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면담 이듬해 담배 시장 개방
기소장에는 빠져...다른 국내건 적시
레이건 면담 알선 과정서 47.5만달러
외교부는 매년 '30년 경과 비밀해제 외교문서'를 공개한다. <더팩트>는 1986년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시절 거물급 로비스트로 활동한 마이클 디버의 이야기를 두 편으로 나눠 재구성했다. 디버는 1988년 위증 혐의로 기소돼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혐의 중에는 한국과 관련된 사안이 있었다. /임영무 기자 |
외교부는 매년 30년이 지난 기밀문서를 일반에게 공개합니다. 공개된 전문에는 치열하고 긴박한 외교의 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전문을 한 장씩 넘겨 읽다 보면 당시의 상황이 생생히 펼쳐집니다. 여러 장의 사진을 이어 붙이면 영화가 되듯이 말이죠. <더팩트>는 외교부가 공개한 '그날의 이야기'를 매주 재구성해 봅니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외교비사(外交秘史)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감춰져 있었을까요? <편집자 주>
☞<상>편에 이어
[더팩트ㅣ김정수 기자] 1986년 9월 10일 마이클 디버 로비 사건의 진상을 규명할 Seymour(시무어) 미국 특별조사관은 우리 정부에 서한을 보내며 두 가지를 요청했다. 디버와 접촉한 인사와의 면담과 디버의 한국 내 로비활동 관련 자료였다. 시무어는 한국의 면제 권리를 인정하면서도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해 협조를 부탁한다고 당부했다. 대신 모든 자료에 대한 보안은 철저히 지키겠다고 덧붙였다.
정부는 고민에 빠졌다. 김기환 해외협력기획단장과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면담을 디버가 주선했다는 정황이 드러난 만큼 시무어의 제안을 물리칠 명분은 없었다. 디버 역시 미 하원 청문회에서 관련 사실을 어느 정도 인정한 상황이었다. 외교상 면제 권리가 있지만 자칫 시무어의 요청을 거절했다간 '한국이 무언가를 숨기려 한다'는 의심을 살 수 있었다. 무엇보다 '코리아게이트 사건'이 재조명돼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미국의 압박이 들어올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려웠다.
외교부와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등 관계 부처는 묘안을 찾기 위해 서둘러 테이블에 앉았다. 디버와의 구체적인 계약 내용은 감추면서도 미국의 의심을 지울 수 있는 전략을 강구해야 했다. 긴 회의 끝에 정부는 면제 권리를 내세워 급한 불을 끄기로 했다. 다만 미국이 비공식 협조를 요청한다면 최대한 응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당시 디버 사건에 연루된 캐나다는 공식적인 자료 제출은 거부하면서도 비공식적인 협조는 이어가고 있는 것으로 탐문 됐는데, 한국이 거절 입장을 고수한다면 괜한 오해를 살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정부는 또 특별조사관 출신 변호사를 선임해 혹시 모를 법적 문제에 선제 대응하기로 했다.
시무어는 우리 정부의 자료 제공 거부에 유감을 표했다. 그러면서도 두 차례 추가 서한을 보내 지속적으로 협조를 요청했다. 그러던 중 뉴욕타임스가 1986년 8월 11일 전두환 대통령과 디버의 단독 면담 사실을 보도하며 상황은 변곡점을 맞았다.
시무어는 당시 디버가 미국의 글로벌 담배 제조사 '필립 모리스'의 로비스트로도 활동 중이었던 점을 감안, 한국과 특별한 거래가 있었는지 주시하고 있었다. /외교부 제공 |
보도 내용에 따르면 디버는 1985년 7월과 10월 전 대통령과 면담했다. 이후 1986년 7월 한국 정부가 미국 담배 수입을 전격적으로 결정했는데, 문제는 당시 디버가 레이건 대통령의 친서를 갖고 전 대통령을 만났다는 것이었다. 이미 백악관을 나와 로비스트로 활동한 그가 레이건 대통령의 친서를 가지고 왔다는 건 백악관과 모종의 접촉이 있었다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이는 '퇴직 후 1년 이내에 자신이 근무했던 기관을 상대로 로비 활동을 할 수 없다'는 미 공직자 윤리법에 위반된다는 해석을 낳았다.
해당 보도 이후 시무어는 우리 정부에 전 대통령과 디버의 면담 기록, 레이건 대통령의 친서 사본을 제공해달라고 요청했다. 동시에 특별조사관에 협조할 의무가 있는 미국 국무성(국무부)을 통해서도 동일한 내용이 전달되도록 했다. 앞서 자료 제출 요구를 모두 거절한 우리 정부를 압박하기 위해 '투트랙 전략'을 구사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정부는 다시 난처한 상황에 빠졌다. 전 대통령과 디버의 면담이 있었던 건 사실이었다. 다만 배석자가 없는 단독 면담으로 기록물은 남아 있지 않았다. 친서 사본 또한 갖고 있지 않았다. 정부가 고용한 특별조사관 출신 변호사는 "특별조사관 경험을 돌이켜보면 면제 권리를 계속 사용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조언했다. 정부는 시무어의 요청을 거절하기로 했다. 다만 언제까지 거절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정부가 전전긍긍하고 있던 1987년 3월 18일 시무어는 디버를 기소했다. 혐의는 애초 제기된 것으로 알려진 공직자 윤리법이 아니라 '위증'이었다. 시무어는 디버가 청문회 등에서 5가지 위증을 했다고 판단했다. 다행히(?) 전 대통령과 디버의 면담과 관련된 사안은 없었다. 하지만 '김기환-레이건 면담' 건이 위증 혐의 중 하나로 적시돼 있었다.
시무어가 정부에 요청한 비밀문서 10건 해제 내용. 외교 전문에는 해당 문서들이 디버 사건과 관련이 없어 거절하겠다는 보고들이 오갔다. 다만 시무어가 또 다른 로비 단서를 포착한 것인지는 별도로 확인되지 않았다. /외교부 제공 |
기소 내용을 살펴보면 디버는 미 하원 청문회에서 "김기환 단장과 레이건 대통령의 만남을 주선하지 않았다"며 "이를 위해 백악관 보좌관과도 접촉한 적 없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수사 결과, 디버는 우리 정부와 47만5000달러의 계약을 맺는 과정에서 '김기환-레이건' 면담을 위해 백악관 보좌관과 접촉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앞서 디버와 한국 정부의 계약은 1985년 10월부터 1986년 9월까지 계약금 47만5000달러로 체결된 바 있다. '김기환-레이건' 면담은 1985년 10월에 이뤄졌다. 결국 47만5000달러에는 디버의 면담 주선에 대한 금액이 책정된 셈이었다.
디버는 1988년 9월 23일 위증 혐의로 집행유예 3년과 벌금 10만달러, 사회봉사 1500시간을 선고받았다. '레이건의 아들'로 불릴 만큼 권력의 정점에 섰던 그였지만 법의 심판을 피할 수는 없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디버의 기소 소식을 들은 뒤 "어려운 시기에 있는 나의 20년 친구와 그 가족을 염려한다"며 걱정한 것으로 전해진다. 레이건 대통령은 디버를 사면하고자 했지만 디버는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이번 외교 문건에는 특별조사관이었던 시무어가 우리 정부에 비밀문서 10건을 해제해달라고 요청한 내용이 담겨 있다. 구체적으로 전 대통령이 레이건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와 한미 부처 관계자들의 면담 내용이었다. 이는 시무어가 조사했던 디버 사건과는 관련 없는 문서들이었다. 당시 정부가 선임했던 특별조사관 출신 변호사는 "시무어의 요청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밝히기도 했다. 시무어가 우리 정부의 자료 제출 거부에 대해 불쾌감을 우회적으로 드러낸 것인지, 또 다른 로비 단서를 포착한 것인지는 별도로 확인되지 않았다.
js8814@tf.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