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보다 3조4000억 원 깎여
기초연구·출연연구기관 운영 예산도 삭감
'지출 구조조정' 세부 내역 불투명
정부가 제출한 내년도 주요 R&D 예산안 규모는 올해보다 3.9% 삭감됐다. 2022년 12월 22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미래 과학자와의 대화에서 격려사를 하고 있는 윤석열 대통령. /대통령실 제공 |
[더팩트ㅣ용산=박숙현 기자] 내년도 주요 R&D 예산 삭감이 정치권 현안으로 떠올랐다. 윤석열 정부는 그동안 '정부 총지출의 5%를 R&D 예산으로 유지하겠다'고 밝혀왔기에 예상 밖의 일이었다. 당초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지난 6월 내년도 R&D 예산을 올해 대비 2.5% 늘려 편성했다. 그러나 "나눠 먹기식, 갈라먹기식 R&D는 제로베이스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이 나오자, 과기부는 주요 R&D 예산을 올해보다 13.9%(약 3조4000억 원) 깎은 21조5000억 원으로 책정했다.
정부·여당은 문재인 정부에서 주요 R&D 예산이 급격히 늘어났고 이에 따른 비효율과 낭비를 줄이기 위한 '전략적 예산 배분'이라는 입장이다. 대통령실 관계자도 "(정부가 발표한) R&D 예산은 올바른 방향"이라며 "R&D 예산에 나눠 먹기 하는 예산이 너무 많은 것 아니냐는 지적이 있었는데 그 부분을 이번에 정리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야당과 학계는 정부가 현장의 의렴수렴 과정도 거치지 않고 '대통령 말 한마디'에 성급하게 R&D 예산을 삭감했다며 국가 미래경쟁력이 타격을 입을 수 있다고 반발하고 있다. 논란이 커지자, 정부·여당이 필요한 부분에 한해 R&D 예산 증액을 검토한다는 관측도 나왔다. 그러나 최상목 대통령실 경제수석이 19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현지 브리핑에서 "사실이 아니다"라며 일축해 R&D 예산 방향은 다시 혼란에 빠진 상황이다.
[검증대상] 2024년 주요 R&D 예산의 대폭 삭감 이유와 적절성
[검증 방법] 2023년-20204년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예산안 비교분석, 2024년 R&D 예산 비효율 조정 예시, 정부 R&D 제도 혁신 방안, 2024년 국가연구개발사업 예산 배분·조정 결과 등 자료 분석, 학계 취재
윤 대통령은 지난 6월 28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2023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R&D 재검토"를 지시했다. 이후 과기부는 6월 1차 예산 편성안을 대폭 수정했다. /대통령실 제공 |
[검증 내용]
정부는 지난 정권이 R&D 예산의 양적 확대에 치중해 질적 개선에 소홀히 해왔다고 지적하면서, 이 같은 문제의식이 이번 예산안 편성에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삭감 대상 사업에는 올해 종료 사업을 비롯해 나눠주기식, 관행적 추진, 유사·중복, 정책 우선순위가 낮은 사업 등에 대한 전면적인 구조조정이 포함됐다고 밝혔다.
주요 R&D 예산안을 분야별로 살펴보면 올해보다 △지역기업 사업화 25%(6300억 원) △디지털전환 34.7%(8500억 원) △탄소중립 15.3%(3600억 원) △재난·안전 등 생활밀착형 15.2%(3400억 원) △국방 12.7%(4219억 원) 등에서 대폭 삭감됐다. 기초연구·인력양성 예산은 윤 대통령이 강조하고 있는 '글로벌 R&D'의 세부 항목으로 들어가 통합됐다. 즉, '글로벌 R&D(기초연구·인력양성 포함)' 예산은 올해보다 23%(8375억 원) 깎인 셈이다. 이를 모두 합치면 주요 R&D 예산의 총 감액 규모는 3조4394억 원이다.
정부는 삭감 대상 사업으로 전임 정부에서 주요 현안으로 떠올라 집중 지원했던 △소부장(소비·부품·장비) 사업 △감염병 대응 사업 △중소기업 뿌려주기식 사업 △관행적 사업 등을 예로 들었다. 소부장 분야는 대일 수출규제 대응 중심에서 미래 글로벌 공급망 선점을 위한 도전적 연구나 핵심 전략 부품 중심 투자 지원으로, 감염병 관련 사업은 감염병 대응 기반 확립 지원으로, 기업 관련 R&D 지원은 보조금 지급 중심에서 빅테크 등 고위험·고성과 첨단기술의 초기 창업 지원으로 전환했다는 것이다. 정부에 따르면 이른바 '비효율 사업'의 총 감소액은 1조8300억 원으로, 전체 삭감액의 53.2%다.
이와 관련, 과기부는 국회 과학기술방송통신위원회에 '2024년 R&D 예산 비효율 조정 예시' 자료를 제출해 '비효율, 나눠먹기' 예산과 관련해 사업들을 구체적으로 소개했다. 우선 보건복지부의 '미래성장 고부가가치 백신 개발', '백신 기반 기술개발', '신속범용백신기술개발' 등 3개 사업이 유사해 '글로벌 백신기술선도사업'으로 통폐합하고 예산도 대폭 줄였다고 설명했다. 또 중소벤처기업부의 '공정품질기술개발사업'은 중소기업의 생산성 향상을 위해 지원하는 사업임에도 '뿌려주기식'으로 운영됐다는 이유로, 산업통상자원부의 '공공에너지 선도투자 및 신산업 창출지원사업'은 사실상 단독 입찰, 단독 선정되는 등 경쟁률이 낮았다는 이유로 예산을 대폭 줄였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처럼 과기부가 세세하게 이유를 들어 공개적으로 밝힌 '비효율 예시' 사업은 총 12개 사업(총 사업액 1272억2200만 원)에 불과하다. 정부는 주요 R&D 예산을 포함해 23조 원의 지출구조 조정 세부 내역을 공개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예산 증감액에 따른 이해관계자가 얽혀 있어 부담이 된다는 것이다. 정부가 제출한 예산안에 각 사업별 증감액이 나와 있지만, 사업이 통폐합되거나 사업명이 바뀌면 실제 구조조정 내역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정부가 세부 자료를 제공하지 않는 한, 주요 R&D 삭감 대상 사업이 실제로 '비효율·나눠먹기'를 이유로 예산이 깎였는지를 정확히 검증하기는 매우 어려운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더팩트>는 이정문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과학기술정보통신부로부터 제출받은 '2024년도 예산안 및 기금운용계획안 사업설명자료'를 분석해 내년도 과기부 예산안의 적절성을 들여다봤다.
이에 따르면 2024년 과기부 예산안 규모는 올해보다 20.5%(2조284억 원) 삭감된 7조8560억 원이다. 이중 삭감된 'R&D' 사업은 193개(60.8%)로, 총 1조2658억6700만 원이 깎였다. 전 부처의 주요 R&D 예산안 삭감액의 36.7%가 과기부 사업에 속해 있다.
감액 상위 10개 R&D 사업을 살펴보면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연구운영비 지원(391억7400만 원) △ICT R&D 혁신바우처지원(382억8900만 원) △ICT융합산업혁신기술개발(323억8100만 원) △기초과학연구원 연구운영비 지원 (313억1500만 원) △인재활용확산지원사업(308억7600만 원) △한국지질자원연구원연구운영비지원 (297억2700만 원) △연구개발특구육성(282억7700만 원)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연구운영비 지원 (281억2800만 원) △나노·소재기술개발 (280억5200만 원) △한국전자통신연구원연구개발지원 (274억9900만 원)등이다. 주로 출연연구기관의 연구운영비가 대폭 삭감된 것으로 파악된다.
사실상 사업 폐지 수준인 '80% 이상' 삭감된 R&D 사업은 35개, '50% 이상' 삭감된 사업은 총 63개였다. 이 중에는 내년이 종료사업으로 마무리 단계인 사업들도 다수 있었지만, 정부가 밝힌 뿌려주기식·유사중복 등의 이유와는 거리가 먼 사업들도 보였다.
'자율형IoT핵심기술개발(사업기간 2026년까지)' 사업은 사물이 스스로 상호 소통 및 협업해서 임무를 수행하는 자율형 IoT 핵심원천기술을 개발해 초연결·초자동화의 기반을 마련한다는 게 목표다. 중기 재정계획에서는 올해처럼 내년에도 25억3300만 원을 투입하겠다고 밝혔지만, 4억500만 원으로 84% 깎였다. 또 '초전도 도체 시험설비 구축' 사업은 핵융합 실증용 초전도 도체 성능 시험을 위한 16T급 초전도 도체 시험 시설 구축을 목표로 한다. 정부의 '제4차 핵융합에너지개발진흥 기본계획'에서도 '초전도체'에 대해 핵융합에너지 개발을 선도하기 위해 착수해야 할 기술개발 분야라고 명시하고 있을 정도로 주요 사업이다. 사업 기간은 오는 2027년까지이며 예상 사업비는 총 498억 원이다. 중기 재정계획에 따르면 당초 내년에 101억2900만 원을 투입할 예정이었으나, 3억 원만 책정됐다.
국가과학기술 기반의 두 축이라 할 수 있는 출연연구기관과 기초연구 부문에서도 대폭 삭감된 점이 특징적이다. 과기부 소관 출연연구기관에 대한 연구운영비는 올해보다 5720억 원(17.1%) 삭감돼 2조7797억 원이 편성됐다. 또한 개인기초연구(3억8100만 원), 집단연구지원(169억9800만 원), 기초연구기반구축(19억3000만 원), 원자력기초연구지원사업(29억9100만 원) 등 기초과학 연구지원 예산은 올해보다 223억 원(-10.4%) 줄어 2조495억8000만 원으로 책정됐다.
정부는 그동안 R&D 예산의 비효율을 걷어내고 세계 최고 수준의 혁신적 R&D,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와 함께하는 연구 중심으로 R&D 투자를 늘리겠다고 밝혔다. 이를 통해 성장동력을 창출하고 국가 경쟁력의 핵심인 인재를 키워내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증액 규모 상위 10개 R&D 사업을 살펴보면 △차세대발사체개발사업(1101억600만 원)△바이오.의료기술개발(3048억9200만 원)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연구운영비 지원(1952억2600만 원) △디지털기술선도 핵심인재양성(478억9000만 원) △정보보호핵심원천기술개발(1075억7000만 원) △혁신형 소형모듈원자로(i-SMR)기술개발사업(273억7000만 원)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시설 지원(215억3100만 원) △차세대네트워크(6G) 산업기술개발(150억 원) △한국생산기술연구원 시설 지원(137억7900만 원) △실감콘텐츠핵심기술개발(445억7700만 원) 등이다. 출연연구기관의 '시설지원' 사업비가 대폭 확대된 점이 눈길을 끈다. 과기부 R&D 예산 중 내년부터 집행될 신규 사업은 총 73개(사업비 총 4061억9800만 원)로 파악됐는데, 이중에서도 '시설지원' 사업비가 1717억200만 원으로, 전체의 42.2%를 차지했다.
과학계에선 특히 지속성이 요구되는 기초연구 부문 삭감에 대한 우려가 크다.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이 지난 8월 22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정부 R&D 제도 혁신 방안'과 '2024년 국가연구개발사업 예산 배분·조정 결과' 브리핑하는 모습. /뉴시스 |
[검증 결과]
정부는 내년도 주요 R&D 예산을 14% 삭감한 배경으로 나눠 주기식, 관행적 추진, 유사·중복, 정책 우선순위가 낮은 사업 등을 이유로 내세웠지만, 구체적인 구조조정 세부 내역이 공개되지 않는 한 정확한 삭감 이유 분석에는 한계가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다만 과기부의 R&D 사업 중에는 지속성이 요구되는 핵심 기술개발 예산이 대폭 삭감된 경우도 있었다. 특히 이번 예산안에서는 과학기술 발전의 기반이 되는 '기초과학연구' 예산이 소폭 깎이면서 선진국과의 협력을 다루는 '글로벌 R&D' 항목으로 편입된 점이 주목된다. 정부가 효율성과 경쟁력을 높인다는 이유로 학계의 목소리 반영 없이 예산안을 짜냈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어 보인다. 정부는 R&D 시스템을 혁신하기 위해 출연연구기관 운영비를 삭감하는 대신 상대평가를 전면 도입해 하위 20% 사업은 예산을 삭감하기로 하는 등 경쟁체제를 도입한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과학계에선 연구활동 위축, 국가 미래 경쟁력 타격 등의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기초연구연합' 회장인 정옥상 부산대 교수는 <더팩트>와 통화에서 "기초 연구는 법칙이 나오려면 짧게는 10년 길게는 1세기를 거쳐 나온다. 그래서 기초 연구는 10년, 20년 지속적으로 되고 있는데 갑자기 정부가 전환하면 연구하고 있던 이들은 황당하고 혼란스럽다. 연구 현장에서 한 40년 있었는데 이런 경우는 없었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게 깎이면 지금 연구하던 분들이 갑자기 손을 놔야 한다. 또 기초과학 연구는 다양성과 지속성을 유지해줘야 하는데, 깎인 액수보다도 판을 흔들어 놓은 게(문제)"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기초연구 예산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법적 제도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