 '주식 투자'하다 큰 손실…변호사 시절엔 수배되거나 구속되기도
이 뿐만 아니다. IMF 때 아내 몰래 주식투자를 한 것도 화근이었다. 하룻밤에 수백만원 이상의 손실이 나는 것을 보고 잠을 자지 못했다. 이를 발견한 아내는 수상한 낌새를 차리고는 “주식했지”라고 말했고 이 당선자는 “아니다”라고 오리발을 내밀었다. 눈치가 빨랐던 아내는 “살 집은 마련해 두고 하라!”라고 엄포를 놓았다고 한다. “보증금, 대출 받고 해서 3억원짜리 아파트를 샀죠. 그런데 어느 날 보더니 7~8억원, 급기야 15억까지 확 오르더라고요. 변호사 사무실에 가더라도 일에 대한 의욕이 안생기더군요. 변호사 20년 해서 번 것보다 더 많이 벌었거든요. 그러면서 서민들은 정말로 화가 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롤러코스터 같은 삶을 산 이 당선자는 안정된 여건을 마련했음에도 불구하고 시민운동에 계속적으로 매진했다. 특히 2000년 분당 백궁·정자지구 용도변경 특혜 의혹을 제기해 주목을 받았다. 이 당선자는 그 당시 기억을 떠올렸다. “김병량 성남시장과의 전화통화녹취록을 공개했다가 방송국 PD와 함께 공무원자격사칭 혐의로 구속됐어요. 그때 민주당을 사정없이 공격해 DJ정부가 엄청난 타격을 받았어요. 한마디로 민주당과 저는 완전히 끝장났었죠. 그리고 정치 할 마음도 없었지만 이 사건으로 정치를 영원히 할 수 없고, 정치할 마음도 없어졌죠. 정치는 폐가망신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이 당선자는 ‘시립병원 설립운동’을 하면서 수배생활이라는 아픔도 겪어야 했다고 한다. “변호사 시절, 보건의료노조와 함께 전국 최초로 시립병원 설립에 대한 주민발의조례를 만들었어요. 1년6개월 동안 한 겨울에 할머니들에게 떡국을 끓여서 설득하고 지장까지 받았는데 시의회에서 딱 47초 만에 날치기로 폐기됐어요. 평생 배운 욕을 그 당시 다 해버렸어요. 운 좋게 현장을 빠져나와 교회 지하실에 숨었지만….”
시립병원 설립운동 하다 정치에 눈 떠…"참여정부의 정치개혁 때문에 가능했다"
‘시립병원 설립운동’으로 인해 수배생활을 했던 그는 정치를 하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다. 시민들의 의견을 시정에 반영하고 권력 감시 견제 운동에 대한 한계를 느꼈던 것. 결국 시민운동진영을 모아 무소속으로 출마를 할 계획이었다. 특히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당 개혁, 정치 개혁 때문에 정치에 도전할 수 있었던 기회가 마련됐다는 말도 덧붙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평가받을 만한 것은 정당개혁, 특히 정치개혁이에요. 선거에서 15%이상 득표시 기탁금 전액을 돌려준다는 제도를 만들었어요. 이때 자신감이 생겼죠.”
눈에 띄는 것 중 하나는 이 당선자가 열린우리당에 입당할 때 5천여 명이 넘는 당원들과 함께 입당했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당원을 몰고 왔다. 그리고 입당한 이후 성남시장 후보가 아무도 없어 경선도 없이 열린우리당 성남 시장 후보가 됐다. “정치 입문이후 첫 출발이었는데 깔끔하게 떨어졌어요. 지금 생각하면 아주 잘 떨어졌어요.”
이를 계기로 이 당선자는 뜻 깊은 교훈 한 가지를 깨달았다. 이 당선자는 “민심이 무섭다는 것을 알았을 뿐 아니라 ‘사람들이 세상의 전부구나!’라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라고 말한다. 특히 떨어진 그에게 민주당 A인사가 보낸 문자가 큰 힘이 됐다. “링컨 대통령은 낙선하지 않은 사람을 중용하지 않았다. 낙선해 본 사람이 민의를 존중할 줄 안다”라는 내용의 메시지였다. 민의를 존중해야 된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민주당 상임부대변인 등을 지냈고, 지난 선거를 전화위복 삼아 성남시장으로 당당히 당선됐다.
인터뷰 말미 이 당선자에게 성남을 어떻게 끌고 갈 것인가에 대해서 물어봤다. 그는 “시민들을 친철하게 대우하고, ‘성남시민이 성남의 진정한 주인이다’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고 싶다”라며 “요구할 것은 당당하게 하고, 데모도 많이 해주셨으면 좋겠다”라고 말한다. 이 당선자의 그 말에는 항상 성남시민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해결 가능한 민원은 직접 해결해 주며 불가능한 민원은 주민들을 직접 설득하겠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런 차원에서 이 당선자는 한달에 한번, 2주에 한 번 서민들과 직접 만나 대화할 수 있는 ‘시민 민원 듣는 날’을 지정할 계획이다. 시민들과 소통하는 시장을 꿈꾸는 그는 당선의 기쁨도 잠시 초심으로 돌아간 듯했다. 그러나 너무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던 탓에 “걱정도 많이 된다”라며 “그래도 유심히 지켜봐달라”고 새로운 도약을 다짐했다.
<사진=이승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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