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전두환 시절, 비판 기사로 입국 금지
북유럽 언론계, 한목소리로 해제 요청
외교적 마찰 부담, 10여년만 입국 허가
외교부는 매년 '30년 경과 비밀해제 외교문서'를 공개한다. <더팩트>는 박정희·전두환 시절 한국 정부에 비판적인 기사를 썼다는 이유로 10년 넘게 한국에 입국할 수 없었던 보 구나르손(Bo Gunnarsson) 스웨덴 기자의 이야기를 재구성했다. /임영무 기자 |
외교부는 매년 30년이 지난 기밀문서를 일반에게 공개합니다. 공개된 전문에는 치열하고 긴박한 외교의 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전문을 한 장씩 넘겨 읽다 보면 당시의 상황이 생생히 펼쳐집니다. 여러 장의 사진을 이어 붙이면 영화가 되듯이 말이죠. <더팩트>는 외교부가 공개한 '그날의 이야기'를 매주 재구성해 봅니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외교비사(外交秘史)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감춰져 있었을까요? <편집자 주>
[더팩트ㅣ김정수 기자] 1986년 2월 27일. 88 서울올림픽 준비로 분주한 문화공보부(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게 전문 한 통이 도착했다. 발신처는 주스웨덴 대사관. 약 9년간 입국이 금지된 보 구나르손(Bo Gunnarsson) 스웨덴 기자가 취재를 위해 한국 방문을 희망한다는 내용이었다. 문공부 장관은 단칼에 "허락하지 않는다"고 통보했다. 구나르손 기자와 한국 정부 사이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구나르손은 당시 군부 정권에 있어 무척 거슬리는 기자였다. 그는 1972년 김지하 시인의 '오적 필화 사건'을 기고하고 1974년에는 '독재자 박정희, 한국을 철권으로 장악'이라는 내용의 기사를 보도했다. 독일 간호사 인력 수출과 고아 입양 문제 등 정권이 불편해하는 기사들의 기자명에는 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1977년 8월 5일 구나르손에 대한 한국 입국 금지 조치를 전격 단행하게 된다.
그로부터 9년 뒤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면서 구나르손은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자 했다. 한국의 정치 상황이 어떻게 변화했고, 다가오는 88 서울올림픽은 얼마나 준비됐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는 그가 악의적인 반한(反韓) 기사를 작성했고, 입국 금지 조치 이후에도 덴마크 '좌경'(左傾·좌익사상에 기울어짐) 언론사에 편향적 기사를 게재했다며 그의 요청을 거절했다.
1987년 전두환 대통령이 88올림픽 준비 상황 보고회를 주재하는 모습. /대통령기록관 |
절망도 잠시, 구나르손은 자국 외무성을 끌어들여 논의의 장을 열고자 했다. 그는 '스웨덴 외무성이 언론 자유를 가로막는 한국의 조치를 직시해야 한다'는 내용의 기사를 작성, 주스웨덴 대사관과 스웨덴 외무성 관계자의 면담이 이뤄지도록 했다. 스웨덴 측은 "언론인들의 자유로운 왕래가 중요하다"는 의견을 전달했지만 한국 측은 "비록 언론인이지만 고의로 왜곡보도를 일삼아 국가적 위신을 저해했다"며 강경한 입장을 고수했다.
구나르손은 군부 정권의 높은 벽에 번번이 가로막혔지만 멈추지 않았다. 1987년 3월 9일 동경(도쿄) 특파원으로 부임한 그는 주일 대사관을 찾아 입국 금지를 풀어달라며 거듭 요청했다. 구나르손은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한국 정부에 비판적 기사를 작성해서가 아닐까 한다"며 "9년 전 일로 아직 입국이 금지된 건 납득하기 어렵다"고 토로했다. 이에 주일 대사관 측은 '성의의 표시'로 편향적인 기사를 쓰지 않겠다는 일종의 각서를 작성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하지만 구나르손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거절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이 벌어진 뒤에도 구나르손에 대한 입국 허가는 좀처럼 이뤄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 대한 감시는 더 심해졌다. 주일 대사관은 그해 8월 8일 구나르손이 작성한 '올림픽 남북 분산 개최'와 관련된 기사가 북한 입장을 대변한 것이라며 이를 외무부 장관에게 보고했다. 그러면서 구나르손을 만나 "일방적으로 북한을 옹호하는 인상을 주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며 "입국 금지 해제는 고려될 시점이 아니다"라고 했다. 시각을 바꾸지 않으면 입국은 허용될 수 없다는 일종의 경고였다.
문공부 장관이 1986년 3월 4일 구나르손 기자의 입국을 허가할 수 없다며 외무부 장관에게 보낸 전문. /외교부 제공 |
1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면서 구나르손의 기대도 점차 사그라들었을 때, 예상외의 곳에서 물꼬가 트였다. 당시 구나르손은 스웨덴뿐 아니라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 등 북유럽 국가의 동경 특파원으로 채용된 상태였다. 이 중 노르웨이의 경우, 자국 언론사의 동경 특파원으로는 구나르손이 유일해 그의 한국 입국이 거절된다면 88 서울올림픽 등을 취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구나르손이 소속된 노르웨이 언론사는 주노르웨이 대사관에 그의 입국 불허 조치를 해제해달라고 요청했다. 해당 언론사는 "구나르손이 한국 관련 기사로 입국이 금지된 것은 알고 있지만 이미 10년 전 일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보냈다. 구나르손이 소속된 스웨덴 언론사에서도 주스웨덴 대사관에 그의 기사를 첨부, "최근 수개월간 한국에 적대적인 내용은 없고 그를 계속 입국 금지하는 것은 불공평하다"며 취재 허가를 부탁했다.
구나르손에 대한 소식이 곳곳에 전해지면서 언론계에서도 그에게 힘을 실어주기 시작했다. 스웨덴 기자 연맹은 구나르손의 입국 규제 해제 요청 서신을 한국 측에 보냈고, FCJJ(일본 외국인 특파원협회)에서는 구나르손의 한국 입국을 건의하고 나섰다. 한국기자협회를 통해서는 벨기에 소속 국제기자연맹의 관련 서한이 접수되기도 했다.
1988년 노태우 대통령이 88올림픽선수단 격려 연설 당시. /대통령기록관 |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가자 한국에서도 관계 부처 간 논의가 시작됐다. 외무부, 문공부, 법무부를 포함해 심지어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까지 테이블에 앉았다. 부처 간 조율 끝에 결국 1988년 5월 12일 구나르손에 대한 입국 금지가 해제됐다. 정부는 "새 정부 출범과 더불어 언론 개방 정책의 과감한 이행의지 표시로서 1977년 8월 입국 금지된 구나르손 기자에 대해 관계 부처 간 협의를 마친 후 규제 조치를 해제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실상은 스웨덴, 노르웨이 등 북유럽 국가와의 외교적 마찰 가능성이 주된 이유였다.
구나르손은 1988년 5월 25일 드디어 한국 땅을 밟게 됐다. 그는 사전에 약 3주간의 취재 계획을 한국 정부 측에 알렸다. 이는 10여 년 만에 입국 금지 조치를 풀어준 한국 정부에 사의를 표하는 의미로 해석된다. 구나르손은 88 서울올림픽 관련 인터뷰, 국내 기업 탐방, 판문점·평화의댐 방문 및 이산가족 면담 등을 계획했다.
정부는 구나르손에게 취재 편의를 제공하면서도 의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 외무부 장관은 주스웨덴 대사와 주노르웨이 대사에게 구나르손이 5월 25일부터 3주간 방한하고 있다며 그의 기사가 만일 게재된다면 즉시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주일 대사관은 한국에서 취재를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온 구나르손과 접촉해 그의 보도 계획을 입수, 이를 상세히 정부 측에 공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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