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 DJ 해외 일정 파악 위해 외교부 동원
항공 편명 확보 후 재외공관에 배포하기도
외교 전문에 드러난 추적 기간만 '8개월'
외교부는 매년 '30년 경과 비밀해제 외교문서'를 공개한다. <더팩트>는 14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김영삼이 외교부를 동원해 '영원한 라이벌' 김대중의 일거수일투족을 파악하려 했던 당시 이야기를 재구성했다. /임영무 기자 |
외교부는 매년 30년이 지난 기밀문서를 일반에게 공개합니다. 공개된 전문에는 치열하고 긴박한 외교의 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전문을 한 장씩 넘겨 읽다 보면 당시의 상황이 생생히 펼쳐집니다. 여러 장의 사진을 이어 붙이면 영화가 되듯이 말이죠. <더팩트>는 외교부가 공개한 '그날의 이야기'를 매주 재구성해 봅니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외교비사(外交秘史)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감춰져 있었을까요? <편집자 주>
[더팩트ㅣ김정수 기자] 1992년 12월 18일 14대 대선에서 패배한 김대중은 이튿날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이듬해 1월 26일 영국으로 떠난 그는 독일, 이스라엘을 찾아 남북 통일론을 펼쳤고 1993년 7월 4일 귀국 후에는 미국, 러시아를 방문해 대북정책의 방향성을 제시했다. 같은 기간 대통령에 당선된 김영삼은 외교부를 동원해 김대중의 일거수일투족을 확인하려 애썼다. 김영삼 정부는 김대중의 세부 일정 파악에 실패하자 그의 비행기 편명까지 확보, 각국 재외공관에 이를 배포하기도 했다. 김영삼의 집착이 생각보다 집요해지자 김대중은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1993년 2월 12일 주백림(베를린) 총영사관은 김대중이 2월 24일 백림을 방문해 사회과학연구소에서 연설할 예정이라고 보고했다. 이에 외교부 장관은 공항 영송과 가능한 모든 편의를 제공하라고 지시했고, 백림 총영사는 김대중에 대한 공항 영송과 일정 주선에 나섰으며 오찬까지 주최했다. 겉으로는 김영삼 정부가 김대중에게 호의를 베푼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달랐다.
백림 총영사는 김대중이 사회과학연구소에서 밝힌 '3단계 점진적 통일계획'의 국문·영문판 연설문을 입수해 즉각 외교부 장관에게 송부했다. 또한 외교부 구주국(유럽국)은 '김대중 전 민주당 대표 유럽순방 활동'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작성, 김대중의 2월 백림 방문 내용과 4월 구주공동체(EC·유럽연합 전신) 접촉 일정을 상세히 정리했다. 특히 김대중이 EC 대외경제 관계자에게 "쌀은 한국에 있어 단순한 경제문제가 아닌 사회, 정치, 안보 문제로서 신중히 다뤄야 한다"고 발언한 점까지 첨부했다.
김영삼 정부는 김대중의 '6월 말 귀국'이 가까워지자 감시 수위를 높였다. 1993년 6월 1일 백림 총영사관은 "김대중이 6월 말 귀국에 앞서 백림 방문 예정인 것으로 탐문 된다"라고 보고했다. /대통령기록관 |
김영삼 정부의 이같은 행보는 김대중의 정계 복귀에 기인한 것으로 풀이된다. 당시 국내 정치권 안팎에서는 '김대중이 6월 말 귀국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특히 외교부 구주국이 김대중 유럽 순방 보고서를 작성했던 4월은 그의 6월 말 귀국 가능성이 언론을 통해 보도됐던 때다. 김영삼은 자신의 '영원한 라이벌' 김대중의 복귀가 가시화하자 정보 수집에 박차를 가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1993년 6월 1일 백림 총영사관은 "김대중이 6월 말 귀국에 앞서 백림 방문 예정인 것으로 탐문 된다"라고 보고하기도 했다.
김대중이 귀국 전 마지막 일정으로 에제르 바이츠만 이스라엘 대통령을 예방하자 김영삼의 경계심은 더욱 높아졌다. 김대중의 귀국이 임박했거니와 이스라엘이 북한과 접촉하고 있던 예민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외교부는 이스라엘을 겸임하는 주이탈리아 대사관 직원을 파견해 김대중과 동행하도록 했다. 또한 김대중에게 정부 입장을 전달하고, 바이츠만 대통령 예방 시 적절하게 대처해달라고 통보했다. 당시 이스라엘은 북한에 대(對)이란 중거리 미사일 판매 중단을 요청, 그 대가로 경제 원조와 외교 관계 수립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었다.
김대중이 영국 체류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뒤에도 김영삼의 감시는 계속됐다. 김대중은 이를 감지한 듯 서서히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김대중은 1993년 9월 26일 러시아 방문에 앞서 관련 일정을 주러시아 대사관에 전달하면서도 '협조 제의'에 대해서는 거부한다고 못 박았다.
김대중은 또 러시아 방문 전 독일 경유를 계획했지만 이를 김영삼 정부 측에 공유하지 않았다. 실제로 1993년 9월 16일 주독일 대사관은 외교부 장관에게 "김대중이 백림에서 강연할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김대중 비서실은 세부 일정을 밝히지 않고 있다"고 보고했고, 1993년 9월 17일 주미국 대사관 역시 "김대중 측은 개인적 방문을 이유로 구체적 일정 및 현지 계획을 잘 알려주지 않고 있다"고 토로했다.
김영삼 정부는 외교부와 행정조정실을 동원해 김대중의 해외 순방 일정을 파악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러다 돌연 김대중의 항공 편명을 확보해 관련 재외공관에 배포했다. /외교부 제공 |
당시 행정조정실(국무조정실 전신)까지 '김대중 해외순방 보고서'를 작성할 정도였던 점을 미뤄보면, 김영삼은 김대중의 일정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에 상당한 답답함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행정조정실에서는 "김대중 비서실이 세부 일정을 밝히지 않고 있으며 외교부의 일정 협조 제의도 사양하고 있다"며 기존 내용을 되풀이하는 데 그쳤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1993년 9월 20일 외교부 장관은 돌연 김대중이 이용할 독일, 러시아, 미국 항공 편명을 모조리 파악해 재외공관에 일괄 송부했다. 이에 관련 재외공관에서는 해당 정보를 토대로 김대중의 정확한 일정을 외교부 장관에게 속속 보고했다. 김대중이 순방 세부 일정을 알리지 않았고 외교부, 행정조정실에서도 진전이 없던 상황에서 3개국 항공 편명이 어떻게 확보될 수 있었는지 의문이다.
김대중의 해외 일정을 손바닥 보듯 꿰뚫은 김영삼 정부는 그의 뒤를 쫓았다. 해당국 재외공관은 김대중이 외신 인터뷰, 연설회, 강연회 등에서 밝힌 통일론, 대북 정책, 향후 정치활동 여부 등을 일일이 취합했고 이를 외교부 장관에게 보고했다. 김대중에 대한 외교부 보고는 그가 미국 방문을 마치고 일본으로 넘어갈 때까지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 외교 전문만으로 확인할 수 있는 김영삼 정부의 김대중 추적은 1993년 2월 12일부터 1993년 10월 12일까지 8개월간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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