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노총각' 이석현 의원 "실력으로 3김시대 건너온 '여의도 이태백'"
입력: 2009.11.26 10:19 / 수정: 2009.11.26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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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민 박형남기자]“비가 유리창을 때려요. 유리창이 잘못한 것도 없는데, 뺨을 때려요. 그래서 유리창은 눈물을 흘린답니다.” 1962년 익산군 북일면 한 초등학교의 4학년 교실. 초가을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어느 날, 아동 문학가였던 신동현 선생이 ‘비오는 날’을 제하로 학생들에게 글짓기 과제를 냈다. 창밖을 무심히 바라보던 ‘어린이 이석현’이 써 내려간 동시가 선생님과 친구들의 가슴을 울렸다.

“석현이는 시인의 눈을 갖고 있구나. 유리창은 잘못한 것이 없는데, 억울하게 뺨을 맞고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볼 수 있는 게 시인의 눈이다.”

그 어린이가 자라 20년 후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그 어린이는 아직도 ‘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정치를 생각한다. 그리고 어느덧 4선의 중견 정치인으로 성장했다.

일찌감치 ‘시인’의 매력에 빠져 고교 시절 문예반으로 활동하며 ‘문학도’를 꿈꾸던 민주당 이석현 의원(59, 안양 동안 갑)의 삶에는 ‘긍지와 자부심’이 가득하다. 전교 1등이 아니면 불편해서 못 견뎌했던 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동네에서 알아주는 ‘재담가이자 시사해설가’였다. 그는 언제부터인지, 한자투성이인 일간신문을 보고 동네 할아버지들에게 주요 뉴스나 만평의 배경과 의미를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정자 밑에서 이 의원의 설명에 귀 기울이던 동네 어르신들은 자연스럽게 “마을에 신동이 나왔다”고 탄복했다. 실제로 이 의원은 중학시절 지능지수 검사 결과 147이 나왔다. 학교에서 최고였다고 한다. 그래서 선생님들이 ‘이 천재’로 불렀다. 이 의원은 ‘신동’ ‘천재’라는 지역사회 닉네임에 보답하듯이 초등학교는 물론 대학까지 ‘공부’하나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실력을 선보였다.

11월 23일 국회 의원실에서 만난 이 의원은 ‘신동’(?) 출신답게 뛰어난 입담의 소유자였다. 청산유수였지만, 말에 꾸밈이 없었다. 부드러움 속에 투지와 열정이 넘치는 전형적인 ‘외유내강’의 풍모를 풍겼다. 그는 ‘남조선 명함’ 사건으로 97년 대선을 앞두고 산속에서 3개월간 칩거했을 정도로 마음고생도 많이 겪었다. 그러나 얽매임 없이 훌훌 털고 일어서 다시 시작했던 ‘대범’함도 인터뷰 내내 느껴졌다. 대표적인 ‘여의도 노총각’이자 시민단체가 주는 상을 휩쓸어 온 '열정의 정치인' 이석현 의원의 영화 같은 인생 속으로 들어가 보자.

아버지는 면 의원 역임한 평범한 농부…“농사 자신 있어요”

“아버지는 평범한 농부였지만, 성실하고 후덕한 사람으로 평이 좋았어요. 인기가 좋아서 4.19 직후 동네 사람들이 뽑은 면 의원을 하기도 했습니다. 제 고향이 밤고구마로 유명한 익산군 북일면인데, 아버지가 영등포행 기차에 고구마를 퍼 나르던 기억이 많이 납니다. 2남 1녀 중 큰 아들이었던 저도 아버지를 도와 고구마, 참외, 수박, 토마토 농사를 많이 지었죠. 지금도 농사라면 자신 있습니다.”

이 의원은 어린 시절부터 늘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란 생각을 갖고 있었다. 발단은 할머니의 태몽이다. 할머니는 이 의원이 태어나기 전날 ‘해가 몸속으로 들어오는’ 어마어마한 꿈을 꾸었다. 그런 탓인지 할머니는 이 의원을 ‘태양의 아들’(?)로 대접했다. “할머니가 저를 무척 예뻐하셨는데, ‘너는 큰 사람이 될 테니깐, 나 죽으면 꼭 내 산소에 소분(성묘)와라’고 말씀하셨어요.”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이 의원에게 “장차 큰일을 할 사람이 남들과 같아선 안된다. 남 보다 좀 더 일찍 일어나고, 더 일하고, 더 정직하게 살아야 된다”고 강조했다. 반복 학습 탓인지 이 의원은 품행이 단정한 특출난 모범생으로 자랐다. 왕자병(?)으로 의심 될 정도의 결벽증도 갖고 있었던 모양이다. “동네 아이들과 쉽게 놀지 않았죠. 왜, 난 특별하니까.(웃음) 무엇보다 전교 1등을 해야만 마음이 편했습니다. 한 마디로 마음속에 ‘남보다 더 인내하고, 절제해야 한다’는 지도자 의식이 있었어요.”

혜성처럼 나타난 담임 선생님…"등록금 대신 내줘, 가까스로 입학"

그런 익산의 ‘꿈나무’에게 시련이 불어 닥쳤다. 중학 진학을 앞두고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 등록금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비참한 처지에 빠졌다. 중학 진학을 포기하고 집에 있는데, 뜻하지 않게 입학통지서가 도착했다. 알고 보니 이 의원의 ‘시심’에 탄복했던 4학년 담임선생이 등록금을 대납해 준 것이 아닌가.

“중학교 시험에서 수석을 놓치고 등록금 절반만 내는 장학생에 선발됐어요. 그것조차 내지 못할 처지였는데, 담임선생님이 남 모르게 도와주신 거죠. 그때 쌀 두가마니 가격입니다. 그걸 그 양반 봉급에서 떼어 주셨어요. 세상이 따뜻하다는 것을 느꼈죠. 제 일생의 꿈이 장학재단을 만드는 것인데, 그 때 받은 영향 때문이지요.”

이 의원은 어려운 가정 형편 탓이지 중학교에서 전교 1등을 차지하며 장학생을 놓치지 않았다. 이리남성고에 진학한 이 의원의 관심은 문학, 그 중에서도 ‘한시’에 필이 꽂혔다. 한학자였던 조두현씨가 지도 선생님이었다. “글을 써 가면, ‘좀 더 써봐야겠다’고 퇴짜를 여러 번 놓으셨죠. 중국과 우리나라 한시를 배웠고 덕분에 한문은 전문가는 아니지만, 상당히 잘 아는 편이에요. 국회에 걸려 있는 편액은 곧바로 해석이 가능해서 동료 의원들에게 ‘잘난 척’을 좀 하죠.”

문학의 끈 놓지 않은 이석현…오언율시 운율 맞춘 솜씨 일품

이때 배운 한시 실력으로 대학 1학년 때 우국충정의 마음을 담아 한시를 짓기도 했다. 이 의원은 당시 지은 한시를 한 구절도 빠지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기자에게 가까이 다가오더니, 한시를 수첩에 일필휘지로 써내려갔다.'여의도 이태백'이 따로 없다. “아, 이거 나가면 최초 발표인데….” 소개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오언율시에 운율까지 맞춘 프로솜씨니, 음미해볼만 하다.

<仰天倚杏木/月行紗雲端/??秦哀曲/更添孤客嘆>(은행나무에 기대어 하늘을 보니/얇은 구름사이로 달이 가는데/귀뚜라미가 슬픈 노래를 읊조린다/ 외로운 나그네가 탄식을 보탠다.)

이 의원은 초저녁 대학 캠퍼스를 거닐다 나라 걱정에 우울한 마음으로 흘러가는 구름을 보고 시상을 떠올렸다. 木(목)과曲(곡),端(단)과嘆(탄) 운율까지 맞춘 정통한시였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 의원은 동화책까지 펴낼 정도로 문학의 끈을 여전히 놓지 않고 있다. 본인은 얼치기라고 표현했지만 그의 자서전이나, 동화책을 꼼꼼히 읽으면 수준급임이 금방 드러난다.그러나 그는 문학소년 지망생이었던 것과 달리 대학시절은 문학과 전혀 무관했다. 울분과 분노로 가득 찬 운동권 학생이었다. 일단 서울공대에 합격해 대학을 다니다가 재수를 자청해 서울법대로 다시 입학한 것이 심상치 않다.

“공대 다닐 때부터 빈부문제에 관심이 가더라구요. 청계천 같은데 가면 사람들이 너무 못 사는 거예요. 엔지니어로 살기보다 ‘소외된 대중’을 위해 일하겠다는 생각을 굳히고 입학시험을 다시 보고 법대로 갔죠.”

대학시절, '박정희 정권 비판'…"날 위해 구명운동 해주신 교수님"

이 의원은 사회과학연구회를 결성해 지하신문(횃불)을 만들고 가톨릭학생회 등을 통해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원혜영 의원을 비롯해 최지성 삼성전자 사장, 장병완 전 기획예산처 장관, 조순용 전 청와대 정무수석 등이 이 의원과 함께 한 운동멤버였다. 지하신문의 발행인이자 편집인으로 사설까지 쓰면서 이후락 정보부장에게 직격탄을 날리는 등 박정희 정권에 맞서 고강도 비판을 가했다.

“민청학련 사건이전까지 군부가 운동권학생들에게 그렇게 가혹하지 않았어요. 감옥에 보내는 대신 군대로 징집했어요. 나도 정보부가 분류한 요주의 대상이라서 영장이 나왔죠. 알고 보니 서울대 총장이 병무청에 징집을 요청하는 공문까지 보냈더군요. 난 모두가 법 앞에 평등한데, 견해가 다르다고 군대 보내는 것이 부당하다며 행정소송을 낼 생각이었어요.”

군 입대를 피해 도망 다니던 이 의원은 시국강연회를 준비하던 도중 경찰에 붙잡혔다. 재판에서 실형을 구형받고 징역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중학교 등록금을 대납해주던 때와 마찬가지로 구세주가 나타났다. 바로 서울법대 스승이었던 양승규 교수(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였다.

이 의원 사건의 검사, 판사 모두 대학 제자였던 양 교수는 “이석현이 무슨 죄가 있나. 나라 위한 신념이 강한 것이니, 학교 다니게 해 달라”며 구명운동을 펼쳤다. 스승의 호소가 통했던지 이 의원은 선고유예를 받고 군대에 입대했다. 이 의원은 “그때 군대에 가지 않았다면, 아마도 십중팔구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됐을 것 같다”며 “인생의 중요한 고비 때마다 운 좋게도 나를 도와주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어디 가서 신앙 간증이라도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서울대 법대 나왔지만 변호사는 'NO'…"박정희 시절 벼슬 싫었다"

그는 비록 법대를 갔지만, 사법고시에는 도전하지 않았다. 이유가 간명하다.‘박정희 정권에서 벼슬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의원 이력 탓인지 지금도 의원실에는 ‘무료변론’을 요청하는 문의전화가 끊이지 않는다. 그를 변호사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석연 법제처장하고 헷갈리나.(웃음) 대학 다닐 때 도서관파와 데모파로 딱 나뉘었어요. 데모파들은 법전이 어디 있는지조차 몰랐어요. 도서관파를 우습게 봤죠. 난 데모파인데도, 이상하게 학교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공부를 잘했어요. 그래도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 검사나 판사를 하면 뭐하느냐는 생각이 강했어요.”

이 의원은 대학졸업과 함께 평범한 직장인의 길을 택했다. 굴지의 보험회사에 들어갔다가 미래 경영자로 뽑혀 강도 높은 교육과정을 거치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하는 법. 타고난 ‘정치 DNA’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본인은 선후배들의 꼬임에 빠졌다고 하지만, 아마도 몹시 몸이 근질근질했던 모양이다.80년 시국사건에 연루된 것이 단적이 증거이다.

“회사 다니고 있을 땝니다. 80년에 배기선 전 의원, 문희상 국회부의장 등과 ‘민주연합청년동지회’(연청)를 만들어 최연소 운영위원을 역임했어요. 발기인 대회까지 했는데 5.17이 나면서 수배령이 떨어졌습니다. 배기선 전 의원이 전날 우리 집에서 잤는데, 계엄령이 떨어진 것을 알고 둘이서 동과 서로 나뉘어 튀었다가 두 달 만에 붙잡혔어요. 그땐 정말 겁나더군요. 눈을 가리고 보안사로 데려가서 고문도 받고 조사를 받았어요. 다행히 주동자가 아닌데다 아는 게 너무 없으니까 구속까진 안시키더군요.”

배기선 전 의원 러브스토리 '총공개'…"이협 전 의원 건의로 민추협 활동"

당시 이 의원과 함께 새벽같이 도망쳤던 배기선 전 의원은 수배 당시 하숙집 딸(오페라가수 이경애)과 눈이 맞아 결혼에 성공했다. 두 사람 러브스토리는 영화로까지 만들어졌다. 고시생으로 위장했던 배 전 의원은 법대 책까지 갖다 놓는 완벽한 연기를 펼쳤고 음대생이던 이씨는 공무원이던 아버지 몰래 배 전 의원을 뒷바라지했다.

“그러고 보면 난 참 양심적이야.(웃음) 그때 난 내가 결혼하면 여자는 무조건 행복하고 편안하게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것이 나의 의무고 나의 자존심이었지. 사귀는 여자도 여러 명 있었지만, 순백 논리적 결혼관을 가진 탓인지 늘 거리를 두고 사귀었어요. 배기선 전 의원이랑 나랑은 근본이 다른 사람이지.(웃음)그 덕에 아직까지 결혼도 못했지만….세월이 흐르니 이젠 시간이 없어서 연애할 짬이 없어요.”

이 의원이 회사를 작파하고 본격적인 정치운동에 뛰어든 것이 1984년. 고향과 대학선배인 이 협 전 의원이 “나라가 엉망인데, 자네 혼자만 잘 먹고 잘 살려고 직장 다니냐”는 농반 진반의 책망이 직접적인 계기였다. 이 전 의원의 지적이 늘 가슴의 짐으로 남았던 그는 미래가 보장된 직장을 그만두고 김대중, 김영삼 전 대통령이 힘을 합쳐 결성한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기획위원으로 참여했다. 기라성 같은 정치 선배들과 이성헌 의원, 박종웅 전 의원 등 패기 넘치는 정치 신인들과 함께 연구 조사 활동을 벌였다. 생활을 어려웠지만, 그나마 뒷돈을 챙겨주던 선배들의 도움으로 생활고를 이겨낼 수 있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젊은 피'…"쓴소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재야 정치단체의 실무자였던 그에게 대도약의 기회가 찾아왔다. 85년 죽음을 무릅쓰고 귀국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올드 한 참모진 분위기를 일신하고자 30대 비서를 찾으면서 후보에 오른 것이다. “이전까지 일면식도 없는 분이었지요. 아마도 권노갑 한화갑 김옥두 이런 분들은 너무 오랫동안 모시다보니, 그분에게 가슴 아픈 얘기를 못 했을 겁니다. 그래서 영 브라더들을 찾기 시작했죠. 어느 날 동교동에 오라고해서 갔는데, 저와 단둘이 식사하던 자리더군요. 많이 놀랬죠. 굴비를 직접 밥에 얹어주고, 참 자상하시더군요. 이런저런 생각을 묻더니, ‘내가 앞으로 뭘 해야 좋을지 연구해서 일주일 뒤에 또 보자’고 하시더군요.”

그는 일주일 후 재벌, 언론, 학생운동 등 각 분야를 분석 연구한 장문의 보고서를 올리고 무난히 면접에 합격해 3년간 김 전 대통령 비서로 일했다. 하루에도 두 서너 번씩 보고할 정도로 열정적으로 업무에 임했다. 배기선 설훈 등 30대 비서진 3인방이 합류한 것도 비슷한 시점이다. 88년 총선을 앞두고 출마를 결심한 그는 넌지시 김 전 대통령에게 의사를 물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실망스러웠다.

“아직, 급하지 않잖아. 나이가 몇인가”라고 물었다. 고향인 익산으로 내려가 원광대 등 대학교를 돌아다니며 출마 서명운동을 받았다. 일반학생은 물론 총학생회장, 대의원의장 등 대학교 간부가 총망라됐다. 당시에는 획기적인 아이디어였다. “이석현 비서를 공천 주면 라면을 끓여먹으면서 돕겠다”는 것이 서명운동의 요지. “총재님, 익산을 한 바퀴 돌고 왔는데, 여론이 전부 내가 나와야 한다는데요. 분위기가 좋아서 돈도 많이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자신감이 넘치는 이 의원이 '자가발전'에도 김 전 대통령은 신중했다. 기껏 “그래, 깊이 한번 생각해 보세.” 라는 대답이 전부였다.

총선 출마 위해 '승부수' 던진 이 의원…"한때 무소속 결심했다"

한동안 집에서 칩거하던 그는 고민 끝에 고향인 익산 출마를 포기하고 김영배 당시 평민당 사무총장을 만났다. 87년 대선에서 평민당이 패배하면서 서울지역에서 당선 가능성이 적은 때이다. “서울에 나올만한 곳 없습니까.” 김영배 총장의 답이 걸작이다.

“있긴 있는데, 강남 서초 갈려는 사람이 없어. 거긴 곤란할 테니, 인천이나 안양 한번 알아보지. 연습 삼아 해볼 테야” 인천 보다는 안양이 눈에 들어왔다. “안양에 나가보겠습니다.”(이석현) “연고 있나”(김영배) “있습니다. 대학교 다닐 때 포도 먹으러 한번 간 적이 있습니다.”(이석현) “오호 그래, 그 정도면 큰 인연인데, 우리당에는 그 정도 인연 있는 사람도 드물어.”(김영배)

사실상 공천 내락으로 받아들인 그는 느긋한 생각을 갖고 공천 발표만 기다렸다. 그러나 2차 공천발표까지 그의 이름이 나오지 않았다. 당에선 좀 더 경쟁력 있는 후보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곰곰이 생각한 끝에 다시 김영배 총장을 찾았다. 이번에는 기선제압용 멘트를 먼저 날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안양 공천을 받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곰곰히 생각했는데, 차라리 무소속이 낫습니다.”(이석현) “(놀란 표정으로) 아니 자네, 왜 그래”(김영배) “무소속 출마를 결심하고 구호도 정했습니다. ‘이당 저당 볼 것 없다! 사람보고 뽑아주자’입니다.” 특유의 한시 실력으로 운율까지 맞춘 구호를 말하자 김 총장이 그의 손을 바삐 잡았다. “사람이 왜 그래, 좀 더 생각해봐” 이 의원의 무소속 출마로 안양 선거 상황이 더욱 어려워질 것으로 예상한 지도부는 서둘러 그 다음날 이 의원을 공천했다.

선거사무실은 '여관방'…"당에선 유명인사, 이후 지역관리 철저"

공천 발표 후 이 의원은 학교 후배 10명을 데리고 안양으로 내려갔다. 여관방이 아지트였다. 모두가 선거 한번 치러본 적 없는 아마추어였다. 큰돈을 갖고 내려온 줄 알았던 선거브로커들이 사무실을 찾았다가 칠 벗겨진 냄비에 라면 끓여먹는 캠프 분위기에 질려, 줄행랑을 쳤다. 선거원들은 성당 문앞에까지 현수막을 내걸었다가 성당의 항의를 받는 등 크고작은 실수가 끊이지 않았다. 심지어 옆 지역인 안양 만안구에 현수막을 내걸었다가 이름이 비슷한 이석용 전 의원으로부터 “안 그래도 지역에선 형제들이 안양을 말아먹고 있다는 악소문이 도는데, 왜 그러냐”는 핀잔까지 들었다.

그래도 선전했다. 1천표 차이로 떨어졌다. 그것도 자정까지 앞서다가 막판에 뒤집혔다. 당시 평민당은 경기 35개 지역에서 성남에서 한명만 당선됐다. 개표가 끝나고 중앙당에 인사를 가자 박영록 당시 부총재가 그를 격려했다. “하마터면, 당선될 뻔 했어. 3천만 원만 도와줬어도, 당선됐을 텐데….” 이 의원은 “'하마터면'이란 말이 그렇게 사용될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며 웃음을 지었다.

당시 이 의원은 유세 도중 감동적인 경험을 했다. 안양 호계시장을 돌던 중 노점상 할머니가 그를 슬그머니 불렀다. “내 손자가 대학 다니다 제적당했다. 꼭 내 손주를 닮았다”며 흙 묻은 1000원을 건넸다. 그는 눈시울을 적시며 “이 선거는 나 혼자만의 선거가 아니다. 우리들의 선거다”며 각오를 다졌다. 그는 지금도 당시 받은 1000원의 후원금이 정치 인생 중 가장 소중한 후원금이라고 생각한다.

초선 같은 다선 의원…"발로 뛰는 정치는 계속된다"

4년간 절치부심의 시간을 보낸 그는 92년 총선에서 상대후보를 거의 더블스코어로 이기면서 처음으로 금배지를 달았다. 2000년을 제외한 총선에서 전부 이기며 수도권 남부의 터줏대감으로 자리를 잡았다. 안양에서 20년간 정치를 한 탓에 토박이 못지않은 인맥을 과시한다. 그는 국회 입문 후 개혁모임을 결성, 재산공개와 화환안보내기, 입출금 공개 등 의정활동을 선도했다. 16대에는 정치개혁시민연대에서 최우수상을 받고 양복감을 선물로 받았다.

“그때는 개혁 얘기하면 당 지도부에 도전하는 것으로 비쳐질 때죠. 그때나 지금이나 초선 같은 다선의원이 되자고 다짐합니다. 발로 많이 뛰고, 인터넷 서핑도 엄청합니다. 하루에 3시간 동안 컴퓨터를 뒤지죠. 아고라에도 글을 자주 올립니다.”

그런 그의 노력은 최근에도 여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대여 투쟁의 도화선으로 작용하고 있다. 4대강 사업 과정에서 이명박 대통령 동문인 포항 동지상고 출신들이 대거 공사를 수주했고, 대형 건설사들의 구체적인 담합 의혹을 제기해 여론화시켰다. 동지상고 동문들의 공사 수주는 향후에도 정치적 문제로 비화될 가능성이 크다. 이 의원은 11월 8일 기자회견을 갖고 "현대와 삼성 등 6대 건설사들이 4대강 턴키 1차 사업자 선정 과정에서 입찰 담합해 공구별로 1~2개씩을 나눠먹기 했다"고 폭로했다.

건설사를 비롯해 관련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 일일이 확인한 탓인지, 담합을 모의한 구체적인 장소까지 나오는 등 정보 자체가 세밀하다. 담합 조사 주무부서인 공정위까지 혀를 내두를 정도다. 공정위는 당초 이 의원의 폭로 이후 "담합 정황이 포착되고 있다"고 밝혔다가 이를 번복해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3김 시대 극복한 흔하지 않은 정치인…그에겐 정치 낭만이 있었다

그는 이 같은 열정적인 의정활동이 ‘노총각’ 신세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정치인이 혼자 사는 것도 장점인 것 같아요. 집에서 돈 많이 벌어오라고 바가지 긁는 것도 없고, 자식 챙겨야 될 일도 없고.(웃음) 공직자를 결혼 못하게 하는 것을 의무화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그럼 비리 의혹에도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것 같은데….(웃음)” 그는 "이젠 손주 볼 나이"라며 노총각 꼬리표에 종지부를 찍고 싶은 모습이 역력했다.

남다른 유머 감각을 소유한 그는 김대중 김영삼 등 3김 시대 정치를 긍정적으로 순화하고 극복한 정치인이다. 무엇보다 부지런함과 끊임없이 공부하고 연구하는 그의 습관이 생존 비결로 보였다. 80년대와 90년대, 그리고 새로운 21세기를 두루 경험한 관록과 경륜, 그리고 정치권 특유의 '낭만'도 간직하고 있다.

그가 살아온 인생의 조각을 모으면 '시골소년 성공기'의 완벽한 줄거리가 나온다. 그만큼 현대사의 한 가운데를 질주해 왔다. 안양의 한 단독주택에서 올해 여든 아홉 동갑내기인 부모를 모시고 사는 그의 인간적 향취와 '정치적 내공'이 앞으로 어떤 형태로 빚을 발할지 주목된다.

<사진=이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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