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재 "정치활동의 자유와 선거중립의무 중 후자 우선"
미국 등은 공무와 개인 선거활동 엄격 분리
윤석열 대통령이 22대 총선을 앞두고 지방 행보를 이어가면서 야권의 '관권 선거' 비판이 이어졌다. 윤 대통령이 사전선거 첫날인 5일 부산을 방문해 사전투표하고 여러 행사에 참석한 모습. /뉴시스 |
[더팩트ㅣ용산=박숙현 기자] 윤석열 대통령이 22대 총선 국면에서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고발되면서 대통령의 '선거 중립 의무'가 정치권에서 다시 화두로 떠올랐다. 미국, 독일 등은 행정부 수반으로서의 '선거 중립 의무'와 개인 정치인으로서의 자유를 동등하게 중시하면서 정상의 정치 활동을 넓게 허용하고 있다. 선거철마다 반복되는 대통령의 '관권 선거' 논란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치권이 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논의할 필요성도 제기된다.
윤 대통령은 22대 총선을 앞두고 야당, 시민단체로부터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앗달아 신고, 고발당했다. 올해 들어 실시한 '민생토론회'가 발단이었다. 24차례 민생토론회 개최지역은 서울 5회, 경기 9회, 영남 4회, 충청 3회, 인천 1회, 강원 1회, 전남 1회로, 공교롭게도 수도권, 영남, 충청권 등 총선 주요 접전지에서 열렸다.
이를 두고 야당, 시민단체 등은 '공무원 등은 직무 또는 지위를 이용해 선거에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고 규정한 공직선거법 제85조 제1항 '공무원 등의 선거 관여 등 금지' 위반 등에 해당한다고 지적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지난 5일 중앙선관위에 신고장을 제출하면서 "(尹 대통령이) 민생토론회를 총선 접전지에서 집중 개최,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했다"고 지적했다. 토론회 개최지별 맞춤 개발사업을 발표하고, 주제별 이해관계자들에 대한 지원 약속이 선거운동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이에 앞서 참여연대는 지난달 21일 서울시선관위에 신고하면서 "윤 대통령이 각종 지역 개발공약을 제시하고, 지역 숙원사업 추진을 약속하면서 여당과 여당 후보자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선거에 부당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했다.
야당도 윤 대통령의 릴레이 민생토론회 개최를 '관권 선거'라며 형사고발한 상태다. 더불어민주당은 지난달 7일, 녹색정의당은 지난달 28일 윤 대통령을 경찰에 고발했다. 민생토론회에서 당정에 유리한 각종 지원 사업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각 부처 공무원들이 동원되는 것 역시 선거 개입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와 관련, 지난 대선 과정에서 한 여성가족부 공무원이 민주당 정책연구위원으로부터 대선 공약에 활용할 자료를 요구받고 부서 내 각 실·국에 정책 공약 초안 작성을 요청해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받기도 했다.
윤 대통령은 공식 선거운동에 돌입하면서 민생토론회는 중단했지만, 지방 행보를 이어가면서 '관권 선거' 비판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윤 대통령은 지난 2일 충남 공주시를 찾아 지난해 여름 집중호우로 수해가 발생했던 지역의 현장을 둘러보고 복구 상황을 점검하고, 부친의 고향마을인 충남 논산시 노성면의 명재고택과 파평 윤씨 종학당을 찾았다. 이어 '의료개혁' 현안 관련해 지역 종합병원인 공주의료원을 찾아 의료진과 간담회를 가졌다.
사전투표 첫날인 지난 5일에는 부산으로 내려가 투표했고, '부산항 신항 7부두 개장식'과 부산 강서구 명지근린공원에서 열린 '제79회 식목일 기념행사' 참석, 부산대병원과 부산 진구에 위치한 삼광사를 방문하기도 했다. 윤 대통령이 직접 내려가 사전투표한 부산 강서는 이번 총선 초접전지로 꼽히는 지역이다. 사전투표 마지막 날인 6일에는 용산어린이정원을 찾아 시민들과 만났다. 이에 대해서도 야당은 8일 논평을 내고 "노골적인 선거 개입을 이어갔다(최혜영 민주당 대변인)"고 비판했다.
이와 함께 문화체육관광부가 사전투표 하루 전날 정부 부처에 공무원들이 볼 수 있도록 '대통령이 선택한 길'이라는 대통령 정책 홍보 영상을 올려달라고 요청한 사실도 밝혀져 논란이 일었다. 야당은 "이제 공무원과 군인들마저 선거에 이용하려는 것이냐"며 비판했다. 이에 대해 문체부는 이날 보도설명자료를 내고 "당연히 해야 할 국정홍보의 기본업무 중 하나"라고 일축했다.
대통령의 '공직선거법 위반'은 선거철마다 자주 입에 오르내렸다. 이명박·박근혜·문재인 등 역대 대통령들도 총선을 앞두고 지역 민생 행보를 늘렸고 그때마다 당시 야당은 '관권선거'라고 비판했다. 이는 대통령의 이중적 지위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선거법은 대통령의 당적 보유는 허락하지만 정치중립은 의무화하고 있다. 이에 대통령은 소속 정당을 위해 정당활동을 할 수 있는 '개인'으로서의 지위와, 국민 모두에 대한 봉사자로서 공익실현의 의무가 있는 '헌법기관'으로서의 지위가 모두 있는데 그 경계가 모호해 매번 '선거 개입' 논란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헌법재판소는 현재 대통령의 '헌법기관'으로서의 정치적 중립의무에 무게를 두고 있다. 지난 2007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야당 대선 후보 비판 발언에 대한 선관위의 '정치적 중립 준수 요청'을 취소해달라고 헌법소원을 재기했는데 헌재는 선관위 손을 들어줬다. 헌재는 결정문에서 "선거활동에 관하여 대통령의 정치활동의 자유와 선거중립의무가 충돌하는 경우에는 후자가 강조되고 우선돼야 한다"고 판단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대통령의 선거중립으로 인해 얻게 될 '선거의 공정성'은 큰 반면 대통령이 감수해야 할 '표현의 자유 제한'은 한정적이라는 것이었다. 공명선거에 대한 책무도 강조됐다. 대통령의 중립 의무를 엄격히 제한하고 있는 데는 과거 독재 정권 시절 공무원들을 동원해온 '관권 선거'에 대한 국민 부정 여론이 깊게 반영됐다는 해석도 나온다.
2014년 11월 03일 미국의 11·4 중간선거를 앞두고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펜실베이니아주 민주당 주지사 후보인 톰 월프에 대한 지원 연설을 하고 있는 모습. 미국 대통령은 선거 중립의무에서 예외다. 대신 선거유세를 개인 활동으로 보고 관련 경비나 시간을 공무와 분리하고 있다. /AP=뉴시스 |
해외는 어떨까. 미국 대통령이나 독일 총리가 총선을 앞두고 지원 유세하는 풍경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미국에선 연방공무원의 정치활동을 금지한 '해치법'(Hatch Act)에 따라 연방공무원들은 선거 중립의무를 지켜야 하지만 대통령은 예외다. 다만 미국은 행정부 수반으로서의 공무가 아닌 개인으로서 선거활동에 드는 경비는 대통령이 사비로 해결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 독일이나 영국 총리도 개인적인 시간이나 휴가 기간에 선거 유세를 할 수 있다. 행정부 수반으로서의 정치적 중립 의무와 개인으로서의 정치적 자유를 함께 보장하면서도, 공무와 분명하게 분리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